경복궁 훼철

hanyang
이수민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5일 (일) 16: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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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병합 이전부터 경복궁의 전각을 차례로 해체하여 갔는데 1909년 6월에는 건청궁을, 1910년 5월에는 공원을 조성할 목적으로 전각 4,000여간을 경매에 부쳤다. 1911년에는 이왕직에서 순종의 명의로 조선총독부경복궁 부지의 권리를 넘기면서 경복궁 전각 및 시설에 대한 훼철과 매각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이왕직에서 총독부에 인도한 경복궁의 전체 면적은 약 198,624평에 이른다. [1] 경복궁에 대한 권리를 총독부에 이관한 이후에도 창덕궁의 전각을 보수하고 중건하는 재목으로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하였다.

  •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조선총독부 주관)
  • 191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 1918년 창덕궁 소실에 따른 전각의 이전
  • 1923년 전차선 개설(조선농회의 조선부업품공진회 개최)
  •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조선축산협회 주관)
  • 1926년 조선박람회(조선신문사 주관)
  • 1929년 조선박람회 개최에 따른 궁장 훼철
  • 1935년 경복궁 일반인에 공개, 조선산업박람회(조선신문사 주관) 개최


경복궁의 파괴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나 기념 행사를 치르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경복궁 경내는 공진회 이전부터 샅샅이 파헤쳐졌다. 공진회 개최를 위한 전시장 부지를 마련한다는 구실이었다. 어쩌면 총독부는 새 청사 신축에 앞서 경복궁을 파헤칠 핑계를 찾기 위해 이러한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정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홍화문과 그 양쪽 옆을 지키던 유화문, 용성문, 협생문 등이 한꺼번에 헐려 나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근정문 앞을 흐르던 금천의 영제교는 그 앞에 놓여 있던 돌사자 세 마리와 함께 뜯겨져 경복궁 서족 창고인 내사복 바깥 정원으로 옮겨졌다. 동궁이라 불리던 자선당도 이대 함께 헐려 나갔다.

일제의 조선 통치 5년이 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면서 당시 공진회 개최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 9월 전 3권으로 분책하여 발간하였다. 이 보고서 안에 공진회장 배치도와 사진이 실려있는데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를 바탕으로 진열장 및 미술관 등 내부 시설물의 배치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남아있는 건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데 건청궁 지역은 공터로 남아 있어 1915년 이전에 훼손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경복궁 북서측의 경우 태원전 지역의 주 건물인 태원전과 전면 복도각 정도만이 남아있으며, 집옥재 일곽 정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한편, 공진회는 궁내 7만 2800평을 이용하였는데,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 주된 건물은 적당히 수리한 후 회장의 일부로 사용하였고 기타 재래의 건물은 대부분 제거하였으며, 거기에 각종 진열관을 새로 지어 사용하였다. 공진회 개최라는 명분 속에서 경복궁의 해체가 가속화된 것이다. 공진회를 위해 사용된 건물의 평수는 5226평으로 당시 일본에서 개최한 연합부련공진회와 비교하여도 규모면에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대하였다.

경복궁이 일반에게 이용된 것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된다. 1955년 해방 10주년 산업박람회, 1961년 근정문 특설무대의 5.16혁명군 위문공연, 1962 5.16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등 궁궐의 기능보다 정치적인 목적 하에 경복궁의 공간이 활용되었다.

  1. 『순종실록 부록』권2, 순종 4년, 5월 17일. 李旺茂(Lee wang-moo). "경복궁 자경전 ‘瑞獸’의 고찰." 역사민속학 0.48 (2015): 133-158. 138쪽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