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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오례』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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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오례 권128, 길례서례(吉禮序例), 제기도설(祭器圖說)> 『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에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난도(鸞刀)는 옛날의 칼인데, 종묘(宗廟)에 사용하니, 종묘에서 지금의 칼을 사용하지 않고서 옛날의 칼을 사용함은 옛날의 일을 닦아 계승한 까닭이다.”하고, 『시경(詩經)』의 『신남산편(信南山篇)』에, “그 난도를 잡아 그 순색(純色)의 희생(犧牲)을 고(告)한다.”고 하였으며, 『예기(禮記)』의 『절해장(節解章)』에는 “반드시 난도가 있는 것은, 그 난령(鸞鈴) 의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이 조화(調和)된 후에 희생(犧牲)을 베게됨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으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선공(宣公) 12년에 정백(鄭伯)이 오른손으로 난도를 잡았다.”고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난도는 종묘(宗廟)에서 희생(犧牲)을 베고 끊는 칼인데, 고리[鐶]에 방울[和]이 있고, 칼 끝에 방울[鸞]이 있다. 칼 끝에 있는 것은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맞고, 세 방울[三和]이 고리에 있는 것은 소리가 각성(角聲) · 치성(徵聲) · 우성(羽聲)에 맞는다.”고 하였다. 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刀也用於宗廟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信南山曰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必有鸞刀者取其鸞鈴之聲宮商調和而後斷割也春秋公羊傳宣十二年鄭伯右執鸞刀注云鸞刀宗廟割切之刀鐶有和鋒有鸞在鋒聲中宮商三和在鐶聲中角徵羽 [3] |
국사편찬위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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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 |
난도 |
documents |
<국조오례의서례 권1, 길례(吉禮), 제기도설(祭器圖說)> 『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에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난도(鸞刀)는 고도(古刀)이며, 종묘(宗廟)에 쓰는 것이다. 종묘에 지금의 칼은 쓰지 않고 고도(古刀)를 씀은 옛것을 닦기 위한 까닭이다.” 했다. 『시경(詩經)』 신남산편(信南山篇)에 말하기를, “그 난도(鸞刀)를 잡고 그 털을 연다.” 했고, 『예기절해(禮記節解)』에 말하기를, “반드시 난도(鸞刀)를 씀은 그 방울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궁(宮)과 상(商)이 조화(調和)된 뒤에 고기를 벤다.” 했다.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의 선공(宣公) 12년에 정백(鄭伯)이 오른손에 난도(鸞刀)를 잡았다고 했다. 『주(註)』에 말하기를, “난도(鸞刀)는 종묘(宗廟)에서 고기를 베는 칼이다. 환(鐶)에 화(和)가 있고, 봉(鋒)에 난(鸞)이 있다. 난(鸞)이 봉성(鋒聲)에 있으면 소리가 궁상삼(宮商三)에 맞고, 화(和)가 환성(鐶聲)에 있으면 소리가 각치우(角徵羽)에 맞는다.” 했다. 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勺也用於宗廟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信南山曰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必用鑾刀取其鑾鈴之聲宮商調和而後斷割也春秋公羊傳宣士一年鄭伯右執鑾刀注云鑾刀宗廟切之刀鐶有和鋒有鑾鑾在鋒聲中宮商三和在鐶聲中角徵羽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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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상례보편』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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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상례보편 도설(圖說), 반우(返虞)> 항목없음. [5] |
조선후기 1758년(영조 34)에 영조(英祖)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하고 그중 흉례(凶禮)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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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관통고』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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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관통고 권86, 흉례(凶禮)> 항목없음. [6] |
조선후기 1788년(정조 12)에 정조(正祖)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의 내용을 모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오례(五禮)를 상세하게 기록한 『춘관통고(春官通考)』를 편찬하였다.</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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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전』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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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전 권3, 길례(吉禮), 제기도설(祭器圖說)> 난(鸞)은 칼 끝에 궁(宮), 상(商), 각(角), 징(徵), 우(羽)가 있다.『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에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난도(鸞刀)는 옛날의 칼인데, 종묘(宗廟)에 사용하니, 종묘에서 지금의 칼을 사용하지 않고서 옛날의 칼을 사용함은 옛날의 일을 닦아 계승한 까닭이다.”하고, 『시경(詩經)』의 『신남산편(信南山篇)』에, “그 난도를 잡아 그 순색(純色)의 희생(犧牲)을 고(告)한다.”고 하였으며, 『예기(禮記)』의 『절해장(節解章)』에는 “반드시 난도가 있는 것은, 그 난령(鸞鈴) 의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이 조화(調和)된 후에 희생(犧牲)을 베게 됨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으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선공(宣公) 12년에 정백(鄭伯)이 오른손으로 난도를 잡았다.”고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난도는 종묘(宗廟)에서 희생(犧牲)을 베고 끊는 칼인데, 고리[鐶]에 방울[和]이 있고, 칼 끝에 방울[鸞]이 있다. 칼 끝에 있는 것은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맞고, 세 방울[三和]이 고리에 있는 것은 소리가 각성(角聲)·치성(徵聲)·우성(羽聲)에 맞는다.”고 하였다. 鸞在鋒宮商角徵羽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刀也用於宗廟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信南山曰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必用鸞刀者取其鸞鈴之聲宮商調和而後斷割也春秋公羊傳宣十二年鄭伯右執鸞刀注云鸞刀宗廟割切之刀鐶有 和鋒有鸞匸在鋒聲中官商三和在鐶聲中角徵羽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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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궤』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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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궤 권1, 종묘제기도설(宗廟祭器圖說)> 『성송반악도(聖宋頒樂圖)』에 따르면 “『예기』에서는 난도(鸞刀)를 옛날 칼이라고 하였으니, 종묘에서 사용한다. 종묘에서 지금의 칼을 사용하지 않고 옛날 칼을 사용하는 것은 옛것을 닦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시경』의 「신남산(信南山)」에 의하면, “난도(鸞刀)를 들어 희생의 털을 헤쳐 보이네.”라고 하였다.『예기절해(禮記節解)』에 따르면 “반드시 난도(鸞刀)를 사용하는 것은 난령(鸞鈴)의 소리를 취하여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이 조화(調和)를 이룬 뒤에 희생(犧牲)을 자르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따르면 “선공(宣公) 12년조 정백(鄭伯)이 오른손에 난도(鸞刀)를 들었다. 그 주에 “난도는 종묘에서 희생을 자를 때 사용하는 칼이다. 고리[鐶]에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 난(鸞)이라는 방울이 있다. 칼 끝에 있는 난은 소리가 궁성과 상성에 알맞고, 고리에 있는 세 개의 화는 소리가 각성(角聲), 치성(徴聲), 우성(羽聲)에 알맞다.” 하였다. 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刀也用於宗廟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信南山曰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必用鑾刀者取其鑾鈴之聲宮商調和而後斷割也春秋公羊傳宣十二年鄭伯右執鑾刀注云鑾刀宗廟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鑾在鋒聲中宮商三和在鐶聲中角徵羽 [8] |
규장각한국학연구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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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의궤』[9]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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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의궤 권1, 제기도설(祭器圖說)>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할도(割刀)를 쓰되 귀한 난도(鑾刀)를 쓰는 것은 그 뜻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양전(公羊傳)』의 주(註)의 “난도는 베고 자르는 칼이다. 고리[鐶]에는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는 난(鑾)이라는 방울이 있다. 송(宋)나라 호원(胡瑗) 난령(鑾鈴)은 칼 끝에 있어서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합하니, 방울 2개를 쓰고, 화령(和鈴)은 고리에 있어서 소리가 치성(徵聲), 각성(角聲), 우성(羽聲)에 합하니, 방울 3개를 쓴다. 郊特牲云割刀之用鑾刀之貴貴其義也公羊傳註云鑾刀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宋胡瑗言鑾鈴在鋒聲合宮商用鈴二和鈴在鐶聲合微角羽用鈴三 [10] |
1783년(정조 7) 1월 8일에 사직서(社稷署)의 제례의식[祭儀]제식(祭式)·단(壇)·유(壝)·관사(館舍) 등을 참고하고자 작성된 5권 3책의 의궤가 편찬되어, 1804년(순조 4) 1차 증보되고, 1842년(현종 8) 2차 증보됨./ 조선후기 정조나 순조 때 사직에서 왕실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이다. 난도(鑾刀)는 희생을 베는데 사용하는 칼이다.</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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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도감의궤』[11]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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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도감의궤 권1, 도감(都監)> 주조하며 2개이다. 칼의 길이는 1尺 3寸 8分, 너비는 2寸 6分이다. 자루의 머리까지 합한 자루의 길이는 6寸 6分이다. 백금(白金)으로 장식하고 5개의 방울[鈴]이 있으며, 날[刃] 위에다 은(銀)으로 전자(篆字)를 새긴다. 영녕전(永寧殿) 1개, 종묘(宗廟) 1개이다. 鐵二刃長一尺三寸八分廣二寸六分柄長通柄頭鐵六寸六分餙以白金有五鈴刃上以銀篆刻永寧殿一宗廟一 [12] |
『제기도감의궤』는 1611년(광해군 3) 8월 24일 건원릉(健元陵)과 현릉(顯陵)에 친제(親祭)를 거행하기 위해 제기가 부족하자, 그해 9월 9일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이듬해까지 제기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제기를 만든 전말을 기록하고 있음./ 난도(鸞刀)는 영녕전(永寧殿)에 1개, 종묘(宗廟)에 1개를 만들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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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의궤』 |
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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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의궤 권1, 제기도설(祭器圖說)>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할도(割刀)를 쓰되 귀한 난도(鑾刀)를 쓰는 것은 그 뜻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양전(公羊傳)』의 주(註)의 “난도는 베고 자르는 칼이다. 고리[鐶]에는 화(和)라는 방울이 있고 칼끝[鋒]에는 난(鑾)이라는 방울이 있다. 송(宋)나라 호원(胡瑗) 난령(鑾鈴)은 칼 끝에 있어서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에 합하니, 방울 2개를 쓰고, 화령(和鈴)은 고리에 있어서 소리가 치성(徵聲), 각성(角聲), 우성(羽聲)에 합하니, 방울 3개를 쓴다. 이는 대개 방울 소리를 취하여 소리가 조화(調和)를 이룬 뒤에 희생(犧牲)을 베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郊特牲云割刀之用鑾刀之貴貴其義也公羊傳註云鑾刀割切之刀鐶有和鋒有鑾宋胡瑗言鑾鈴在鋒聲合宮商用鈴二和鈴在鐶聲合徵角羽用鈴三蓋取聲和而后斷也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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