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1759년(숙종 46~영조 35)에 社稷署에서 社稷壇의 관리와 보수 및 社稷祭의 실행 등과 관련된 일을 시기별로 기록한 謄錄이다.
<서지사항>
표지 서명이 ‘社稷署謄錄’이다. 표지 장황은 改裝한 것이다. 標題의 우측 상단에 ‘自庚子(1720) 至己卯(1759)’라 적혀 있다. 또 하단에는 서근제 역할을 하는 띠지가 붙어 있다. 본문의 판식은 판심이 없는 四周單邊에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의 印札空冊紙에 11行 30~35字로 쓴 필사본이다. 본문의 종이는 일반적인 楮紙를 사용하였다. 인장은 본문의 안쪽 이음새면에 1과와 면마다 1과나 2과씩 ‘社稷署印’을 날인하였다. 책 수는 권차의 권6만 있는 것으로, 1책 43장이다.
<체제 및 내용>
본서의 개장 표지에는 ‘社稷署謄錄 六’, 원래 표지에는 ‘社稷署謄錄 中’이라는 표제와 ‘自庚子 至己卯’라는 목록이 적혀 있다. 본문의 맨 앞과 뒤에 낙장이 있는 듯하며, 남아 있는 실제 부분도 첫 장과 마지막 장은 훼손이 심하다. 또한 1745년(을축, 영조 21) 기사 다음에 1753년(계유) 5월 25일 기우제에 親臨할 때의 ‘帳前圖’ 下 1面이 있고, 그다음엔 1747년(정묘) 기사가 이어지는데, 을축년 이전 기사는 半葉 11행 23~27자이고, 정묘년 이후 기사는 반엽 14행 32~34자로 되어 있다.
본서의 欄外 위쪽에 연도를 나타내는 干支가 적혀 있고, 간간이 해당 기사의 요약어가 있다. 예를 들면 ‘祈晴’, ‘祈雪’, ‘國恤膰肉前例’(1730년 7월 15일), ‘亞獻官 奠爵時陞自正路 奠爵後降自西陛[아헌관이 술잔을 올릴 때는 正路로 올라오고, 술잔을 올린 뒤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감]’(1733년 1월 9일), ‘因禮曹草記 安香廳入接[예조의 초기로 인하여 안향청에 거처함]’(1734년 1월), ‘雷震之怪’(1743년 10월 11일), ‘墻垣 慰安 定界[무너진 담장에 대해 위안제를 지내고 경계를 정함]’(1745년 5월), ‘書員差出’(1747년 8월 2일), ‘直爲向方儀節[곧장 그 방향을 향해 예의를 표함]’(1753년 5월 15일)으로서 그 기사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일반적인 다른 사직서 등록에 비해 특이한 기사는 1744년(영조 20) 9월 8일에 영조가 耆社에 들어가므로 告祭를 행하였다는 내용인데, 기사 분량이 매우 짧고[行聖上入耆社敎是告祭 獻官副司直尹彙貞] 직전 해 마지막 기사인 10월 11일 내용 다음에 바로 이어 적지 않고 행을 비운 채 끝줄에 다른 필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다음 張의 내용이 1744년 8월 8일자 기사인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이 등록 자체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草稿本임을 알 수 있다.
본서는 사직서의 등록 관련 일괄 문서 중의 하나로서 그 내력 및 사직서 등록의 일반 내용에 대해서는 『謄錄』(K2-2149) 참조.
<특성 및 가치>
조선 후기 사직단의 실제 祭享 사례 및 관리·운영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1]
. 藏書閣에는 사직서의 등록과 관련된 도서로서, 표제가 ‘社稷署謄錄’인 도서 6종, ‘謄錄’ 2종 및 ‘社稷署報草錄’ 1종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사직서에서 社稷壇의 관리와 운영 및 각종 祭享에 대해 편년체 형식으로 기록한 일괄 도서이다. 李迎春의 「『社稷署謄錄』 解題」(2009)에 따르면 ‘사직서등록’은 기록 시기로 보아 총 10책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이 8책뿐이라 하고, 李煜의 『藏書閣所藏謄錄解題』(2002)에서는 그 다섯 번째 결본을 ‘社稷署報草錄’으로 보고 있다. 일람표를 재정리하면 아래와 같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