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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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권리 되찾은 민주주의 운동

4.19혁명, 민주화운동의 초석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19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원리가 어떤 것인지 국민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새겨 넣은 민주 혁명이었다.

4.19는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이뤄진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다. 3월 15일 부정 선거가 이루어졌고 이날 마산에서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도중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였지만 경찰은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이를 계기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대통령 ‧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4월 19일 대학생은 물론 중 ‧ 고등학생까지를 포함한 시위대 2천여 명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고 그 자리에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그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학생 데모는 그치지 않았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 권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대학 교수들도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은 27일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신으로 훼손된 민주주의

1987년의 6월 항쟁은 4.19혁명의 맥을 잇는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의 배경에는 10월 유신으로 만들어진 헌법에 대한 저항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1972년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어떤 국가 기구에도 통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중임을 제한하는 조항도 없어졌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전체의 1/3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웬만하면 대통령의 추천에 동의하여 국회의원을 임명하였으므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직접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신 헌법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한국의 최고 주권 기관이었다. 한국 국민은 이 회의를 구성하는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를 했다. 대통령 선거가,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뀌었다.

한국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한국 국민은 여섯 번이나 스스로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래서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1979년 10월 중순, 야당과 국민들의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부산, 마산 등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는데 일반 시민들까지 가담하는 대규모 소요 사태로 커지게 되었다. 그곳 시위 현장을 둘러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심이 이미 유신 체제에서 떠났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 7년이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다.

6·10항쟁은 국민적 민주주의 운동

유신 체제가 끝났는데도 유신 헌법에서의 대통령 선거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7년 임기 내내 국민들은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기 만료는 10개월 앞둔 1987년 4월, 그는 헌법을 바꾸지 않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4․13 호헌 조치)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된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연합 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이 구성한 국민운동본부에 운동권 학생들도 참여했다.

그 해 5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에서 고문당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부와 경찰은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 야당과 재야 운동권은 정부와 경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6월에는 대학가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직장인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박종철 ‧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 유린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1987년 6월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한 국민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던 집권 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야당의 요구 사항을 대폭 수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6․29선언이라 한다. 이 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크게 개선한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에 투철한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관련항목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