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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교자는 종1품 이상의 관원과 기로소 당상관만이 탈 수 있는 가마였다. 지붕과 벽이 없이 사방이 트이고 앉는 자리만을 갖춘 가마이다. 가마 전체에 주칠이나 흑칠을 하고, 앉는 자리 네 측면에 각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네 명의 가마꾼이 앞 뒤에 두명씩 짝을 지어 가마채에 끈을 연결해 어깨에 메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흑색의 '대원군교자'가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평교자는 종1품 이상의 관원과 기로소 당상관만이 탈 수 있는 가마였다. 지붕과 벽이 없이 사방이 트이고 앉는 자리만을 갖춘 가마이다. 가마 전체에 주칠이나 흑칠을 하고, 앉는 자리 네 측면에 각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네 명의 가마꾼이 앞 뒤에 두명씩 짝을 지어 가마채에 끈을 연결해 어깨에 메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흑색의 '대원군교자'가 그려져 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가마(증보편)』, 국립고궁박물관, 2006,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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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가마(증보판)』, 국립고궁박물관, 2006, 21쪽.
  
 
[[분류:김현승-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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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7일 (월) 23:56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평교자는 종1품 이상의 관원과 기로소 당상관만이 탈 수 있는 가마였다. 지붕과 벽이 없이 사방이 트이고 앉는 자리만을 갖춘 가마이다. 가마 전체에 주칠이나 흑칠을 하고, 앉는 자리 네 측면에 각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네 명의 가마꾼이 앞 뒤에 두명씩 짝을 지어 가마채에 끈을 연결해 어깨에 메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흑색의 '대원군교자'가 그려져 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가마(증보판)』, 국립고궁박물관, 2006,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