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회(洪鳳漢, 1713-1778)는 조선후기 병조판서, 예조판서,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근(汝根). 사간 신명규(申命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단(申鍴)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사철(申思喆)이며, 어머니는 이규일(李揆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수찬(修撰)으로 등용되고 1746년 교리가 되었다. 1750년 승지가 되었으나, 그 해 사마시의 합격자 발표에 관한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신회의 주장이 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유배가 풀려 돌아와서 근신하던 중 1755년 병조판서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복귀했다. 1772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청하며 왕위계승을 고하는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동조하였다 하여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 뒤 1784년(정조 8) 관작이 회복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