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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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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리 안의 명당에 자리한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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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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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가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각기 그 모습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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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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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하면서 예술적인 조형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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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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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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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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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를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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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검은 박석이 아름답게 놓인 길을 걸어 이르는 [[정자각]]은 절제된 건축 형태로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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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의 특징 중 눈에 띠는 것은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를 모은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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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제례로 계승되는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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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실록(實錄)]]과 [[의궤|의궤(儀軌)]], [[능지|능지(陵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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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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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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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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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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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20.건원릉(동구릉)-0138.jpg|동구릉 건원릉(경기 구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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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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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span="3"|01 파주 삼릉||공릉(恭陵)||예종원비 장순왕후||08||1461년, 1471년(봉릉)||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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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顯陵)||문종과 현덕왕후||05||왕:1452년, 비:1513년(이장)||동원이강릉
 
|현릉(顯陵)||문종과 현덕왕후||05||왕:1452년, 비:1513년(이장)||동원이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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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康陵)||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14||왕:1630년(이장), 원비:1600년, 계비:1632년||동원이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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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穆陵)||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14||왕:1630년(이장), 원비:1600년, 계비:1632년||동원이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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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릉(徽陵)||인조계비 장렬왕후||16||1688년||단릉
 
|휘릉(徽陵)||인조계비 장렬왕후||16||1688년||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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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厚陵)||정종과 정안왕후||02||왕:1420년, 비:1412년||쌍릉
 
|후릉(厚陵)||정종과 정안왕후||02||왕:1420년, 비:1412년||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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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산군묘||연산군과 거창군부인||10||왕:1512년(이장), 비:1537년||쌍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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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리 안의 명당에 자리한 왕릉===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신성하면서 예술적인 조형 공간===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를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검은 박석이 아름답게 놓인 길을 걸어 이르는 [[정자각]]은 절제된 건축 형태로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특징 중 눈에 띠는 것은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를 모은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기록과 제례로 계승되는 문화유산===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실록(實錄)]]과 [[의궤|의궤(儀軌)]], [[능지|능지(陵誌)]]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
 
파일:3-20.건원릉(동구릉)-0138.jpg|동구릉 건원릉(경기 구리시)
 
파일:3-20.경릉-동구릉.jpg|동구릉 경릉(경기 구리시)
 
파일:3-20.광릉-석상.jpg|광릉 석상(경기 남양주시)
 
파일:3-20.목릉(동구릉)-_0113.jpg|동구릉 목릉(경기 구리시)
 
파일:3-20.선릉(선정릉(성종)-0049.jpg|선정릉 선릉(서울 강남구)
 
파일:3-20.수릉(동구릉)-DSC_0323.jpg|동구릉 수릉(경기 구리시)
 
파일:3-20.융릉-석상.jpg|융건릉 융릉(경기 화성시)
 
파일:3-20.의릉_0117.JPG|의릉(서울 성북구)
 
파일:3-20.창릉-서오릉.jpg|서오릉 창릉(경기 고양시)
 
파일:3-20.파주장릉-_GSC8668.jpg|파주 장릉(경기 파주시)
 
파일:3-20.파주장릉-1788.jpg|파주 장릉 제향(경기 파주시)
 
파일:3-20.헌릉1.jpg|헌인릉 헌릉(서울 서초구)
 
파일:3-20.현릉-동구릉.jpg|동구릉 현릉(경기 구리시)
 
파일:3-20.혜릉-석상.jpg|동구릉 혜릉 석상(경기 구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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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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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전도감의궤|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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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홍살문]]
 
*[[홍살문]]
 
*[[정자각]]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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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왕릉 조성과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왕릉 조성과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참고문헌
 
{{참고문헌
 
|참고문헌1=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 세창출판사, 2017.
 
|참고문헌1=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 세창출판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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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풍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삼은 책이다. 조선의 왕족, 조선왕릉의 조성양식, 조선시대 주요사건을 먼저 살펴본 뒤 본격적인 왕릉 풍수를 풀어냈다.  
 
'''『왕릉 풍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삼은 책이다. 조선의 왕족, 조선왕릉의 조성양식, 조선시대 주요사건을 먼저 살펴본 뒤 본격적인 왕릉 풍수를 풀어냈다.  
  
조선시대에는 산도를 산도·태실산도·산형도·형세도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산도는 왕과 왕비의 능을 대상으로 하는 왕릉산도와 왕의 태를 대상으로 하는 태실산도 그리고 왕실구성원 본 책에서 왕실구성원이란 전주이씨 시조인 사공공 이한(李翰)과 추존 4왕인 목조·익조·도조·환조, 그리고 태조 이성계에서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까지의 왕과 왕비를 의미하며, 이들의 직계자손까지를 포함한다. '''『조선 왕릉 산도』'''에서는 왕실산도를 왕실구성원의 능원묘(陵園墓)에 대한 산도와 태실산도 그리고 『선원보감』에 수록된 산도를 포함하여 지칭하였다. 이 책에서는 『선원보감』 산도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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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산도를 산도·태실산도·산형도·형세도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산도는 왕과 왕비의 능을 대상으로 하는 왕릉산도와 왕의 태를 대상으로 하는 태실산도 그리고 왕실구성원의 능원묘(陵園墓)에 대한 왕실산도로 구분하여 제작되었다. '''『조선 왕릉 산도』'''에서는 『선원보감』 산도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을 하였다.
  
'''『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독특 한 한국인의 장묘 문화가 유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진 것으로 연중 치러지는 제례 의식 또한 역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조선왕릉 전부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잘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석물 등의 공간 배치는 빼어난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독특한 분묘의 형태는 사후 도굴을 의식해서인지 깊이 묻혀 진 시신 위로 매우 두꺼운 화강암이 가로막아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매우 견고하다. 이것이 온전한 왕릉을 보존케 한 비법이고 조상의 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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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유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진 독특한 한국의 장묘 문화이며 연중 치러지는 제례 의식 역시 역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조선왕릉 전부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잘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석물 등의 공간 배치 또한 빼어난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독특한 분묘의 형태는 사후 도굴을 의식해서인지 깊이 묻힌 시신 위로 매우 두꺼운 화강암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매우 견고하다. 이것이 온전한 왕릉을 보존케 한 비법이고 조상의 지혜인 것이다.
  
  
 
*'''왕릉의 제도 및 석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왕릉의 제도 및 석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참고문헌
 
{{참고문헌
 
|참고문헌1=은광준,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 민속원, 2010.
 
|참고문헌1=은광준,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 민속원, 2010.
 
|참고문헌2=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
 
|참고문헌2=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
 
}}
 
}}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에서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 그리고 북한에 있는 제릉, 후릉과 희릉지, 유릉지, 희릉 및 연산묘, 광해묘와 추존왕릉 5기 등 왕릉 석상의 복식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각 석상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한 세밀화와 저자의 30여 년 연구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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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에서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 그리고 북한에 있는 제릉, 후릉과 희릉지, 유릉지, 희릉 및 연산묘, 광해묘와 추존왕릉 5기까지 왕릉 석상의 복식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각 석상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한 세밀화와 저자의 30여 년 연구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조선 왕릉제도 연구』'''는 조선왕릉제도 전반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경주의 신라왕릉, 공주·부여의 백제왕릉,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물론 여러 곳에 산재한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하면서 각 시대마다 왕릉제도가 계승되고 변화·발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최근에 소개된 북한 소재 왕릉의 사진자료를 통해 고려왕릉제도를 정리하여 공민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 계승·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조선 왕릉제도 연구』'''는 조선왕릉제도 전반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경주의 신라왕릉, 공주·부여의 백제왕릉,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물론 여러 곳에 산재한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하면서 각 시대마다 왕릉제도가 계승되고 변화·발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최근에 소개된 북한 소재 왕릉의 사진자료를 통해 고려왕릉제도를 정리하여 공민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 계승·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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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왕릉과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참고문헌
 
{{참고문헌
|참고문헌1=이창환,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한숲,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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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1=이창환,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 한숲,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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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은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능역이 갖는 공간적 특성과 각종 건조물과 석물 등을 생생한 현장사진과 함께 순례형식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능원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통공간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와 등재 과정에서 얻은 내용을 정리해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27대에 걸친 조선의 왕과 왕비에 대한 탄생과 왕실생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 등에 대하여 고증을 통해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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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은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능역이 갖는 공간적 특성과 각종 건조물 및 석물 등을 생생한 현장사진과 함께 순례형식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능원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통공간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와 등재 과정에서 얻은 내용을 정리해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27대에 걸친 조선의 왕과 왕비에 대한 탄생과 왕실생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 등에 대하여 고증을 통해 서술하였다.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2018년 2월 10일 (토) 21:2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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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

백 리 안의 명당에 자리한 왕릉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가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각기 그 모습이 달라졌다.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신성하면서 예술적인 조형 공간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를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검은 박석이 아름답게 놓인 길을 걸어 이르는 정자각은 절제된 건축 형태로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특징 중 눈에 띠는 것은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를 모은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기록과 제례로 계승되는 문화유산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있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조선 왕릉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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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능명 능주 세대 조성연대 형태
01 파주 삼릉 공릉(恭陵) 예종원비 장순왕후 08 1461년, 1471년(봉릉) 단릉
순릉(順陵) 성종원비 공혜왕후 09 1474년 단릉
영릉(永陵)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추존 왕:1728년, 비:1751년, 1776년(봉릉) 쌍릉
02 파주 장릉 장릉(長陵) 인조와 원비 인렬왕후 16 1731년(이장) 합장릉
03 김포 장릉 장릉(章陵) 원종과 인헌왕후 추존 왕:1627(이장), 비:1626, 1632년(봉릉) 쌍릉
04 고양 서오릉 창릉(昌陵)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08 왕:1470년, 비:1499년 동원이강릉
경릉(敬陵) 덕종과 소혜왕후 추존 왕:1457년, 비:1504년 동원이강릉
명릉(明陵)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19 왕:1720년, 1계비:1701년, 2계비:1757년 동원이강릉
익릉(翼陵) 숙종원비 인경왕후 19 1680년 단릉
홍릉(弘陵) 영조원비 정성왕후 21 1757년 단릉
05 양주 온릉 온릉(溫陵) 중종원비 단경왕후 11 1557년, 1739년(봉릉) 단릉
06 고양 서삼릉 희릉(禧陵) 중종1계비 장경왕후 11 1537년(이장) 단릉
효릉(孝陵) 인종과 인성왕후 12 왕:1545년, 비:1578년 쌍릉
예릉(睿陵)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25 왕:1864년, 비:1878년 쌍릉
07 서울 정릉 정릉(貞陵)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 01 1409년(이장) 단릉
08 서울 태릉과 강릉 태릉(泰陵) 중종2계비 문정왕후 11 1565년 단릉
강릉(康陵) 명종과 인순왕후 13 왕:1567년, 비:1575년 쌍릉
09 서울 의릉 의릉(懿陵)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20 왕:1724년,비:1730년 동원상하릉
10 구리 동구릉 건원릉(健元陵) 태조고황제 01 1408년 단릉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05 왕:1452년, 비:1513년(이장) 동원이강릉
목릉(穆陵)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14 왕:1630년(이장), 원비:1600년, 계비:1632년 동원이강릉
휘릉(徽陵) 인조계비 장렬왕후 16 1688년 단릉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18 왕:1674년, 비:1684년 쌍릉
혜릉(惠陵) 경종원비 단의왕후 20 1718년, 1720년(봉릉) 단릉
원릉(元陵)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21 왕:1776년, 비:1805년 쌍릉
수릉(綏陵)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추존 왕:1855년(이장), 비:1890년 합장릉
경릉(景陵) 헌종성황제, 원비 효현성황후, 계비 효정성황후 24 왕:1849년, 원비:1843년, 계비:1904년 삼연릉
11 서울 건릉과 정릉 선릉(宣陵)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09 왕:1495년, 비:1530년 동원이강릉
정릉(靖陵) 중종 11 1562년(이장) 단릉
12 서울 헌릉과 인릉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03 왕:1422년, 비:1420년 쌍릉
인릉(仁陵)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23 왕:1856년(이장), 비:1857년 합장릉
13 남양주 광릉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07 왕:1468년, 비:1483년 동원이강릉
14 남양주 사릉 사릉(思陵) 단종비 정순왕후 06 1531년, 1698년(봉릉) 단릉
15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洪陵)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26 제:1919년, 후:1919년(이장) 합장릉
유릉(裕陵) 순종효황제, 원후 순명효황후, 계후 순정효황후 27 제:1926년, 원후:1926년(이장), 계후:1966년 합장릉
16 화성 융릉과 건릉 융릉(隆陵)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추존 왕:1789년(이장), 비:1815년, 1899년(봉릉) 합장릉
건릉(健陵)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22 왕:1821년(이장), 비:1821년 합장릉
17 여주 영릉과 영릉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 04 1469년(이장) 합장릉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17 왕:1673년(이장), 비:1674년 동원상하릉
18 영월 장릉 장릉(莊陵) 단종 06 1698년(봉릉) 단릉
북한소재 제릉(齊陵) 태조 원비 신의고황후 01 1391년, 1392년(봉릉) 단릉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 02 왕:1420년, 비:1412년 쌍릉
기타 연산군묘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10 왕:1512년(이장), 비:1537년 쌍분
광해군묘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15 왕:1641년, 비:1623년 쌍릉

관련항목

참고문헌

  • 왕릉 조성과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 세창출판사, 2017.
최낙기, 『왕릉 풍수 이야기』, 한국학술정보, 2014.
황인혁, 『조선 왕릉 산도』, 시간의물레, 2017.
김광호, 『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혜성출판사, 2016.


『조선왕실의 왕릉 조성』은 왕릉 조성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을 정리해 왕릉에 얽힌 정치사, 문화사를 풍부하게 전달하는 책이다. 단순히 왕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왕릉에 얽힌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왕릉 풍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삼은 책이다. 조선의 왕족, 조선왕릉의 조성양식, 조선시대 주요사건을 먼저 살펴본 뒤 본격적인 왕릉 풍수를 풀어냈다.

조선시대에는 산도를 산도·태실산도·산형도·형세도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산도는 왕과 왕비의 능을 대상으로 하는 왕릉산도와 왕의 태를 대상으로 하는 태실산도 그리고 왕실구성원의 능원묘(陵園墓)에 대한 왕실산도로 구분하여 제작되었다. 『조선 왕릉 산도』에서는 『선원보감』 산도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을 하였다.

『잃어버린 왕조를 품다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유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진 독특한 한국의 장묘 문화이며 연중 치러지는 제례 의식 역시 역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조선왕릉 전부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잘 활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석물 등의 공간 배치 또한 빼어난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독특한 분묘의 형태는 사후 도굴을 의식해서인지 깊이 묻힌 시신 위로 매우 두꺼운 화강암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매우 견고하다. 이것이 온전한 왕릉을 보존케 한 비법이고 조상의 지혜인 것이다.


  • 왕릉의 제도 및 석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은광준,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 민속원, 2010.
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 신구문화사, 2013.


『조선왕릉 석물복식: 세계문화유산』에서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 그리고 북한에 있는 제릉, 후릉과 희릉지, 유릉지, 희릉 및 연산묘, 광해묘와 추존왕릉 5기까지 왕릉 석상의 복식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각 석상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한 세밀화와 저자의 30여 년 연구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조선 왕릉제도 연구』는 조선왕릉제도 전반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경주의 신라왕릉, 공주·부여의 백제왕릉,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물론 여러 곳에 산재한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하면서 각 시대마다 왕릉제도가 계승되고 변화·발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최근에 소개된 북한 소재 왕릉의 사진자료를 통해 고려왕릉제도를 정리하여 공민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 계승·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 왕릉과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창환,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 한숲,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은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능역이 갖는 공간적 특성과 각종 건조물 및 석물 등을 생생한 현장사진과 함께 순례형식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능원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통공간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와 등재 과정에서 얻은 내용을 정리해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성 및 문화유산적 가치, 27대에 걸친 조선의 왕과 왕비에 대한 탄생과 왕실생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 등에 대하여 고증을 통해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