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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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1일 (수) 21:37 판 (새 문서: 경복궁의 파괴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나 기념 행사를 치르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경복궁 경내는 공진회 이전부터 샅샅이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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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파괴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나 기념 행사를 치르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경복궁 경내는 공진회 이전부터 샅샅이 파헤쳐졌다. 공진회 개최를 위한 전시장 부지를 마련한다는 구실이었다. 어쩌면 총독부는 새 청사 신축에 앞서 경복궁을 파헤칠 핑계를 찾기 위해 이러한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정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홍화문과 그 양쪽 옆을 지키던 유화문, 용성문, 협생문 등이 한꺼번에 헐려 나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근정문 앞을 흐르던 금천의 영제교는 그 앞에 놓여 있던 돌사자 세 마리와 함께 뜯겨져 경복궁 서족 창고인 내사복 바깥 정원으로 옮겨졌다. 동궁이라 불리던 자선당도 이대 함께 헐려 나갔다.

일제의 조선 통치 5년이 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면서 당시 공진회 개최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 9월 전 3권으로 분책하여 발간하였다. 이 보고서 안에 공진회장 배치도와 사진이 실려있는데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를 바탕으로 진열장 및 미술관 등 내부 시설물의 배치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남아있는 건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데 건청궁 지역은 공터로 남아 있어 1915년 이전에 훼손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경복궁 북서측의 경우 태원전 지역의 주 건물인 태원전과 전면 복도각 정도만이 남아있으며, 집옥재 일곽 정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한편, 공진회는 궁내 7만 2800평을 이용하였는데,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 주된 건물은 적당히 수리한 후 회장의 일부로 사용하였고 기타 재래의 건물은 대부분 제거하였으며, 거기에 각종 진열관을 새로 지어 사용하였다. 공진회 개최라는 명분 속에서 경복궁의 해체가 가속화된 것이다. 공진회를 위해 사용된 건물의 평수는 5226평으로 당시 일본에서 개최한 연합부련공진회와 비교하여도 규모면에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