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鉶)은 조선시대 국가 제사를 지낼 때 화갱(和羹)을 담는 제기이다. 『예서(禮書)』에 ‘형정(鉶鼎)은 국[羹]을 담는 것이요, 형갱(鉶羹)은 오미(五味)를 갖추어 끓인 국이다. 국을 일컬을 때는 형갱이라 하고, 그릇을 지칭할 때는 형정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주희(朱熹)의 제자인 황간(黃幹)의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의 주(注)에 ‘화갱이란 형에 담은 국이니 오미가 조화되고, 날고기의 삶은 것이 적절함을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은 국을 담는 등(㽅)과 짝을 이루어 각각의 제사에서 동일 수량으로 진설되었고,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지녀서 ‘등’과 함께 거론되었다. 형은 오미를 갖춘 화갱을 담았고, 등은 조미하지 않은 대갱(大羹)을 담았다.[1]
세종실록오례 ◎ 형(鉶) :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형정(鉶鼎)은 국[羹]을 담는 것이요, 형갱(鉶羹)은 오미(五味)를 갖추어 끓인 국이다. 국으로써 이를 말한다면 형갱이라 하고, 그릇으로써 이를 말한다면 형정(鉶鼎)이라 한다."고 하였다. ◎ 鉶 : 《禮書》云: "鉶鼎, 所以實羹者; 鉶羹, 所以具五味也。 自羹言之, 則曰鉶羹, 自器言之則曰鉶鼎。"[2]
<국조오례의서례 권1, 길례(吉禮), 제기도설(祭器圖說)> 『예서(禮書)』에 말하기를, “형정(鉶鼎)은 국을 담는 것이요, 형갱(鉶羹)은 오미(五味)를 갖춘 것이다. 국으로 말하면 형갱(鉶羹)이요, 그릇으로 말하면 형정(鉶鼎)이다.” 했다. 禮書云鉶鼎所以實羹者鉶羹所以具五味也自羹言之則曰鉶羹自器言之則曰鉶鼎[5]
멱->포건[羃尊疏布巾] <세종실록오례 권128, 길례서례(吉禮序例), 제기도설(祭器圖說)> 『석전의(釋奠儀)』에 이르기를, “『삼례도(三禮圖)』에 베[布]의 幅은 2尺 2寸인데 이를 둥글게 하였으나, 지금은 베[布] 1幅으로써 네모를 취(取)하여 이를 만든다.”고 하였다.『주례(周禮)』에 이르기를, “팔준(八尊)은 천지(天地)에 헌작(獻酌)하는 까닭으로 굵은 포건(布巾)을 사용하니, 질박(質朴)을 숭상하기 때문이요, 육이(六彝)는 종묘(宗廟)에 관향(祼享)하는 까닭으로 포건(布巾)의 고운[精] 것을 사용한다. 그 구름을 그려서 문채를 놓는 것과 특생(特牲)의 멱[羃]은 모두 굵은 갈포(葛布)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釋奠儀云三禮圖布之幅二尺有二寸而圜之今以布一幅取方爲之周禮云八尊獻天地故用疏布巾尙質也六彝祼宗廟故用布巾之精者其畫雲爲文與特牲冪皆用綌 [6]
<세종실록오례 권128, 길례서례(吉禮序例), 제기도설(祭器圖說)>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비(匕)는 길이가 3尺이나 혹은 5尺이나 되니, 서직(黍稷)의 비가 있고, 생체(牲體)의 비가 있고, 소비(疏匕)가 있으니, 세 가지의 비는 가시나무로써 한다. 늠인(廩人) 의 개(槪) 는 서직(黍稷)의 비(匕)요, 옹인(雍人)의 개(槪)는 생체(牲體)의 비(匕)이니, 생체의 비는 도비(挑匕)이다. 그 제도는, 서직의 비는 도비보다 작고, 도비는 소비보다 작다. 유사(有司)가 제찬(祭饌)을 걷어치우면, 사마(司馬)가 두 손으로 도비의 자루를 잡고 청주(淸酒)를 떠내어 소비에 붓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 한다. 도비로써 떠난 뒤에 소비에 붓는 것이 세 번이나 된다면, 소비가 큰 것이다.” 고 하였다. 禮書云匕長三尺或五尺有黍稷之匕有牲體之匕有疏匕三匕以棘廩人之槪黍稷之匕也雍人之所槪牲體之匕也牲體之匕挑匕也其制則黍稷之匕小於挑匕桃匕小於疏有司徹司馬以二手執挑匕柄以挹渣사注于疏匕若是者三挹之以挑匕然後注于疏匕者三則疏匕大矣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