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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영조묘호도감의궤|영조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는 1890년(고종 27)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고쳐 올리면서 영조와 그의 비에게 존호를 올린 사실을 기록하였다. 봉조하 김상현이 발란반정(撥亂反正) 등의 공이 있는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추숭할 것을 상소하자, 이를 허락하고 동시에 그의 왕비에게 존호를 가상하도록 하였다. 영종의 묘호와 시호·존호는 각각 영조, 정문선무희경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 중화융도숙장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 정성왕후 존호는 원열(元烈), 정순왕후 존호는 정현(正顯)이었다. 고종은 근정전에서 존호 단자를 받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옥책과 금보의 제작이 완료되자, 정월 4일에 종묘에서 책보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7일에는 원릉(元陵)에 행행하여 봉심하고 새로 만든 ‘조선국영조대왕릉’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이 의궤는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색 반차도를 수록하고 있다. <ref>.</ref> |
2020년 10월 5일 (월) 14:04 판
Definition
영조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는 1890년(고종 27)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고쳐 올리면서 영조와 그의 비에게 존호를 올린 사실을 기록하였다. 봉조하 김상현이 발란반정(撥亂反正) 등의 공이 있는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추숭할 것을 상소하자, 이를 허락하고 동시에 그의 왕비에게 존호를 가상하도록 하였다. 영종의 묘호와 시호·존호는 각각 영조, 정문선무희경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 중화융도숙장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 정성왕후 존호는 원열(元烈), 정순왕후 존호는 정현(正顯)이었다. 고종은 근정전에서 존호 단자를 받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옥책과 금보의 제작이 완료되자, 정월 4일에 종묘에서 책보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7일에는 원릉(元陵)에 행행하여 봉심하고 새로 만든 ‘조선국영조대왕릉’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이 의궤는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색 반차도를 수록하고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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