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사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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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조(王朝)마다 사직단에 신주(神主)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어서 이를 사수(社樹)라 하였다. 「논어(論語)」팔일편(八佾篇)에 보면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심었고 은(殷)나라는 잣나무(柏)을 심었으며 주(周)나라에서는 밤나무(栗)를 심었다(哀公問社∼夏禹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편에 담장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周垣樹之以松)는 것으로 보아 사직단의 사수는 소나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 ||
즉 숙종12년(1686) 윤4월 예조판서 여성제(呂聖齊 1624-1691, 호 雲浦, 시호 靖惠, 묘소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가 말하기를 근래 사직단에 송충이가 만연하여 인력으로 잡기가 어려우니 한성부 백성을 동원하여 잡도록 하였고, 영조19년(1743) 10월 9일(戊午)에 우박이 내리고 벼락이 떨어져 큰 소나무 가지 하나가 찢어져서 13일날 잘라 내게 하였으며(「사직서의궤」본서잡사) 「숙종실록」숙종28년(1702) 2월 6일(戊午) 사직춘향대제 때 숙종이 친제하여 현재 재실로 쓰이던 안향청(安香廳)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절귀(絶句) 한 수를 지었고(詠社稷 安香廳 庭松), 영조2년(1726) 1월 8일(辛丑)에는 영조가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고 또 사직단 안향청 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정송송(社稷 安香廳 庭松頌)제하의 시 한 수를 지어 게재하였다(「사직서의궤」고사하, 영조실록). | 즉 숙종12년(1686) 윤4월 예조판서 여성제(呂聖齊 1624-1691, 호 雲浦, 시호 靖惠, 묘소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가 말하기를 근래 사직단에 송충이가 만연하여 인력으로 잡기가 어려우니 한성부 백성을 동원하여 잡도록 하였고, 영조19년(1743) 10월 9일(戊午)에 우박이 내리고 벼락이 떨어져 큰 소나무 가지 하나가 찢어져서 13일날 잘라 내게 하였으며(「사직서의궤」본서잡사) 「숙종실록」숙종28년(1702) 2월 6일(戊午) 사직춘향대제 때 숙종이 친제하여 현재 재실로 쓰이던 안향청(安香廳)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절귀(絶句) 한 수를 지었고(詠社稷 安香廳 庭松), 영조2년(1726) 1월 8일(辛丑)에는 영조가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고 또 사직단 안향청 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정송송(社稷 安香廳 庭松頌)제하의 시 한 수를 지어 게재하였다(「사직서의궤」고사하, 영조실록). | ||
위와같은 전거(典據)에 의거 사직단 내의 참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대신 사수(社樹)인 소나무로 조성하고 사다리를 횡으로 매달아 놓은 것 처럼 설치한 신문을 3태극 좌우에 창(극戟)을 4개씩 8개를 벌려 설치하여야 하며 세종14년(1432) 9월 1일(丙辰)에 의거 두 단 사이에 2계단으로 설치된 섬돌을 3계단으로 설치하여야 한다. | 위와같은 전거(典據)에 의거 사직단 내의 참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대신 사수(社樹)인 소나무로 조성하고 사다리를 횡으로 매달아 놓은 것 처럼 설치한 신문을 3태극 좌우에 창(극戟)을 4개씩 8개를 벌려 설치하여야 하며 세종14년(1432) 9월 1일(丙辰)에 의거 두 단 사이에 2계단으로 설치된 섬돌을 3계단으로 설치하여야 한다. | ||
후토지신(后土之神 또는 后土氏之神)과 후직지신(后稷之神 또는 后稷氏之神)을 음각한 석주(石主)를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檀) 신좌(神座)위에서 각각 왼쪽에 북쪽 가까이에서 동쪽을 향하여 세워야 하고 국사단(國社壇)에만 음각하지 않고 세운 석주(石主) 전면에는 국사지신(國社之神)을 써서 세워야 하고 국직단(國稷檀)에도 국직지신(國稷之神)이라고 음각한 석주(石主)를 세워야 한다. | 후토지신(后土之神 또는 后土氏之神)과 후직지신(后稷之神 또는 后稷氏之神)을 음각한 석주(石主)를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檀) 신좌(神座)위에서 각각 왼쪽에 북쪽 가까이에서 동쪽을 향하여 세워야 하고 국사단(國社壇)에만 음각하지 않고 세운 석주(石主) 전면에는 국사지신(國社之神)을 써서 세워야 하고 국직단(國稷檀)에도 국직지신(國稷之神)이라고 음각한 석주(石主)를 세워야 한다. |
2020년 7월 22일 (수) 11:43 판
왕조(王朝)마다 사직단에 신주(神主)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어서 이를 사수(社樹)라 하였다. 「논어(論語)」팔일편(八佾篇)에 보면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심었고 은(殷)나라는 잣나무(柏)을 심었으며 주(周)나라에서는 밤나무(栗)를 심었다(哀公問社∼夏禹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편에 담장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周垣樹之以松)는 것으로 보아 사직단의 사수는 소나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숙종12년(1686) 윤4월 예조판서 여성제(呂聖齊 1624-1691, 호 雲浦, 시호 靖惠, 묘소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가 말하기를 근래 사직단에 송충이가 만연하여 인력으로 잡기가 어려우니 한성부 백성을 동원하여 잡도록 하였고, 영조19년(1743) 10월 9일(戊午)에 우박이 내리고 벼락이 떨어져 큰 소나무 가지 하나가 찢어져서 13일날 잘라 내게 하였으며(「사직서의궤」본서잡사) 「숙종실록」숙종28년(1702) 2월 6일(戊午) 사직춘향대제 때 숙종이 친제하여 현재 재실로 쓰이던 안향청(安香廳)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절귀(絶句) 한 수를 지었고(詠社稷 安香廳 庭松), 영조2년(1726) 1월 8일(辛丑)에는 영조가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고 또 사직단 안향청 앞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정송송(社稷 安香廳 庭松頌)제하의 시 한 수를 지어 게재하였다(「사직서의궤」고사하, 영조실록). 위와같은 전거(典據)에 의거 사직단 내의 참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대신 사수(社樹)인 소나무로 조성하고 사다리를 횡으로 매달아 놓은 것 처럼 설치한 신문을 3태극 좌우에 창(극戟)을 4개씩 8개를 벌려 설치하여야 하며 세종14년(1432) 9월 1일(丙辰)에 의거 두 단 사이에 2계단으로 설치된 섬돌을 3계단으로 설치하여야 한다. 후토지신(后土之神 또는 后土氏之神)과 후직지신(后稷之神 또는 后稷氏之神)을 음각한 석주(石主)를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檀) 신좌(神座)위에서 각각 왼쪽에 북쪽 가까이에서 동쪽을 향하여 세워야 하고 국사단(國社壇)에만 음각하지 않고 세운 석주(石主) 전면에는 국사지신(國社之神)을 써서 세워야 하고 국직단(國稷檀)에도 국직지신(國稷之神)이라고 음각한 석주(石主)를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