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박람회-포스터

hanyang
이수민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27일 (일) 14:05 판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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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박람회-포스터 Concept 개념 조선박람회 조선박람회-포스터 http://dh.aks.ac.kr/hanyang/wiki/index.php/조선박람회-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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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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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경성협찬회와 다른 지역 단체 회원들은 다가올 기념행사에 대중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근대 미디어를 활용했다. 자동차, 의복, 제등 행렬, 노래 및 포스터 공모전 등이 광고 캠페인에 이용되었고, 홍보 자료도 대대적으로 출간하여 배포했다.

  • 경성휘보 20, 1923년 6월호, 1쪽.
  • 경성일보 1929년 1월 31일자, 경성일보 1929년 1월 31일자
  • 경성일보 1929년 3월 12일자. 1929년 1월 31일자
  • 조선박람회 포스터 공모

조선박람회 주최측은 박람회 개최전 박람회를 대표하는 포스터를 공모하였는데 총 250장의 응모작 가운데 전매국 인쇄공장의 한 직공 城勉一郞가 만든 포스터가 선정되었다. [1] 200엔의 상금이 걸린 포스터 공모전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식민지와 제국 본국 양쪽에서 모두 조선의 상황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 조선의 산업 발전과 문화 진보를 진흥"할 수 있어야 했다.[2] 결국 경성협찬회 측은 첫 수상자로 경성에 거주하는 한 조선인의 디자인을 선정했다. 박람회를 위해 열성적으로 '투자'하여 모범을 보인 조선인에게 응당한 보상을 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상징적 결정이었다.[3]1등 수상작은 경복궁에서 이제 몇 남지 않은 건물 중 하나인 경회루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이 장소가 박람회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회루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총독부 신청사는 방문자들에게 식민지 조선에서 정치권력의 궁극적 원천이 어ㅣ에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 경성협찬회의 미디어 기법은 식민지 대중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자기규율적인 행위 주체가 되도록 독려하는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기업과 식민 모국의 지방정부 등도 경성협찬회의 공략대상이 되었다. 스펙터클한 전시를 통해 그들의 구미를 당겨 박람회와 식민지 경제에 투자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경성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백화점이었던 미쓰코시의 경우, 다가오는 박람회를 소비자에게 알리기 위해 포장지에 박람회 로고를 인쇄해 넣었다. [4]미쓰코시를 비롯하여 많은 사기업들이 경성협찬회와 협력하여 광고 캠페인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식민 통치라는 목표와 상업적 이윤 추구라는 목표의 결합을 추구했던 총독부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일본 기업 및 단체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려는 노력은 일본 본토로 확장되어, 본토 상업회의소나 지방정부들을 대상으로 각자의 전시관을 세우고 후원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경성의 많은 관료들은 도쿄나 오사카, 교토로 출장을 가기도 했는데, 이들 도시에서 열린 박람회는 조선전시관을 건립해서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들 도시 이외에도 나고야와 후쿠오카의 지방정부 관료들과 사업경영자들은 각각 40만~50ㅁㄴ 엔의 비용을 부담하면서 특별전시관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경성일보 1929년 2월2일자; 조선박람회는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중요성이 더해갔는데, 각지역의 유지들이 자체적인 협찬회를 조직해서 식민지의 기념행사를 돈벌이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들 조직들은 경성협찬회와 공조하면서 조선박람회의 개최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판매촉진용 기차표를 발행하고, 눈에 잘 띄는 곳마다 이벤트 포스터를 내걸었던 것이다.
  1. <이정욱, "조선총독부 지역지배의 구조: 조선박람회(1929)와 전라북도." 인문사회 21 7.4 (2016): 1059-1076, 1062쪽
  2. 경성일보 1928년 8월 9일자;토드a.헨리, 215쪽 재인용
  3. 경성일보 1929년 3월 12일자;1등 포스터는 500여 개가 넘는 카페, 기차역, 이발소, 그리고 공중목욕탕 등에 수천 장 배포되었다. 본토의 각 현과 상업회의소, 그리고 박물관 등에도 이 포스터를 게시했다.;경성일보 1929년 1월 31자
  4. 경성일보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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