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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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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의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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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
  
 
===현대의 한국 불교===
 
===현대의 한국 불교===

2017년 11월 8일 (수) 09:13 판

한국의 불교

불교의 전래

불교는 유교와 함께 한국 역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두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나라(漢, B.C.206~A.D.220) 후기부터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에는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의 승려에 의해 전래되었다.

처음에 민간에 전파되었던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후원을 받으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출신 부족이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믿는 종교가 되었고, 국력의 통일에 기여하였다.

한국 불교의 전성기: 통일신라, 고려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크게 번영하였다. 왕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교학을 배웠고, 그것을 한국에 전파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한반도의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방대한 규모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은 이 시기의 한국 불교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들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

1,000년 동안 번성해 오던 불교는 조선(1392~1910)의 개국과 더불어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우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승려들은 신분적으로 차별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과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불교는 명맥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조선 정부의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에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큰 전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찰 건물의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억제가 누그러진 상황에 기인한다.

  • 승려-임진왜란 민족기록화 추가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

현대의 한국 불교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국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사찰이 자리한다. 965개소에 곳에 달하는 한국의 전통사찰은 국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고, 신도들이 찾아와 예불을 드리는 종교 시설이다. 한국의 여러 유명 사찰들은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가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은 국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즈음에는 사찰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등이 걸리고,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과 한 몸을 이루었던 유교가 그 권력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달리, 민간의 신앙을 받던 불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