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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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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3T22:10:57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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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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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7T23:26: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조선 정조===&lt;br /&gt;
{{Semantic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조선_정조 }}&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StoryX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조선_정조_이야기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80</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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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6T18:43: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조선 정조===&lt;br /&gt;
{{Semantic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조선_정조 }}&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StoryX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title=King_Jeongjo_of_Joseon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9</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9"/>
				<updated>2024-10-16T18:41: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조선 정조===&lt;br /&gt;
{{Semantic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조선_정조 }}&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StoryX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King_Jeongjo_of_Joseon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8</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8"/>
				<updated>2024-10-16T18:39: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조선 정조===&lt;br /&gt;
{{Semantic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조선_정조 }}&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StoryX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King_Jeongjo_of_Joseon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0%95%EC%A1%B0:_%EC%A1%B0%EC%84%A0%EC%9D%98_%EB%A5%B4%EB%84%A4%EC%83%81%EC%8A%A4%EB%A5%BC_%EC%9D%B4%EB%A3%AC_%EC%9E%84%EA%B8%88&amp;diff=14677</id>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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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16T18:39: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조선_정조===&lt;br /&gt;
{{Semantic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조선_정조 }}&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StoryXGraph | db=planA | project=jeongjo | key=King_Jeongjo_of_Joseon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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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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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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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사용방법==&lt;br /&gt;
* 특정 스토리라인의 모든 에피소트와 그 구성요소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 네트워크 그래프를 출력합니다. &lt;br /&gt;
* 데이터베이스(db)와 시맨틱 데이터 세트(project), 스토리라인 문서의 id를 지정하세요.&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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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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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디지털 큐레이션 지원 시스템]] [[분류:김현]]&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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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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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lt;br /&gt;
}}&lt;br /&gt;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lt;br /&gt;
===왕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룬 정조===&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그는 서자 출신도 능력이 있으면 가까이 중용하였으며, 암행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처지를 자주 살폈다. 그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 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모든 냇물에 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골고루 보살피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lt;br /&gt;
&lt;br /&gt;
===부모를 위한 신도시, 화성===&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lt;br /&gt;
* [[궁중의 문화와 예법의 기록, 의궤]]&lt;br /&gt;
*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임오화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bookSeq=1115&amp;amp;menuNo= 최봉영,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575776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23.]&lt;br /&gt;
}}&lt;br /&gt;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관련하여 세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뒤주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세자가 그렇게 죽은 이후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권력과 인간』'''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등의 각종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폭넓은 관점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등 1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도로 살피며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였다.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다루며 조선 최고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0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상)』, 지식산업사, 2017.]&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58361 한영우, 『정조평전: 성군의 길(하)』, 지식산업사, 2017.]&lt;br /&gt;
}}&lt;br /&gt;
'''『정조평전: 성군의 길』'''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기대와 갈등 관계를 상세히 다루며 지은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학계의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만을 근본 원인으로 보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관찬 문서와 사사로운 기록까지 종합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의 일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국가경영과 사상, 문화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90498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lt;br /&gt;
|참고문헌2=[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13&amp;amp;bookSeq=5269&amp;amp;menuNo=2010112140 노대환,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lt;br /&gt;
|참고문헌3=[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amp;amp;mainCategorySearch=A&amp;amp;categorySearch=A01&amp;amp;bookSeq=1127&amp;amp;menuNo=2010112100 김문식 외,『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225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lt;br /&gt;
|참고문헌5=[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86426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3.]&lt;br /&gt;
|참고문헌6=[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72204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판미동, 2017.]&lt;br /&gt;
|참고문헌7=[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403584 임미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해석사, 2000.]&lt;br /&gt;
}}&lt;br /&gt;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의 학문과 저술을 제왕학의 측면에서 풀어보고 있다. '학자 군주'를 조선 국왕의 특징으로 파악하며 '정치가 정조'보다 '학자 정조' 혹은 '사상가 정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lt;br /&gt;
&lt;br /&gt;
'''『영조 시대를 계승한 정조의 인간상』'''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꼼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왕으로서의 정조와 인간 이산(李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정조는 집권하면서부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영조가 백성을 위하였던 지극한 뜻을 이어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좀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료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료들뿐만 아니라 관직이 없는 일반 사인(士人)들과의 교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살펴보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lt;br /&gt;
&lt;br /&gt;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은 영ㆍ정조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여섯 가지 주제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시대의 학술과 사상을 규명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를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의 주자학, 양명학, 예학, 역사학, 북학, 상수학과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등을 분석함으로써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하에, 규장각의 교육기능에 초점을 맞춰 젊은 문신의 재교육제도인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정조의 인재양성의 실상에 접근한 책이다.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시키는 교과내용과 문체책(文體策)을 분석하면 정조의 문체정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치가 정조』'''는 국가를 하나의 학교로 보고 신하를 가르치려 했고 때로는 원칙적인 책략으로 노련하게 현실 정치를 이끌어 간 예언가이며 미완의 개혁가로 생을 마친 고독하고 우유부단했던 조선 왕조 최고의 정치가인 정조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정조의 정치와 학문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다.&lt;br /&gt;
&lt;br /&gt;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는 정조의 『책문』을 쉬운 우리말로 완역한 최초의 단행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으로서, 정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최고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lt;br /&gt;
&lt;br /&gt;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은 정조대에 편찬되거나 간행된 문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조대의 전례와 음악, 악서, 병서, 의서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및 행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0179 최홍규,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 2005.]&lt;br /&gt;
|참고문헌2=[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60189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13.]&lt;br /&gt;
|참고문헌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88392 김준혁,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lt;br /&gt;
|참고문헌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34087 유봉학,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백산서당, 2001.]&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의 제1장에서는 정조의 화성 신읍치의 건설과 화성 성역, 11년간의 화성 경영의 내용 및 특성과 그 의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정조가 춘ㆍ추행으로 시행한 1차 원행의 내용과 대화성 읍민정책의 내용을 사안별로 고찰하였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편찬 과정, 내용 구성, 의의 등을 탐구하였다. 제5장에서는 화성행궁의 건립 과정, 구성과 배치, 최근의 복원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발전하는 데 온상이 되어온 경기지역의 실학인물을 군현별로 파악하고, 제7장에서는 경기지역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화성과 수원지방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방사적 관점에서 정리하였다.&lt;br /&gt;
정조의 반차ㆍ충효의 배다리 건너기 등 화성행차의 모든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흥미로운 역사 해설로 함께 담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은, 정조가 야심차게 펼쳤던 8일간의 정치 이벤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조선 최대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행차의 백미로 손꼽히는 배다리 건너기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공사도 군대식으로 치밀하게 조직ㆍ관리하는 정조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11일 만에 배다리를 건설하여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lt;br /&gt;
&lt;br /&gt;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화성의 의의는 그뿐만이 아니다. 화성에는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런 화성을 설계한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저자 김준혁은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는 정조와 다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인간 존중의 정신이 어떻게 화성에서 구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에 슬기로운 임금 정조와 어진 신하 다산이 꿈군 백성을 위한 '대동의 도시 화성'을 주제로 삼아 정조와 다산 그리고 화성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정신임을 전한다.&lt;br /&gt;
&lt;br /&gt;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200년 전 선인들의 차원 높은 구상과 세련된 실천을 재조명하여 화성의 전체적 실상을 드러내고, 그와 관련된 정조시대 문화에 대해 고찰한 연구서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정치적 조건과 화성에서 실현된 상업 및 농업 진흥책 등 선진적 경제정책, 첨단 신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과 성곽의 건설과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였던 정약용의 구상 등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화성의 전모와 화성 신도시 보존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네트워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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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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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맨틱 데이터베이스의 특정 노드를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 그래프를 출력하는 틀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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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AI 讲故事:中文&amp;quot; onclick=&amp;quot;location.href='https://public.aks.ac.kr/~tutor/cgi-bin/gptapi/Story03Gpt.py?db={{{db|}}}&amp;amp;project={{{project|}}}&amp;amp;key={{{title|}}}&amp;amp;language=Chinese'&amp;quot;&amp;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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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시맨틱 데이터&amp;quot; onclick=&amp;quot;location.href='https://public.aks.ac.kr/~tutor/cgi-bin/gptapi/Story03Gpt.py?db={{{db|}}}&amp;amp;project={{{project|}}}&amp;amp;key={{{title|}}}&amp;amp;language=Script'&amp;quot;&amp;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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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방법==&lt;br /&gt;
* 스토리텔링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특정 에피소드의 네트워크 그래프를 출력하는 틀입니다. &lt;br /&gt;
* 데이터베이스(db)와 시맨틱 데이터 세트(project), 스토리/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을 지정하세요.&lt;br /&gt;
* 에피소드 문서의 제목(title)은 스토리 데이터의 id로 인식됩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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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n==&lt;br /&gt;
&lt;br /&gt;
Korea 100 presents one-hundred articles on history, controversies, culture, events, and historical figures pertaining to Korea. It aims to serve as a free, reputable, multimedia resource for educators, diplomats, students, and anyone in the general public who is interested in learning more about Korea. The website also includes a glossary of key terms, further resources, and a variety of photos, videos, and illustrations.&lt;br /&gt;
&lt;br /&gt;
This online resource is a product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 the leading research institution for Korean studies. It was launched in 2017 as the final product research project which aimed to understand on a deeper level how we might create better introductory content on Korea for non-Korean speakers and Koreans abroad. This research project came about in response to the lack of reputable, introductory content on Korea available online - especially in English. 100 topics were selected to serve as a &amp;quot;test run&amp;quot; to gain insight on existing resources, to fine-tune content development, fact-checking, and editing processes for Korea-related content, and to serve as a backdrop for multimedia content compiliation and creation. It was implemented on a MediaWiki platform to enable collaborative creation and easy navigation.&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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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language articles on Korea 100 are abbreviated and tailored versions of the Korean-language articles designed to better serve the needs of those less familiar with Korean history, language, and culture. For those who can read Korean, a link to the Korean version of each article is available in the top right corner of each page.&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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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lt;br /&gt;
# [[An Overview of Korean History]]&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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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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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한국어 대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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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s==&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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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 as Seen through Multimedia]]&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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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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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집필의 목적 및 배경'''==&lt;br /&gt;
&lt;br /&gt;
현재 한국에는 한국의 역사 문화를 소개하는,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시각만을 반영하거나, 텍스트 중심의 국문으로만 제작되어 있기도 하고, 근거자료가 미약한데도 재미만 추구하여 학교 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들이 많이 있다. 또한 번역 자료의 경우 한국어로 집필한 후, 이를 단순 번역함에 따라 한국학 및 한국문화에 대한 기초가 미약한 외국인들이 문화적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맥과 단어사용 등으로 한국역사문화에 입문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게 되는 제약요인들이 있다.&lt;br /&gt;
&lt;br /&gt;
본 연구에서는 국내외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 각각의 주제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집필하며, 풍부한 시각자료와 동영상 자료를 포함시킴으로써 기존 자료와는 차별된 한국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특히 국내 학교 및 교육현장만을 겨냥한 이야기 자료 개발이 아니라, 해외의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한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계인의 시각에서 고려된 주제 설정, 집필 방식, 자료 개발 등의 기법들을 충분히 검토하여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lt;br /&gt;
&lt;br /&gt;
본 연구는 위키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콘텐츠로 편찬하여, 국내외의 학교 및 교양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한국역사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원고 외의 시청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한국역사문화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주제'''==&lt;br /&gt;
# [[한국사의 중요 흐름]]&lt;br /&gt;
# [[한국에 대한 제논의]]&lt;br /&gt;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br /&gt;
# [[한국의 중요 사건]]&lt;br /&gt;
# [[한국의 중요 인물]]&lt;br /&gt;
# [[멀티미디어로 보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C%80%EB%AC%B8&amp;diff=4734</id>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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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__NOTOC__&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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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font size=&amp;quot;7&amp;quot;&amp;gt;100가지 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amp;lt;/font&amp;gt;&amp;lt;br/&amp;gt;&lt;br /&gt;
&amp;lt;font size=&amp;quot;6&amp;quot;&amp;gt;&amp;lt;b&amp;gt;&amp;lt;i&amp;gt;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amp;lt;/i&amp;gt;&amp;lt;/b&amp;gt;&amp;lt;/font&amp;gt;&lt;br /&gt;
&amp;lt;/center&amp;gt;&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KOREA101_mainpage_KOR.jpg|link=한국어 대문&lt;br /&gt;
File:KOREA101_mainpage_ENG.jpg|link=Welcome to Korea 100!&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시각자료 Visual Materials'''==&lt;br /&gt;
{{clickable button|[[Maps|지도&amp;lt;br/&amp;gt;Maps]]}}&lt;br /&gt;
{{clickable button|[[Images|사진&amp;lt;br/&amp;gt;Images]]}}&lt;br /&gt;
{{clickable button|[[Illustrations|일러스트&amp;lt;br/&amp;gt;Illustrations]]}}&lt;br /&gt;
{{clickable button|[[Videos|동영상&amp;lt;br/&amp;gt;Videos]]}}&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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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C%80%EB%AC%B8&amp;diff=4733</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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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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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8</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8"/>
				<updated>2018-01-31T01:5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봄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였으며, 2012년부터는 봄, 가을 2 차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이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2%85%EB%AC%98_%EC%A0%9C%EB%A1%80%EC%95%85%EA%B3%BC_%ED%95%A8%EA%BB%98_%EC%98%88%EC%88%A0%EC%9D%B4_%EB%90%9C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4537</id>
		<title>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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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31T01:58: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Honoring Ancestors through Ritual and Music - Ancestral Rituals of the Royal Shrine&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lt;br /&gt;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lt;br /&gt;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조선 태조|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종묘 정전|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왕 한 분과 그의 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종묘 정전|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조선 태조|태조]]가 맨 왼쪽, [[조선 순종|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종묘 정전|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종묘 영녕전|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종묘 정전|정전]] 서편에 있는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종묘 정전|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종묘 영녕전|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종묘 정전|정전]]과 [[종묘 영녕전|영녕전]]은 1836년 [[조선 헌종|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종묘 정전|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lt;br /&gt;
[[종묘제례|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봄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였으며, 2012년부터는 봄, 가을 2 차례 제항을 올리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이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종묘 영녕전|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종묘 정전|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예술로서의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조선 세종|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진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50px&amp;gt;&lt;br /&gt;
파일:3-22.종묘-_DSC_7454.jpg|종묘(서울 종로구)&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524.jpg|종묘&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12.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27.jpg|종묘대제&lt;br /&gt;
파일:3-22.종묘대제-ESC_5691.jpg|종묘대제&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동영상'''==&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국악방송)'''&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enUWpN-aoUE&amp;lt;/youtube&amp;gt;&lt;br /&gt;
&amp;lt;youtube description=&amp;quot;'''종묘제례악 '전폐희문·기명·역성·소무·독경·영관'(국립국악원)'''&amp;quot;&amp;gt;https://www.youtube.com/watch?v=_p4bg5STU4k&amp;lt;/youtube&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성리학]]&lt;br /&gt;
*[[종묘]]&lt;br /&gt;
*[[종묘 정전]]&lt;br /&gt;
*[[종묘 영녕전]]&lt;br /&gt;
*[[공신당]]&lt;br /&gt;
*[[경복궁]]&lt;br /&gt;
*[[사직단]]&lt;br /&gt;
*[[종묘제례]]&lt;br /&gt;
*[[종묘제례악]]&lt;br /&gt;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lt;br /&gt;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lt;br /&gt;
}}&lt;br /&gt;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lt;br /&gt;
|참고문헌2=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lt;br /&gt;
|참고문헌2=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lt;br /&gt;
&lt;br /&gt;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8B%9C%EB%8C%80_%EC%97%AD%EC%82%AC%EC%99%80_%EB%AC%B8%ED%99%94_%EC%97%B0%EA%B5%AC%EC%9D%98_%EA%B8%B0%EB%B3%B8_%EC%9E%90%EB%A3%8C,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4199</id>
		<title>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8B%9C%EB%8C%80_%EC%97%AD%EC%82%AC%EC%99%80_%EB%AC%B8%ED%99%94_%EC%97%B0%EA%B5%AC%EC%9D%98_%EA%B8%B0%EB%B3%B8_%EC%9E%90%EB%A3%8C,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4199"/>
				<updated>2018-01-10T02:4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472 Years of History Recorded with Precision -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lt;br /&gt;
===왕도 볼 수 없었던 사초===&lt;br /&gt;
&lt;br /&gt;
[[실록(實錄)]]은 조선시대에 왕대별로 편찬된 통치 역사의 기록이다. 첫번째 임금 [[조선 태조|태조]]로부터 마지막 임금 [[조선 순종|순종]]까지의 기록이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제외한 태조-철종 간 25대 472년 간의 역사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고 통칭한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고 다음 왕이 등극하면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사초(史草)]]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의정부등록|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조보|조보(朝報)]]』,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일성록(日省錄)]]』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lt;br /&gt;
&lt;br /&gt;
[[사초]]는 전 왕 재위 시에 [[사관|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기록으로 실록의 중심 자료가 되었다. 네 명의 전임 사관은 궁중에서 항상 임금 곁에 있다가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때로는 인물들에 대한 사관의 평가를 쓰기도 했다. 또 풍속의 미악(美惡)과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는 성격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필화(筆禍)를 막기 위해 임금도 열람할 수 없었다.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에도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엄하게 단속한 덕분에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3단계로 편찬하여 네 곳에 보관===&lt;br /&gt;
&lt;br /&gt;
실록 편찬은, [[사초]]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실록청에 모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록청의 구성원은 모두 춘추관의 관원이었는데,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을 완성하였다. 첫째 단계는, 여러 개로 나뉜 방에서 각종 자료 중에 중요한 사실을 골라내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심 부서인 도청에서 초고에서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간 원고를 작성하였다. 셋째, 실록청의 우두머리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간 원고의 오류를 다시 한 번 더 수정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낸다.  &lt;br /&gt;
&lt;br /&gt;
실록이 완성되면 여러 부를 더 등사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고|사고(史庫)]]에 각기 나누어 보관하였다.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실록 소실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편찬에 이용한 기본 자료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고와 중간 원고는 서울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세초란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는 것인데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등 에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된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모두 소실되었다. 이 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太祖實錄)』부터 『명종실록(明宗實錄)』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전주사고 실록을 기준으로 다시 4부를 베끼고 이를 춘추관과 깊은 산 속에 마련한 서고에 보관하였다.&lt;br /&gt;
  &lt;br /&gt;
===누구나 볼 수 있는 실록===&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법률, 경제, 사회, 풍속, 천문, 지리, 과학, 예술, 학문, 사상, 윤리, 도덕,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 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국역본 413책이 완성되어 간행되었고, 1995년에는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 북한에서도 1980년에 『리조실록(李朝實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본 400권을 출판했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180px&amp;gt;&lt;br /&gt;
파일:3-21.태조실록_Jeonju_Historical_Museum.jpg|태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정조실록_Jeonju_Historical_Museum.jpg|정조실록(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전주역사박물관)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정족산_사고_Samnangseong_(2).jpg|정족산 사고(인천 강화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정족산_사고_Samnangseong_(3).jpg|정족산 사고 안내판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파일:3-21.정족산_사고_Samnangseong.jpg|정족산 사고 장사각(인천 강화군) / 사진제공(김지호)-한국관광공사&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왕조실록]]&lt;br /&gt;
*[[실록청]]&lt;br /&gt;
*『[[승정원일기|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의정부등록|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 &lt;br /&gt;
*『[[조보|조보(朝報)]]』&lt;br /&gt;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lt;br /&gt;
*『[[일성록|일성록(日省錄)]]』&lt;br /&gt;
*[[사초]]&lt;br /&gt;
*[[사관]]&lt;br /&gt;
*[[사고]]&lt;br /&gt;
*[[무오사화]]&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성무,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 1999.&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구체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왜 정변의 원인이 되었는지, 폐위된 왕들에게도 실록이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되짚어보고,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과정,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의 대중화 작업과 CD-ROM 제작까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궁금증을 파헤쳤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의 사론(史論)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조선왕조실록번역팀, 『사필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2016.&lt;br /&gt;
|참고문헌2=윤용철, 『조선왕조실록 졸기』, 다울, 2007.&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건의 시말이나 시비는 물론이고 관직 임명에 대한 의견, 생전 또는 사후의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주관적인 의견도 실려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신왈’, ‘사신논왈' 등으로 시작하는 사론이다. 사론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은 조선왕조실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실록의 본질적 가치를 논할 때, 사론을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론은 조선 전기의 실록에만도 3400여 건이 실려 있는데, 이 시기 사론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 가운데 약 57%가 인물에 대한 논평이라고 한다. '''『사필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은 사론을 통해 실록의 본질적인 가치를 짚어 보고자 기획되었다. 전체를 2부로 구성하여 1부에는 실록 속 다양한 사안을 논평한 사론들을, 2부에는 사관과 실록의 발자취를 실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 졸기』'''는 전방위적인 기록들 중에서 조선 전ㆍ중기에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23인을 선정하여, 실록에 기록된 그들의 졸기 및 그 졸기와 관계된 사건과 일화들을 정리한 책이다. 졸기(卒記)는 말 그대로 죽음의 기록으로, 해당 인사에 대한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전해준다. 이 책에서는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해당 인물의 졸기를 원문 국역으로 배치하고, 그 졸기에 나타난 내용을 실록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검색해 기술하였다. 인물의 업적이나 과(過), 그리고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졸기에 오르지 않은 몇 명에 대한 이야기도 졸기의 형식을 빌어 포함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B%85%B8%EB%B9%84%EB%8A%94_%EB%85%B8%EC%98%88%EC%9D%B8%EA%B0%80_%EB%86%8D%EB%85%B8%EC%9D%B8%EA%B0%80&amp;diff=4064</id>
		<title>조선의 노비는 노예인가 농노인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_%EB%85%B8%EB%B9%84%EB%8A%94_%EB%85%B8%EC%98%88%EC%9D%B8%EA%B0%80_%EB%86%8D%EB%85%B8%EC%9D%B8%EA%B0%80&amp;diff=4064"/>
				<updated>2017-12-13T03:14: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Eng Article|&lt;br /&gt;
|Article=&lt;br /&gt;
}}&lt;br /&gt;
=='''조선의 노비는 노예인가 농노인가'''==&lt;br /&gt;
===조선 전기 신분은 네 계층===&lt;br /&gt;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양인|양인(良人)]]과 [[천인|천인(賤人)]]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국가에 조세와 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는 대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천인]]은 대부분 개인이나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으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다. [[조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양인]]과 [[천인]]을 바탕으로 하는 법적인 신분제도는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상민]]과 [[천민]]이라는 네 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lt;br /&gt;
&lt;br /&gt;
[[양반]]은 조선의 지배 신분층으로 [[과거제도|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했으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층으로 지방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각종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국역을 면제받았다.&lt;br /&gt;
&lt;br /&gt;
[[중인]]은 좁은 의미로는 역관, 의관 같은 기술관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을 뜻하였다. 이들은 [[양반]]에 비해 차별받았으나, 전문 기술을 갖고 있거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양반]]의 후손이면서도 정실의 소생이 아닌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상민]]은 평민, 양민이라고도 하며, 생산을 담당하고 세금을 내는 계층으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이 해당되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교육을 받고 [[과거제도|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지만, 실제 [[과거제도|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국가에 토지세인 전세를 내고 마을 단위로 부과되는 특산물인 공납을 바쳐야 했으며,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군복무의 의무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수공업자는 주로 관청에 등록되어 주요 물품을 생산하였고, 상인은 국가의 통제 아래 상업에 종사하였다.&lt;br /&gt;
&lt;br /&gt;
최하층 신분인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다.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 재주를 부리는 광대, 무당과 기생 등도 천민에 속했다.&lt;br /&gt;
&lt;br /&gt;
[[노비]]는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노비와 주인집에서 나와 따로 사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외거노비의 경우 비교적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는 [[상민]]의 처지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신분 간의 계층 이동===&lt;br /&gt;
[[조선]] 후기에 들어와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발행하였던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 결과 [[양반]]은 급격하게 늘어난 반면,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lt;br /&gt;
&lt;br /&gt;
[[양반]]의 수가 늘어나기는 했어도 중앙 권력을 차지한 [[양반]]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양반]]은 향촌에서 세력을 겨우 유지하였으며, 일부 [[양반]]은 몰락하여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반면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을 수행하였던 [[중인]] 중에서 축적한 재산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한 이들이 생겨났다. 18세기 이후 [[노비]] 가운데 재산의 축적으로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나타났다. 이 시기 정부에서는 ‘노비’라는 명칭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1801년에는 중앙 관서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6만 6천의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노비]]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노비의 지위===&lt;br /&gt;
[[조선]]의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 정도였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증여, 상속할 수 있었다. 주인이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심지어 관청의 허가를 받으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노비]]를 고대 유럽의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판단하고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도 한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중세 농노에 가까운 신분일까?&lt;br /&gt;
&lt;br /&gt;
노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지만, 농노는 제한적이나마 토지를 보유했다. 노예는 가족을 갖기 어려웠지만, 농노는 가정을 이루어 생활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에게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권이 없었으나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거노비의 경우 실제로 토지와 가옥을 소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외거노비의 경우 주인의 호적 외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조선 세조|세조]] 때는 [[노비]] 주인이 [[노비]]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정했다는 기록도 있다.&lt;br /&gt;
&lt;br /&gt;
『[[경국대전]]』에는 [[공노비]]가 출산할 경우 80일의 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산후 보름 동안의 휴가를 준다는 규정이 있다. 또 『[[세종실록|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산후 1백일 안에는 사역을 시키지 않으며,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잘 시행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노비]]의 법적인 처우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lt;br /&gt;
&lt;br /&gt;
===신분을 바꾼 노비들===&lt;br /&gt;
[[노비]]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일반 [[양인]]에 비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양인]]과 비슷하거나 [[양인]]보다 훨씬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존재했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노비]]들도 분명 존재했다.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크게 늘리거나 신분을 향상시킨 [[노비]]의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 태종|태종]] 때 '불정'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는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는데, 어전회의에서 불정이 축적한 부에 대해 거론하면서도 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를 보면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버는 [[노비]]들이 조선 초기부터 적지 않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조|세조]] 때에는 쌀 100가마니를 내고 국경까지 직접 운반하는 [[노비]]에게 신분을 상승시켜 준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노비]]들이 신청하는 바람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2개월 만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만큼 부유한 [[노비]]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lt;br /&gt;
&lt;br /&gt;
학문의 영역에서 활약한 [[노비]]들도 있었다. [[반석평|반석평(潘碩枰, ?~1540)]]은 노비였는데, 그의 재주를 사랑한 주인이 글을 가르치고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결국 재상에까지 올랐다. [[박인수|박인수(朴仁壽, 1521~1592)]]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부터 유학을 배웠다. 주변 선비들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하여 존경하였으며, 제자들도 거느렸다. 정학수는 [[성균관]]의 [[노비]]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어깨너머로 학문을 익혔고,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어 많은 양반 자제들을 제자로 둔 유명한 선생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조선]]의 [[노비]] 중에는 노예와 같은 처지의 [[노비]]도 있고, 농민과 비슷한 처지의 [[노비]]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와 농노, 어느 하나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모습을 갖춘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관련항목'''==&lt;br /&gt;
*[[조선]]&lt;br /&gt;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lt;br /&gt;
*[[양인]]&lt;br /&gt;
*[[천인]]&lt;br /&gt;
*[[양반]]&lt;br /&gt;
*[[중인]]&lt;br /&gt;
*[[상민]]&lt;br /&gt;
*[[천민]]&lt;br /&gt;
*[[노비]]&lt;br /&gt;
*[[갑오개혁]]&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한국학술정보, 2001.&lt;br /&gt;
|참고문헌2=한영우,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 집문당, 1997.&lt;br /&gt;
|참고문헌3=김두헌, 『조선시대 기술직 중인 신분 연구』, 경인문화사, 2013&lt;br /&gt;
|참고문헌4=지승종, 『조선전기 노비신분연구』, 일조각, 1995.&lt;br /&gt;
|참고문헌5=김영모, 『조선·한국 신분계급사』, 고헌출판부, 2014.&lt;br /&gt;
}}&lt;br /&gt;
'''『조선초기 양반연구』'''에서는 조선시대의 신분구조를 4계층, 즉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누었고, 그 가운데 양반의 지위, 군역, 토지 소유 등에 관해 연구한 책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조선 초기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의 신분구조를 이분법으로 구분한 ‘양천제’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의 저자는 대표적인 양천제를 주장하는 학자이다. 이러한 여러 논의들이 있으나 아직 통설로 확정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 교과서에는 4개의 신분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기술직 중인 신분 연구』'''는 중인의 기원, 형성시기와 요인, 잡과와 주학 입격, 운학 생도방과 역학 생도방 피천 및 완천, 양반으로서의 신분 상승 여부 등 중인의 기원부터 발달까지의 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당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전기 노비신분연구』'''는 조선전기의 노비신분을 여러 주제로 나누어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한국 신분계급사』'''는 그간 신분, 계급 및 지배층에 관한 쟁점을 먼저 소개하고 또한 저자가 그간 발표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한말. 일제시기 및 해방 후 한국의 신분계급사를 재구성 하였다. 또한 최근의 이와 관련된 논문을 추가하여 조선·한국 신분 계급사를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분제의 변동에 대해 알고 싶다면....'''&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참고문헌1=최승희, 『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 지식산업사, 2003.&lt;br /&gt;
|참고문헌2=이홍두, 『조선시대 신분변동 연구』, 혜안, 1999.&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는 임진왜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사회상과 아울러 변화된 신분제도를 다룬 책이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신분변동 연구』'''는 조선후기 천인의 신분상승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신분변동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조선후기 천인 신분변동의 문제, 보충대를 통한 천인의 신분변동, 장용대를 통한 신분변동, 군공논상을 통한 천인의 신분변동, 무과를 통해본 천인의 신분변동 등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217</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217"/>
				<updated>2017-11-08T02:24: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  종교 이상의 힘을 지녔던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혈연 조직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행해지는 의식을 두루뭉술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훌륭하게 종교로 체계화 되었고, 신도 또한 적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 또 “민간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민족적 특성이 강한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규정한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 이중 무속신앙은 전문적인 민간 신앙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민간신앙은 기존의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그 연원이 결코 짧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민간신앙은 함께 공존했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 &lt;br /&gt;
&lt;br /&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단군 때에 이어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민간신앙은 유지됐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기우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 의미도 있었으며,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통치를 위한 목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초기에 종교가 하던 역할을 기우제가 담당케 했던 것이다. 기우제는 기상예보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동네 어른들이 주관하여 가끔 마을에서 지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중요한 민간신앙이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가신신앙, 범위를 넓힌 마을신앙, 전문 무속인이 등장하여 행하는 무속신앙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신앙으로 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토정비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늘었다. 점을 치고 귀신을 쫒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집 안에 뿌리며 악귀를 쫓는 등 민간신앙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옛 것에 대한 추억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승과 솟대가 전국 곳곳에 다시 세워지고 있으며, 이를 축제로 즐기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승은 나쁜 기운을 막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 솟대는 마을의 액을 막으며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마을에 경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웠었다.&lt;br /&gt;
&lt;br /&gt;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민간신앙이다. 사악한 것이나 액운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이에 부적을 어느 장소에 붙이거나 몸에 지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부적은 신라 이전부터 부적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이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친절한 설명이 필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lt;br /&gt;
&lt;br /&gt;
이를 가정, 마을, 국가에서 행하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의 터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이를 높여서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현재 어의가 확대되어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집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터주를 놓는다.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터주는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씨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둘째로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lt;br /&gt;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2016.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 11호』&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주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lt;br /&gt;
&lt;br /&gt;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 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국가가 행하는 신앙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타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2003,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점,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다시 등장했고,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고 정의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행위의 전문성에 따라 금기, 풍수(風水), 주술, 제사, 무속(巫俗)을 들 수 있으며,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도 민간신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은 크게 보아 개인적인 신앙과 집단적 · 사회적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비집단적인 가정신앙은 가장이나 최고연장자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거나 문중의 번성을 위해 신격화한 조상신을 섬기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데 이를 터주가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집안에서는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난방과 취사를 담당하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으며,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002 환웅]&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으며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의미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을 말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 중 가정신앙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가장이나 주부 등 가족 구성원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고,  동제와 같은 지역 공동체의 민간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집안에서 난방과 취사에 쓰이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다. 조왕신은 부엌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다. 가정의 주부들은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신을 성주신이라고 한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대들보 위에 작은 쌀 항아리를 놓아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이 신들에게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제이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사가 잘되거나 고기가 잘 잡히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킨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어 가고 있지만,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차원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단군을 낳은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단군은 아버지로부터 초인적인 능력을 이어받아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에 근거하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000회도 넘게 등장한다.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제단에 나아가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도성 주변의 큰 산에서 치뤄졌다. 전국의 주요 산들에서도 지방의 관리와 고을 주민들이 산신제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은 20세기에 들어 근대화를 위한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 위축되었지만, &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근년에는 다시 전통문화와 민속의 이름으로 회복되는 추세이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각 지역의 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상징으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214</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214"/>
				<updated>2017-11-08T02:21: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국가차원의 민간신앙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  종교 이상의 힘을 지녔던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혈연 조직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행해지는 의식을 두루뭉술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훌륭하게 종교로 체계화 되었고, 신도 또한 적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 또 “민간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민족적 특성이 강한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규정한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 이중 무속신앙은 전문적인 민간 신앙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민간신앙은 기존의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그 연원이 결코 짧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민간신앙은 함께 공존했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 &lt;br /&gt;
&lt;br /&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단군 때에 이어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민간신앙은 유지됐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기우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 의미도 있었으며,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통치를 위한 목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초기에 종교가 하던 역할을 기우제가 담당케 했던 것이다. 기우제는 기상예보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동네 어른들이 주관하여 가끔 마을에서 지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중요한 민간신앙이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가신신앙, 범위를 넓힌 마을신앙, 전문 무속인이 등장하여 행하는 무속신앙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신앙으로 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토정비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늘었다. 점을 치고 귀신을 쫒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집 안에 뿌리며 악귀를 쫓는 등 민간신앙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옛 것에 대한 추억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승과 솟대가 전국 곳곳에 다시 세워지고 있으며, 이를 축제로 즐기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승은 나쁜 기운을 막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 솟대는 마을의 액을 막으며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마을에 경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웠었다.&lt;br /&gt;
&lt;br /&gt;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민간신앙이다. 사악한 것이나 액운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이에 부적을 어느 장소에 붙이거나 몸에 지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부적은 신라 이전부터 부적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이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친절한 설명이 필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lt;br /&gt;
&lt;br /&gt;
이를 가정, 마을, 국가에서 행하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의 터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이를 높여서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현재 어의가 확대되어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집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터주를 놓는다.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터주는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씨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둘째로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lt;br /&gt;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2016.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 11호』&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주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lt;br /&gt;
&lt;br /&gt;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 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국가가 행하는 신앙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타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2003,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점,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다시 등장했고,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고 정의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행위의 전문성에 따라 금기, 풍수(風水), 주술, 제사, 무속(巫俗)을 들 수 있으며,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도 민간신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은 크게 보아 개인적인 신앙과 집단적 · 사회적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비집단적인 가정신앙은 가장이나 최고연장자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거나 문중의 번성을 위해 신격화한 조상신을 섬기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데 이를 터주가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집안에서는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난방과 취사를 담당하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으며,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002 환웅]&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으며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의미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을 말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 중 가정신앙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가장이나 주부 등 가족 구성원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고,  동제와 같은 지역 공동체의 민간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집안에서 난방과 취사에 쓰이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다. 조왕신은 부엌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다. 가정의 주부들은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신을 성주신이라고 한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대들보 위에 작은 쌀 항아리를 놓아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이 신들에게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제이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사가 잘되거나 고기가 잘 잡히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킨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어 가고 있지만,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차원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단군을 낳은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단군은 아버지로부터 초인적인 능력 이어받아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으며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000회도 넘게 등장한다.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제단에 나아가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도성 주변의 큰 산에서 치뤄졌다. 전국의 주요 산들에서도 지방의 관리와 고을 주민들이 산신제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은 20세기에 들어 근대화를 위한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 위축되었지만, &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근년에는 다시 전통문화와 민속의 이름으로 회복되는 추세이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각 지역의 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상징으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213</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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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1-08T02:17: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2차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  종교 이상의 힘을 지녔던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혈연 조직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행해지는 의식을 두루뭉술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훌륭하게 종교로 체계화 되었고, 신도 또한 적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 또 “민간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민족적 특성이 강한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규정한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 이중 무속신앙은 전문적인 민간 신앙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민간신앙은 기존의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그 연원이 결코 짧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민간신앙은 함께 공존했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 &lt;br /&gt;
&lt;br /&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단군 때에 이어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민간신앙은 유지됐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기우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 의미도 있었으며,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통치를 위한 목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초기에 종교가 하던 역할을 기우제가 담당케 했던 것이다. 기우제는 기상예보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동네 어른들이 주관하여 가끔 마을에서 지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중요한 민간신앙이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가신신앙, 범위를 넓힌 마을신앙, 전문 무속인이 등장하여 행하는 무속신앙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신앙으로 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토정비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늘었다. 점을 치고 귀신을 쫒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집 안에 뿌리며 악귀를 쫓는 등 민간신앙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옛 것에 대한 추억일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승과 솟대가 전국 곳곳에 다시 세워지고 있으며, 이를 축제로 즐기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승은 나쁜 기운을 막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 솟대는 마을의 액을 막으며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마을에 경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웠었다.&lt;br /&gt;
&lt;br /&gt;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민간신앙이다. 사악한 것이나 액운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이에 부적을 어느 장소에 붙이거나 몸에 지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부적은 신라 이전부터 부적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이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친절한 설명이 필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lt;br /&gt;
&lt;br /&gt;
이를 가정, 마을, 국가에서 행하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의 터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이를 높여서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현재 어의가 확대되어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집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터주를 놓는다.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터주는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씨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둘째로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lt;br /&gt;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2016.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 11호』&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주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lt;br /&gt;
&lt;br /&gt;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 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국가가 행하는 신앙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타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2003,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점,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다시 등장했고,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고 정의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행위의 전문성에 따라 금기, 풍수(風水), 주술, 제사, 무속(巫俗)을 들 수 있으며,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도 민간신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은 크게 보아 개인적인 신앙과 집단적 · 사회적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비집단적인 가정신앙은 가장이나 최고연장자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거나 문중의 번성을 위해 신격화한 조상신을 섬기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데 이를 터주가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집안에서는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난방과 취사를 담당하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으며,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002 환웅]&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으며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의미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을 말한다. 종교적 신념인 신화(柛話), 실생활에서 행해지던 주술과 의례, 세시풍속과 통과의례(通過儀禮)처럼 시간에 따라 반복되는 것도 있고, 장제(葬祭)나 조상숭배(祖上崇拜), 동제(洞祭)와 같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행해지는 민간신앙도 있다. &lt;br /&gt;
&lt;br /&gt;
민간신앙 중 가정신앙은 집이나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가장이나 주부 등 가족 구성원이 여러 가신(家神)을 섬기는 것이고,  동제와 같은 지역 공동체의 민간신앙은 마을 수호 차원에서 공동의 마을신을 섬기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집과 불을 지키는 가정신앙===&lt;br /&gt;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인 터주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주며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의 표시이다. &lt;br /&gt;
&lt;br /&gt;
터주는 주로 집의 뒤뜰에 모셨는데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집안에서 난방과 취사에 쓰이는 아궁이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다. 조왕신은 부엌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부엌에서의 청결과 정숙이 요구되었다. 가정의 주부들은 날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신을 성주신이라고 한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대들보 위에 작은 쌀 항아리를 놓아 모시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이 신들에게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지역 공동체를 위한 신앙===&lt;br /&gt;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제이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사가 잘되거나 고기가 잘 잡히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11호, 한국이사부학회, 2016, 5-59쪽.&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동제는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킨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lt;br /&gt;
&lt;br /&gt;
현대 사회에서 동제의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어 가고 있지만,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단합하는 마을 축제로서의 측면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지역에서 축제로 치러지는 민속 행사들이 이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민간 신앙이었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국가차원의 민간신앙===&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차원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단군을 낳은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단군은 아버지로부터 초인적인 능력 이어받아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으며 무속에서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000회도 넘게 등장한다.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제단에 나아가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 역시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도성 주변의 큰 산에서 치뤄졌다. 전국의 주요 산들에서도 지방의 관리와 고을 주민들이 산신제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은 20세기에 들어 근대화를 위한 미신타파 정책에 밀려 위축되었지만, &amp;lt;ref&amp;gt;정구영,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amp;lt;/ref&amp;gt; 근년에는&lt;br /&gt;
 다시 전통문화와 민속의 이름으로 회복되는 추세이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각 지역의 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행한다.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문화적 상징으로 다시 성행하고, 신비한 힘으로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는 부적도 재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C%9D%98_%EA%B8%B0%EB%8F%85%EA%B5%90&amp;diff=2191</id>
		<title>한국의 기독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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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1-08T00:51: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기독교의 수용 */&lt;/p&gt;
&lt;hr /&gt;
&lt;div&gt;=='''한국의 기독교'''==&lt;br /&gt;
===기독교의 수용===&lt;br /&gt;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오던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기독교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더 늦게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중국,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선교의 역사가 한국에서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 선비들의 학구적인 호기심과 자발적인 수용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다. &lt;br /&gt;
&lt;br /&gt;
병자호란(1636~1637) 이후부터 수시로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관원들과 그 수행원들은 당시 청에 소개되었던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책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독교를 학술 이론으로 바라보고,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평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생적인 기독교인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 활동을 벌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이곳에서 예수회 출신 그라몽(Grammont, Jean Joseph de,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의 기독교 박해===&lt;br /&gt;
조선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또 조선 국왕과 정부가 이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이들의 기독교가 유교적 사고와의 타협을 추구한 예수회 교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하고, 교조적인 선교 시책을 지시하면서 조선에서도 기독교와 유교적 규범 사이의 갈등이 노정되었다. 기독교인 중에 제사와 같은 유교적 의례를 중단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자 조선 정부는 기독교를 국가기강을 문란시키는 해악으로 지목하고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기독교 박해는 1791년 이후 조선이 서양 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하였다.&lt;br /&gt;
&lt;br /&gt;
1876년부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었고, 암묵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lt;br /&gt;
&lt;br /&gt;
===개신교의 선교 계몽 활동===&lt;br /&gt;
조선의 문호개방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의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으로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알렌(Allen, Horace Newto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웠고(1885),  감리회 목사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는 배제학당을 설립하였으며(1885), 스크랜튼(Scranton, Mary 1832~1909년)은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열었고(1886), 장로회 목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세워(1915) 교육계몽 활동을 펼쳤다.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인을 억압하고 수탈할 때에 다수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 섰으며, 교육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lt;br /&gt;
&lt;br /&gt;
개신교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종교일 뿐 아니라 근대적인 서양 문명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lt;br /&gt;
&lt;br /&gt;
===현대 한국의 기독교===&lt;br /&gt;
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온 나라에서 짧은 기간에 이렇듯 기독교 교세가 확장된 것은 최근 수십년간 한국인들이 치열하게 추구해 온 근대화, 산업화의 동반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한국 사회가 서구 문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시기에 기독교는 노동자와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개신교회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고 남한으로 근거지를 옮겨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C%9D%98_%EB%B6%88%EA%B5%90&amp;diff=2190</id>
		<title>한국의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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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1-08T00:47: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한국의 불교'''==&lt;br /&gt;
===불교의 전래===&lt;br /&gt;
불교는 유교와 함께 한국 역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두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나라(漢, B.C.206~A.D.220) 후기부터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에는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의 승려에 의해 전래되었다.&lt;br /&gt;
&lt;br /&gt;
처음에 민간에 전파되었던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후원을 받으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출신 부족이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믿는 종교가 되었고, 국력의 통일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의 전성기: 통일신라, 고려===&lt;br /&gt;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크게 번영하였다. 왕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교학을 배웠고, 그것을 한국에 전파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한반도의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방대한 규모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은 이 시기의 한국 불교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들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lt;br /&gt;
1,000년 동안 번성해 오던 불교는 조선(1392~1910)의 개국과 더불어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우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승려들은 신분적으로 차별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과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불교는 명맥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의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에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큰 전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찰 건물의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억제가 누그러진 상황에 기인한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rimson&amp;quot;&amp;gt; 승려-임진왜란 민족기록화 추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lt;br /&gt;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lt;br /&gt;
&lt;br /&gt;
===현대의 한국 불교===&lt;br /&gt;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국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사찰이 자리한다. 965개소에 달하는 한국의 전통사찰은 국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고, 신도들이 찾아와 예불을 드리는 종교 시설이다. 한국의 여러 유명 사찰들은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가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은 국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즈음에는 사찰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등이 걸리고,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과 한 몸을 이루었던 유교가 그 권력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달리, 민간의 신앙을 받던 불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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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의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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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 */&lt;/p&gt;
&lt;hr /&gt;
&lt;div&gt;=='''한국의 불교'''==&lt;br /&gt;
===불교의 전래===&lt;br /&gt;
불교는 유교와 함께 한국 역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두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나라(漢, B.C.206~A.D.220) 후기부터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에는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의 승려에 의해 전래되었다.&lt;br /&gt;
&lt;br /&gt;
처음에 민간에 전파되었던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후원을 받으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출신 부족이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믿는 종교가 되었고, 국력의 통일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의 전성기: 통일신라, 고려===&lt;br /&gt;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크게 번영하였다. 왕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교학을 배웠고, 그것을 한국에 전파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한반도의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방대한 규모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은 이 시기의 한국 불교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들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lt;br /&gt;
1,000년 동안 번성해 오던 불교는 조선(1392~1910)의 개국과 더불어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우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승려들은 신분적으로 차별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과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불교는 명맥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의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에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큰 전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찰 건물의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억제가 누그러진 상황에 기인한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rimson&amp;quot;&amp;gt; 승려-임진왜란 민족기록화 추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lt;br /&gt;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lt;br /&gt;
&lt;br /&gt;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lt;br /&gt;
&lt;br /&gt;
===현대의 한국 불교===&lt;br /&gt;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국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사찰이 자리한다. 965개소에 곳에 달하는 한국의 전통사찰은 국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고, 신도들이 찾아와 예불을 드리는 종교 시설이다. 한국의 여러 유명 사찰들은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가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은 국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즈음에는 사찰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등이 걸리고,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과 한 몸을 이루었던 유교가 그 권력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달리, 민간의 신앙을 받던 불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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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의 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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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조선시대: 한국 유교의 전성기 */&lt;/p&gt;
&lt;hr /&gt;
&lt;div&gt;=='''한국의 유교'''==&lt;br /&gt;
===종교로서의 유교===&lt;br /&gt;
유교는 ‘인(仁)’이라고 하는 덕목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을 인간의 도덕 규범으로 가르치는 종교이다. ‘인’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기독교와 달리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나 ‘천국’과 같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태생적 도덕 가치와 그것을 실현한 성현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기조로 하는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종교’의 하나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lt;br /&gt;
&lt;br /&gt;
===한국 유교의 기원과 발전===&lt;br /&gt;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외래 종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유교가 언제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징적인 이야기로, 중국 은나라(慇, B.C.1600년경~B.C.1046년경)가 멸망할 때 기자라는 인물이 고조선에 망명하면서 유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고조선으로 불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문명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기록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유교 발전의 뿌리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lt;br /&gt;
&lt;br /&gt;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유교적인 사고와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세 나라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사이에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일을 완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교 경전에 기록된 규범들이 국가 운영의 모델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교는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술로서의 기능을 굳건히 하였다. 국정을 담당할 관인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논어(論語)』, 『효경(孝經)』, 『예기(禮記)』 등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의례도 국가 행사로 치뤄졌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널리 신앙되는 종교였기 때문에 유교의 종교적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종교로서의 역할보다는 지배계급의 통치술과 통치사상, 즉 ‘현실 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지혜와 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 한국 유교의 전성기===&lt;br /&gt;
조선시대(1392~1910)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 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鄕校)’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모든 학교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각 지역의 유교 지식인들이 사립학교 성격의 ‘서원(書院)’을 설립하였다. 향교보다 더 많이 세워진 이곳 서원에는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배 학자들을 제향하는 사당이 설치되어, 그들을 숭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크고 작은 제향 의식이 끊임없이 행해졌다.&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시스템 위에서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예법과 풍속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시책을 펼쳤으며, 그것을 통해 5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국가의 통치 기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lt;br /&gt;
조선 사회를 이끈 수많은 유교적 지식인 가운데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이(李珥, 1537~1584)라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현대 한국의 화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 지성사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이황과 이이는 모두 우주의 원리인 리(理)가 인간의 도덕성인 인(仁)의 원천이라는 ‘성리학(性理學)’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황은 모든 인간이 주체적으로 그 인을 실천하고 확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이는 그 인의 실현이 물질적인 기(氣)의 세계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이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유교 윤리로 사회를 이끌고자 했던 조선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교설이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국가적 스승으로 존중받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현대 한국의 유교===&lt;br /&gt;
종묘, 서원, 향교 등 한국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기록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유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유교 국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인들 가운데 유교를 자신이 믿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t;br /&gt;
&lt;br /&gt;
한국에서 유교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의 유교는 현세중심적인 종교로서, 그 사회의 통치제제나 예속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사회적 성취의 기준이 달라진 상황에서 유교는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고, 외형적으로 유교를 신앙하는 모습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 남지 않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가정생활과 학교교육의 곳곳에서 이들이 전통적인 규범에 영향받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족, 친지, 사제, 직장 상사‧동료 사이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예의와 염치는 다분히 유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례는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 교사의 자세, 심지어는 정치인의 인격까지도 유교적 인간관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유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적 전통이자 국민들 대다수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삶의 규범으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8F%84_%EC%9D%B4%EC%95%BC%EA%B8%B0&amp;diff=1924</id>
		<title>Draft 독도 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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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지증왕|지증왕(智證王)]], [[이사부|이사부(異斯夫)]], [[안용복|안용복(安龍福)]]&lt;br /&gt;
|장소/공간=경상북도 울릉군(慶尙北道 鬱陵郡), [[울릉도]], [[독도]] &lt;br /&gt;
|사건=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안용복의 도해(울릉도쟁계),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편입&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태정관지령|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독도에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이다.)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어서 조선(1392~1910, 한반도를 통치한 마지막 왕조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킨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린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목과 어업활동을 벌이자,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을 관할하는 지방관을 임명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으며,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한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이어서 한일강제병합조약(1910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의 주장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독도박물관(http://www.dokdomuseum.go.kr/) 및 독도체험관(http://www.dokdomuseumseoul.com)을 추가할 수 있다. &lt;br /&gt;
|의견2=&lt;br /&gt;
- 금지시킨다(울릉도쟁계), 진출하게 된다, → 금지시켰다, 진출하였다... 과거형으로 서술&amp;lt;br/&amp;gt;&lt;br /&gt;
- 일본이 독도의 자신의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와 이를 위한 현재의 노력, 이에 대한 한국의 반박을 위한 노력의 글이 좀 더 적극적 구체적으로 포함되었으면 한다. 최근에도 일본은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2005), 문부성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중학교 사회과 학습 지도 요령 해설서를 발간하였다(2008).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39종 중 21종은 독도 영유권을 서술하였다(201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독도에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이다.)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 한반도를 통치한 마지막 왕조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목과 어업활동을 벌이자,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을 관할하는 지방관을 임명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으며,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이어서 한일강제병합조약(1910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의 주장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독도에는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인구 1만여 명,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이 명확하게 수록된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권의 주장은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수로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독도의 한국 지배를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보며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2008년에는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였으며,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교육 내용을 포함시켜 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였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독도에는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인구 1만여 명,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이 명확하게 수록된 자료로서 울릉도와 부속도서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 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 전역과 죽도(울릉도에 붙은 작은 섬) 석도(돌섬, 그 당시 독도의 이름) 등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권의 주장은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수로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독도의 한국 지배를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보며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2008년 일본 정부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도록 하였고,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교육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외국 교과서에 비친 한국』, 2009.&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이민부,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953 독도]&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2월 27일.&lt;br /&gt;
**&amp;quot;[http://dokdo.mofa.go.kr 독도]&amp;quot;, 대한민국 외교부.&lt;br /&gt;
**&amp;quot;[http://www.kr.emb-japan.go.jp/territory/takeshima/index.html 일본의 영토: 다케시마]&amp;quot;, 일본 외무성.&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8F%84_%EC%9D%B4%EC%95%BC%EA%B8%B0&amp;diff=1920</id>
		<title>Draft 독도 이야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F%85%EB%8F%84_%EC%9D%B4%EC%95%BC%EA%B8%B0&amp;diff=1920"/>
				<updated>2017-11-01T02:3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지증왕|지증왕(智證王)]], [[이사부|이사부(異斯夫)]], [[안용복|안용복(安龍福)]]&lt;br /&gt;
|장소/공간=경상북도 울릉군(慶尙北道 鬱陵郡), [[울릉도]], [[독도]] &lt;br /&gt;
|사건=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안용복의 도해(울릉도쟁계),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편입&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태정관지령|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lt;br /&gt;
|개념용어=&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독도에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이다.)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어서 조선(1392~1910, 한반도를 통치한 마지막 왕조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킨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린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목과 어업활동을 벌이자,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을 관할하는 지방관을 임명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으며,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한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이어서 한일강제병합조약(1910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의 주장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독도박물관(http://www.dokdomuseum.go.kr/) 및 독도체험관(http://www.dokdomuseumseoul.com)을 추가할 수 있다. &lt;br /&gt;
|의견2=&lt;br /&gt;
- 금지시킨다(울릉도쟁계), 진출하게 된다, → 금지시켰다, 진출하였다... 과거형으로 서술&amp;lt;br/&amp;gt;&lt;br /&gt;
- 일본이 독도의 자신의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와 이를 위한 현재의 노력, 이에 대한 한국의 반박을 위한 노력의 글이 좀 더 적극적 구체적으로 포함되었으면 한다. 최근에도 일본은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2005), 문부성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중학교 사회과 학습 지도 요령 해설서를 발간하였다(2008).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39종 중 21종은 독도 영유권을 서술하였다(201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독도에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이다.)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 한반도를 통치한 마지막 왕조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목과 어업활동을 벌이자,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을 관할하는 지방관을 임명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으며,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다케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이어서 한일강제병합조약(1910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의 주장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독도에는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인구 1만여 명,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 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 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이 명확하게 수록된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권의 주장은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수로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독도의 한국 지배를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보며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2008년에는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였으며,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교육 내용을 포함시켜 주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였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lt;br /&gt;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작은 섬(총면적 187,554㎡)으로, 대한민국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독도에는 50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상주한다. 섬 자체가 작고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환경이며, 독도라는 명칭 또한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lt;br /&gt;
독도는 울릉도(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 인구 1만여 명,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동남쪽 87.4㎞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예로부터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독도의 역사 또한 울릉도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에 존재하였던 고대 왕국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멸망 이후 한반도를 통치한 고려(918∼1392)의 역사서에도 울릉도에서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거나 조정에서 울릉도에 농기구를 하사해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이어서 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이 명확하게 수록된 자료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693년에는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용복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주 역시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울릉도쟁계).&lt;br /&gt;
&lt;br /&gt;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영토의 경계를 정립해 나가던 일본의 내무성은 최고 행정기구인 태정관에 이 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질의하였고,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지령을 내렸다(태정관 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인근 해역의 풍부한 해산 자원을 노린 많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조선왕조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하고 울릉도와 부속도서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에 수록하는 한편, 울도군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계속해왔다.&lt;br /&gt;
&lt;br /&gt;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 독도===&lt;br /&gt;
일본 정부가 독도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던 시기이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일본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반박하였으나, 을사늑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권의 주장은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현재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에서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에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한 이래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수로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독도의 한국 지배를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야욕의 연장선으로 보며 분노하고 있다.&lt;br /&gt;
&lt;br /&gt;
2008년 일본 정부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도록 하였고,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교육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외국 교과서에 비친 한국』, 2009.&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이민부,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953 독도]&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2월 27일.&lt;br /&gt;
**&amp;quot;[http://dokdo.mofa.go.kr 독도]&amp;quot;, 대한민국 외교부.&lt;br /&gt;
**&amp;quot;[http://www.kr.emb-japan.go.jp/territory/takeshima/index.html 일본의 영토: 다케시마]&amp;quot;, 일본 외무성.&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B2%AD%EC%9D%BC%EC%A0%84%EC%9F%81%EA%B3%BC_%EB%9F%AC%EC%9D%BC%EC%A0%84%EC%9F%81(%ED%95%9C%EB%B0%98%EB%8F%84%EC%97%90%EC%84%9C_%EC%9D%BC%EC%96%B4%EB%82%9C_%EC%97%B4%EA%B0%95%EC%9D%98_%EA%B0%81%EC%B6%95:_%ED%95%9C%EA%B5%AD%EC%9D%98_%EC%9D%91%EC%A0%84)&amp;diff=1864</id>
		<title>Draft 청일전쟁과 러일전쟁(한반도에서 일어난 열강의 각축: 한국의 응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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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0-25T03:15: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2차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의 쟁탈전&lt;br /&gt;
|집필자=이어라&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 [[조선 고종|고종]], [[이토 히로부미]], [[이홍장]]&lt;br /&gt;
|장소/공간= [[인천]], [[평양]], [[봉천]], [[동해]], [[랴오둥반도]], [[압록강]]&lt;br /&gt;
|사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삼국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광무개혁]], [[러일전쟁]]&lt;br /&gt;
|기록물= [[시모노세키조약]], [[포츠머스조약]], [[영일동맹]]&lt;br /&gt;
|개념용어= [[제국주의]], [[청일전쟁]], [[러일전쟁]]&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한반도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봉기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고,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조선 거주 일본인을 보호하겠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의 동시 철군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했고, 이에 해산했던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며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임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넘겨받았으며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도 인정받았다.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졌고, 청은 배상금 때문에 영토와 이권을 담보로 열강들에게 차관을 얻었다. 그 결과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승리는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 삼국간섭을 지켜본 고종은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조선인들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게 하는 단발령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lt;br /&gt;
   &lt;br /&gt;
아관파천 일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 칭호는 일본이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벗어나게 한다는 명분으로 착안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있어 그것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대한 제국은 군주의 전제권을 강화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육과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 제국의 노력은 러일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다. 또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1899-1901)을 빌미로 파견하였던 군대 일부를 철수하지 않고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영국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1902)을 맺어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자(1903),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 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화를 시도하였지만 열강에 의해 묵살 당했다. 전쟁은 1년 넘게 육지와 바다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1905년 초 뤼순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고, 만주 남부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받았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여 1910년 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비판하던 사람들이 제거되었고, 지속적으로 군비를 증강하며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갔다. 러시아는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옮기면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다. 이렇듯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의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를 크게 바꾸었고, 그 가운데 가장 피해를 입은 나라는 직접적인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이었다.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표에서 제시한 시각자료 “청일전쟁, 러일전쟁 관련 영상, 러일전쟁 당시 외국의 신문에 실렸던 각종 풍자화 그림, 청일전쟁 지도, 러일전쟁 지도”에 대한 구체적인 영상, 그림을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lt;br /&gt;
|의견2=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본이 한국에서 타국의 지배권을 배제하는 과정으로,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독식할 수 있는 배경 등으로 초점을 맞추어 관련 내용 중심으로 서술&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한반도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을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봉기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고,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전주화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의 동시 철군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했고, 이에 해산했던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며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임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넘겨받았으며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도 인정받았다.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졌고, 청은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승리는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삼국간섭). 이를 지켜본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정책을 추진하였고,  위기를 느낀 일본은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민비를 살해하고(을미사변), 단발령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lt;br /&gt;
&lt;br /&gt;
아관파천 일 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 칭호는 일본이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벗어나게 한다는 명분으로 착안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있어 그것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대한 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육과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 제국의 노력은 러일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다. 또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1899-1901)을 빌미로 파견하였던 군대 일부를 철수하지 않고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뿐 아니라 영국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1902)을 맺어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자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화를 시도하였지만 열강에 의해 묵살 당했다. 러시아가 쉽게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서양 열강들의 전망과 달리 일본은 1905년 초 뤼순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고, 만주 남부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받았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갔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옮기면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여 1910년 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의 전쟁은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쟁탈전의 최종 피해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한국이었다.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lt;br /&gt;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한반도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을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궐기한 동학농민운동이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전주화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했다. 이에 해산했던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며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임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넘겨받았으며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도 인정받았다.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졌고, 청은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 선포===&lt;br /&gt;
일본의 승리는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삼국간섭). 이를 지켜본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정책을 추진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중전 민씨를 살해하고(을미사변), 단발령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한층 증대되었다.   &lt;br /&gt;
&lt;br /&gt;
아관파천 일 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 칭호는 일본이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벗어나게 한다는 명분으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 그것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대한 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육과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 제국의 노력은 러일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의 결과===&lt;br /&gt;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다. 또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1899-1901)을 빌미로 파견하였던 군대 일부를 철수하지 않고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뿐 아니라 영국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1902)을 맺어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자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화를 시도하였지만 열강에 의해 묵살 당했다. 러시아가 쉽게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서양 열강들의 전망과 달리 일본은 1905년 초 뤼순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고, 만주 남부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받았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갔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옮기면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여 1910년 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의 전쟁은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쟁탈전의 최종 피해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한국이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lt;br /&gt;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한반도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을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궐기한 동학농민운동이다. &lt;br /&gt;
&lt;br /&gt;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전주화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했다. 이에 해산했던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며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임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넘겨받았으며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도 인정받았다. 청일 전쟁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졌고, 청은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 선포===&lt;br /&gt;
일본의 승리는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삼국간섭). 이를 지켜본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정책을 추진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중전 민씨를 살해하고(을미사변), 단발령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한층 증대되었다.   &lt;br /&gt;
&lt;br /&gt;
아관파천 일 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 칭호는 일본이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벗어나게 한다는 명분으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 그것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육과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때, &amp;quot;조선&amp;quot;을 대신하는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정한 &amp;quot;대한제국&amp;quot;은 오늘날 &amp;quot;대한민국&amp;quot; 국호의 연원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의 결과===&lt;br /&gt;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은 러일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다. 또 러시아는 의화단운동(1899-1901)을 빌미로 파견하였던 군대 일부를 철수하지 않고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뿐 아니라 영국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1902)을 맺어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자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화를 시도하였지만 열강에 의해 묵살 당했다. 러시아가 쉽게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서양 열강들의 전망과 달리 일본은 1905년 초 뤼순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고, 만주 남부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받았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갔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옮기면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다. &lt;br /&gt;
&lt;br /&gt;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여 1910년 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의 전쟁은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쟁탈전의 최종 피해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한국이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교원대역사교육과,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04.&lt;br /&gt;
**정미선,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은행나무, 2009.&lt;br /&gt;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0권・42권, 탐구당, 2013.&lt;br /&gt;
**유용태, 박진우, 박태균,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창비, 2015.&lt;br /&gt;
&lt;br /&gt;
[[분류:원고검토용]]&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9C%ED%95%B4(%ED%95%9C%EA%B5%AD%EA%B3%BC_%EC%A4%91%EA%B5%AD%EC%9D%B4_%EA%B3%B5%EC%9C%A0%ED%95%98%EB%8A%94_%EA%B3%A0%EB%8C%80_%EC%97%AD%EC%82%AC)&amp;diff=1259</id>
		<title>Draft 발해(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고대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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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0-18T03:05: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발해 역사는 어느 나라의 것인가?&lt;br /&gt;
|집필자= 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 [[대조영]], [[문왕]], [[정혜공주]], [[고려 태조|왕건]], [[대도수]]&lt;br /&gt;
|장소/공간= [[동북아시아]], [[연해주]]&lt;br /&gt;
|사건= 발해의 건국, 발해의 멸망&lt;br /&gt;
|기록물= [[정효공주 묘비]]&lt;br /&gt;
|개념용어= [[동북공정]]&lt;br /&gt;
|물품/도구/유물=[[정효공주 묘]], 발해의 고분벽화, 발해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히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의 왕족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는 발해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 원고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① 발해가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을 보냈으며,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는 내용&amp;lt;br/&amp;gt;&lt;br /&gt;
② 발해가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드러냈던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준다.&amp;lt;br/&amp;gt;&lt;br /&gt;
③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amp;lt;br/&amp;gt;&lt;br /&gt;
④ 유득공의 발해고 내용 :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는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한탄스럽다.”&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수많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발해는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를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당나라와 신라는 그러한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는데, 발해는 강하게 맞서면서 세력을 키워 갔다. 그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lt;br /&gt;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해는 실크로드의 연장으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가 있었던 곳이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06』, 사계절, 2002.&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 휴머니스트, 2010.&lt;br /&gt;
**박중현, 『청소년을 위한 동아시아사』, 두리미디어, 2012.&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9C%ED%95%B4(%ED%95%9C%EA%B5%AD%EA%B3%BC_%EC%A4%91%EA%B5%AD%EC%9D%B4_%EA%B3%B5%EC%9C%A0%ED%95%98%EB%8A%94_%EA%B3%A0%EB%8C%80_%EC%97%AD%EC%82%AC)&amp;diff=1258</id>
		<title>Draft 발해(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고대 역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9C%ED%95%B4(%ED%95%9C%EA%B5%AD%EA%B3%BC_%EC%A4%91%EA%B5%AD%EC%9D%B4_%EA%B3%B5%EC%9C%A0%ED%95%98%EB%8A%94_%EA%B3%A0%EB%8C%80_%EC%97%AD%EC%82%AC)&amp;diff=1258"/>
				<updated>2017-10-18T03:04: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발해 역사는 어느 나라의 것인가?&lt;br /&gt;
|집필자= 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 [[대조영]], [[문왕]], [[정혜공주]], [[고려 태조|왕건]], [[대도수]]&lt;br /&gt;
|장소/공간= [[동북아시아]], [[연해주]]&lt;br /&gt;
|사건= 발해의 건국, 발해의 멸망&lt;br /&gt;
|기록물= [[정효공주 묘비]]&lt;br /&gt;
|개념용어= [[동북공정]]&lt;br /&gt;
|물품/도구/유물=[[정효공주 묘]], 발해의 고분벽화, 발해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히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의 왕족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이 원고는 발해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본 원고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① 발해가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을 보냈으며,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였다는 내용&amp;lt;br/&amp;gt;&lt;br /&gt;
② 발해가 황제와 황후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임을 드러냈던 사실은 발해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준다.&amp;lt;br/&amp;gt;&lt;br /&gt;
③ 발해 멸망 후 발해 왕자 대광현은 수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amp;lt;br/&amp;gt;&lt;br /&gt;
④ 유득공의 발해고 내용 :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김씨와 대씨가 망한 다음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고는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니, 한탄스럽다.”&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676년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그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는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보다도 넓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발해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수많은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 역시 고구려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따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당나라와 신라는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되찾겠다며 당과 신라의 공격에 강하게 맞섰다. 계속된 영토전쟁의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발해는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를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lt;br /&gt;
676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는 오늘날 평양 부근을 경계로 한반도 남쪽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북쪽 지역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옛 고구려의 유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저항세력의 중심인물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698년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왕족인 ‘대’씨는 고구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표방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8세기 초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도 발해의 왕을 ‘고려(고구려)의 왕’으로 칭하는 등 당시 다른 국가들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집안이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배경이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거란, 말갈인 등 이민족들을 함께 이끌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8세기 중엽 이후 발해는 영토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에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lt;br /&gt;
&lt;br /&gt;
===발해 역사를 대하는 각 나라 주장===&lt;br /&gt;
&lt;br /&gt;
발해는 고구려의 예전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당나라와 신라는 그러한  발해의 팽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발해를 여러 번 공격하였는데, 발해는 강하게 맞서면서 세력을 키워 갔다. 그 결과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연해주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도 넓었다.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발해의 영토가 현재 세 개의 나라에 걸쳐있게 된 데 기인한다.&lt;br /&gt;
&lt;br /&gt;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중국의 영토이며, 당나라가 발해의 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했음을 근거로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면,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한편, 고구려 역사를 축소·외면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러시아 역시 발해 영토의 일부가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 영토 중 한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 한국의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lt;br /&gt;
&lt;br /&gt;
발해가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을 때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가 새로 건국되었다. 고려의 초대 국왕 ‘왕건’은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손으로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의 왕족과 유민을 고려인으로 받아들였다. 10세기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에 발해 왕족인 ‘대도수(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는 고려의 지휘관이 되어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망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발해 유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고려에 정착하였음을 알려주는 한 일화이다.&lt;br /&gt;
&lt;br /&gt;
===발해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발해의 민족적 구성은 다양하다. 고구려 유민, 말갈족뿐 아니라 사마르칸트인부터 페르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문화 역시 강력한 고구려의 전통 위에서 당나라를 비롯한 다양한 외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황제국가의 체제 아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lt;br /&gt;
&lt;br /&gt;
발해의 3대 국왕인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 형태를 보인다. 발해의 독특한 기와와 온돌 방식 역시 고구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백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발해의 5층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 심지어 한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발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해는 실크로드의 연장으로서 다양한 민족의 폭넓은 교류 문화가 있었던 곳이다.  &lt;br /&gt;
 &lt;br /&gt;
중국과 같이 현재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발해인들은 거칠지만 광활한 영토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아우르며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06』, 사계절, 2002.&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 휴머니스트, 2010.&lt;br /&gt;
**박중현, 『청소년을 위한 동아시아사』, 두리미디어, 2012.&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A0%EB%8C%80%EC%9D%98_%ED%95%9C%EC%9D%BC%EA%B4%80%EA%B3%84&amp;diff=1120</id>
		<title>Draft 고대의 한일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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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27T00:4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가야|가야(加耶)]], [[임나|임나(任那)]], [[야마토왜|야마토왜(大和倭)]], [[진구황후|진구황후(神功皇后)]] &lt;br /&gt;
|장소/공간=한반도 남부 지방, 일본 긴키내(近畿內) 지방&lt;br /&gt;
|사건=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류&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개념용어=[[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식민사관]], [[타율성이론]]&lt;br /&gt;
|물품/도구/유물=[[광개토대왕릉비]]&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서기 2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 경에는 12개의 소국들이 성립되었다. 이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 대가야국과 함안 안라국 중심의 이원체제로 분열된 채 신라와 백제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562년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lt;br /&gt;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훼손, 문구 조작 내용 첨가&amp;lt;br/&amp;gt;&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과 당시 상황과의 연계성 설명&amp;lt;br/&amp;gt;&lt;br /&gt;
-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에 의해 제기되고 유포된 시기 및 이유&amp;lt;br/&amp;gt;&lt;br /&gt;
- 일본교과서의 왜곡, 현재에도 외교적 문제 야기 상황 서술&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의 가야국에 대한 설명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서술하였으면.&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하지만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외관계는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를 &amp;quot;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amp;quot;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 역시, 기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며 훼손된 문자를 무엇이라고 가정할지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무엇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비석 내용의 주체는 고구려인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측면에서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 한편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왜가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4세기 경에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써 경영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lt;br /&gt;
&lt;br /&gt;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연구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나 필리핀 등 외국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발전하여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은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제목'''&lt;br /&gt;
**'''고대의 한일관계'''&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 왜(大和倭: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고,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가야와 야마토 왜, 그리고 백제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교역과 관련된 기구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고대 한일 관계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지 밝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반도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올바로 밝히려는 노력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외국 교과서에 비친 한국』, 2009.&lt;br /&gt;
**김정학,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3 임나]&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김태식,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257 가야]&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김태식,&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4 임나일본부설]&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A0%EB%8C%80%EC%9D%98_%ED%95%9C%EC%9D%BC%EA%B4%80%EA%B3%84&amp;diff=1119</id>
		<title>Draft 고대의 한일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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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27T00:36: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가야|가야(加耶)]], [[임나|임나(任那)]], [[야마토왜|야마토왜(大和倭)]], [[진구황후|진구황후(神功皇后)]] &lt;br /&gt;
|장소/공간=한반도 남부 지방, 일본 긴키내(近畿內) 지방&lt;br /&gt;
|사건=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류&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개념용어=[[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식민사관]], [[타율성이론]]&lt;br /&gt;
|물품/도구/유물=[[광개토대왕릉비]]&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서기 2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 경에는 12개의 소국들이 성립되었다. 이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 대가야국과 함안 안라국 중심의 이원체제로 분열된 채 신라와 백제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562년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lt;br /&gt;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훼손, 문구 조작 내용 첨가&amp;lt;br/&amp;gt;&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과 당시 상황과의 연계성 설명&amp;lt;br/&amp;gt;&lt;br /&gt;
-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에 의해 제기되고 유포된 시기 및 이유&amp;lt;br/&amp;gt;&lt;br /&gt;
- 일본교과서의 왜곡, 현재에도 외교적 문제 야기 상황 서술&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의 가야국에 대한 설명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서술하였으면.&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하지만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외관계는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를 &amp;quot;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amp;quot;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 역시, 기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며 훼손된 문자를 무엇이라고 가정할지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무엇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비석 내용의 주체는 고구려인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측면에서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 한편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왜가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4세기 경에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써 경영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lt;br /&gt;
&lt;br /&gt;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연구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나 필리핀 등 외국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발전하여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은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제목'''&lt;br /&gt;
**'''고대의 한일관계'''&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 왜(大和倭: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고,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가야와 야마토 왜, 그리고 백제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교역과 관련된 기구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고대 한일 관계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지 밝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반도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올바로 밝히려는 노력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외국 교과서에 비친 한국』, 2009.&lt;br /&gt;
**김정학,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3 임나]&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김태식,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257 가야]&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김태식,&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4 임나일본부설]&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A0%EB%8C%80%EC%9D%98_%ED%95%9C%EC%9D%BC%EA%B4%80%EA%B3%84&amp;diff=1095</id>
		<title>Draft 고대의 한일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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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18T05:48: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2차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집필자=주환석&lt;br /&gt;
|제목수정안=&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가야|가야(加耶)]], [[임나|임나(任那)]], [[야마토왜|야마토왜(大和倭)]], [[진구황후|진구황후(神功皇后)]] &lt;br /&gt;
|장소/공간=한반도 남부 지방, 일본 긴키내(近畿內) 지방&lt;br /&gt;
|사건=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류&lt;br /&gt;
|기록물=[[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개념용어=[[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론|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식민사관]], [[타율성이론]]&lt;br /&gt;
|물품/도구/유물=[[광개토대왕릉비]]&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서기 2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 경에는 12개의 소국들이 성립되었다. 이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 대가야국과 함안 안라국 중심의 이원체제로 분열된 채 신라와 백제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562년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lt;br /&gt;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훼손, 문구 조작 내용 첨가&amp;lt;br/&amp;gt;&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과 당시 상황과의 연계성 설명&amp;lt;br/&amp;gt;&lt;br /&gt;
-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에 의해 제기되고 유포된 시기 및 이유&amp;lt;br/&amp;gt;&lt;br /&gt;
- 일본교과서의 왜곡, 현재에도 외교적 문제 야기 상황 서술&amp;lt;br/&amp;gt;&lt;br /&gt;
- 첫 문단의 가야국에 대한 설명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서술하였으면.&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lt;br /&gt;
가야는 서기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하지만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외관계는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이란?===&lt;br /&gt;
&lt;br /&gt;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시기에는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를 &amp;quot;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amp;quot;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 역시, 기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며 훼손된 문자를 무엇이라고 가정할지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무엇보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비석 내용의 주체는 고구려인들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측면에서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 한편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왜가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4세기 경에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써 경영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lt;br /&gt;
&lt;br /&gt;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연구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호주나 필리핀 등 외국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발전하여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 조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 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긴키내(近畿內)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은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amp;lt;삼국사기(三國史記)&amp;gt;, &amp;lt;일본서기(日本書紀)&amp;gt;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 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 라는 명칭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amp;lt;일본서기&amp;gt;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amp;lt;일본서기&amp;gt;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mp;lt;일본서기&amp;gt;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lt;br /&gt;
&lt;br /&gt;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대의 가야와 야마토왜(大和倭) 사이의 관계는 제국주의 시대의 점령국과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일본은 가야가 멸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645년에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명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야인들은 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가야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lt;br /&gt;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가야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 왜(大和倭: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lt;br /&gt;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고,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lt;br /&gt;
&lt;br /&gt;
===임나일본부설의 현재===&lt;br /&gt;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다만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가야와 야마토 왜, 그리고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였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반도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올바로 밝히려는 노력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 『외국 교과서에 비친 한국』, 2009.&lt;br /&gt;
**김정학,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3 임나]&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김태식,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257 가야]&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김태식,&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4 임나일본부설]&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History_and_Culture_of_Korea_in_100_Topics&amp;diff=1076</id>
		<title>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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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18T04:27: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Project Management 문서로 넘겨주기&lt;/p&gt;
&lt;hr /&gt;
&lt;div&gt;#REDIRECT [[Project Management]]&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EB%8C%80%EB%AC%B8&amp;diff=1075</id>
		<title>대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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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18T04:24: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lt;br /&gt;
{{Clickable button|[[Project Management|진행현황]]}} &lt;br /&gt;
{{Clickable button|[[지도 리스트]]}} &lt;br /&gt;
{{Clickable button|[[History and Culture of Korea in 100 Topics]]}} &lt;br /&gt;
&lt;br /&gt;
==='''주제 Topics'''===&lt;br /&gt;
# [[한국사의 중요 흐름]] [[An Overview of Korean History]]&lt;br /&gt;
# [[한국에 대한 제논의]] [[Debates on Korea]]&lt;br /&gt;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 [[Understanding Korea through Culture]]&lt;br /&gt;
# [[한국의 중요 사건]] [[Key Events of Korea]]&lt;br /&gt;
# [[한국의 중요 인물]] [[Key Figures of Korea]]&lt;br /&gt;
# [[지도로 보는 한국]] [[Korea as Seen through Maps]]&lt;br /&gt;
&lt;br /&gt;
&lt;br /&gt;
==='''집필의 목적 및 배경'''===&lt;br /&gt;
&lt;br /&gt;
현재 한국에는 한국의 역사 문화를 소개하는,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시각만을 반영하거나, 텍스트 중심의 국문으로만 제작되어 있기도 하고, 근거자료가 미약한데도 재미만 추구하여 학교 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들이 많이 있다. 또한 번역 자료의 경우 한국어로 집필한 후, 이를 단순 번역함에 따라 한국학 및 한국문화에 대한 기초가 미약한 외국인들이 문화적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맥과 단어사용 등으로 한국역사문화에 입문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게 되는 제약요인들이 있다.&lt;br /&gt;
&lt;br /&gt;
본 연구에서는 국내외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 각각의 주제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집필하며, 풍부한 시각자료와 동영상 자료를 포함시킴으로써 기존 자료와는 차별된 한국역사문화 이야기 자료를 개발하고자 한다. 특히 국내 학교 및 교육현장만을 겨냥한 이야기 자료 개발이 아니라, 해외의 학교 및 교육현장에서 한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계인의 시각에서 고려된 주제 설정, 집필 방식, 자료 개발 등의 기법들을 충분히 검토하여 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본 연구는 책자 간행뿐만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도 개발하여 국내외의 학교 및 교양교육현장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한국역사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원고외의 시청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한국역사문화 이야기를 개발하고자 한다. 또한 해외에서 한국역사문화 교육을 위한 시청각 콘텐츠 확보가 어려운 상황(저작권 사용 허가 등의 문제)임을 고려하여, 이 연구를 통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저작권을 갖는 한국역사문화의 텍스트 및 시청각자료 콘텐츠를 확보함으로써 향후 국내외 학교, 출판사에서 학국학 교재 개발시 용이하게 활용될 수 있는 교육 자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자 한다.&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Gija:_The_Theory_behind_the_Origin_of_Korea%27s_Confucian_Culture&amp;diff=1052</id>
		<title>Draft Gija: The Theory behind the Origin of Korea's Confucian Culture</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Gija:_The_Theory_behind_the_Origin_of_Korea%27s_Confucian_Culture&amp;diff=1052"/>
				<updated>2017-09-13T02:57: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BasicInfo&lt;br /&gt;
|Title=Who Was Gija? Even Most Koreans Don't Know &lt;br /&gt;
|Author= Nam Jeongnan&lt;br /&gt;
|Actor= [[Dangun]], [[Gija]], [[Wiman]]&lt;br /&gt;
|Place= [[Pyeongyang]], [[Cheomseongdan Altar]], [[Yellow River Basin]]&lt;br /&gt;
|Event= [[The Founding of Gojoseon]], [[Mongol Invasion]]&lt;br /&gt;
|Record=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Great Commentaries to the Book of Document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ongs of Emperors and Kings]]&lt;br /&gt;
|Concept= [[Gojoseon]], [[Dangun Joseon]], [[Gija Joseon]]&lt;br /&gt;
|Object= [[dolmen]], [[slender daggers]], [[mandolin-shaped daggers]]&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lt;br /&gt;
The first nation to be established on the Korean peninsula was Gojoseon, founded in 2333 BCE.&lt;br /&gt;
&lt;br /&gt;
According to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Gojoseon was founded by Dangun, son of the Lord of Heaven, and flourished based on the iron culture until 194 BCE but fell to a man named Wiman from China who introduced the bronze culture to Korea. Wiman was defeated in an attack by the Han Dynasty in 108 BCE.  &lt;br /&gt;
&lt;br /&gt;
Hence, the first rulers of Gojoseon, the first Korean nation, were Dangun and Wiman. But a number of Chinese history books state that Gojoseon was founded by a man named Gija from the Shang Dynasty of China. Who is Gija and what do Koreans say about him? &lt;br /&gt;
&lt;br /&gt;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and the ''Analects'' of Confucius say Gija lived in the Shang Dynasty around 1000 BCE but make no mention of him going to the Korean peninsula. Gija is first described as the ruler of the Korean peninsula i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and Great Tradition of the Book of Documents, which were written after the third century BCE. &lt;br /&gt;
&lt;br /&gt;
From records written in the Goryeo Dynasty, it seems ancient Koreans were aware of a man named Gija but did not consider him important. Indeed, Gija did not loom large in the Korean consciousness until the 13th century, when two foreign invasions gave rise to a strong national awareness and reexamination of the history of Gojoseon. Confucian scholars considered Gija to be important as the man who brought Chinese culture to Korea, and hence as evidence that Korea's Confucian tradition is as old as that of China. &lt;br /&gt;
&lt;br /&gt;
In Korea today, however, neither Gija nor Gija Joseon are recognized as historical fact, considering the distance Gija would have had to travel and the dissimilarity between the bronze culture of China and Korea at the time. Whether Gija really came to Korea or not, some scholars argue that the story of Gija shows that Korean culture was greatly influenced by China.&lt;br /&gt;
&lt;br /&gt;
=='''1차 원고 수정'''==&lt;br /&gt;
&lt;br /&gt;
According to an old myth there was once a bronze-age tribal-confederation called Gojoseon (“Ancient Joseon”) somewhere on the Liaoning Peninsula and the northern Korean peninsula, founded by Dangun, grandson of the Lord of Heaven. The story is retold in the medieval collection of tales [[삼국유사|''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三國遺事, ''Samguk yusa'')]], written by the Buddhist master Iryeon. Early 20th century cultural nationalists declared it to be “the original Korean nation.”&lt;br /&gt;
&lt;br /&gt;
But some of Chinese history books state that Gojoseon was established by a man named Gija from China. Who is Gija and what do Koreans say about him? &lt;br /&gt;
&lt;br /&gt;
Very ancient Chinese records, such as ''Book of Documents'' and the ''Analects'' (論語, ''Lunyu'') of Confucius say Gija lived in the Shang Dynasty around 1000 BCE but make no mention of him going to the Korean peninsula. Gija is first described as the ruler of the Korean peninsula i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and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amp;lt;del&amp;gt;Great Tradition of the Book of Documents&amp;lt;/del&amp;gt;&amp;lt;/font&amp;gt; [[상서대전|''&amp;lt;font color=&amp;quot;blue&amp;quot;&amp;gt;Great Commentaries to the Book of Documents&amp;lt;/font&amp;gt;'' (尙書大傳, ''Shangshu dachuan'')]], which were written after the third century BCE. &lt;br /&gt;
&lt;br /&gt;
Gija is included in Korean history beginning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and from other records written in the Goryeo Dynasty it seems that ancient Koreans were aware of a ruler named Gija but did not consider him important. Indeed, Gija did not loom large in the Korean consciousness until the 13th Century, when two foreign invasions gave rise to a strong national awareness and reexamination of the tales of Gojoseon. Confucian scholars considered Gija to be important as the man who brought Chinese culture to Korea, and hence as evidence that Korea's Confucian tradition is almost as old as that of China. &lt;br /&gt;
&lt;br /&gt;
In Korea today, however, neither Gija nor Gija Joseon are recognized as historical fact, considering the distance Gija would have had to travel and the dissimilarity between the bronze culture of China and Korea at the time. &amp;lt;font color=&amp;quot;blue&amp;quot;&amp;gt;Regardless of whether Gija really came to Korea or not, the story of Gija demonstrates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Korean Confucianism's origin and speaks to the influence of  Confucianism on ancient Korean civilization.&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감수본'''==&lt;br /&gt;
According to an old myth there was once a bronze-age tribal-confederation called Gojoseon (“Ancient Joseon”) somewhere on the Liaoning Peninsula and the northern Korean peninsula, founded by Dangun, grandson of the Lord of Heaven. The story is retold in the medieval collection of tales [[삼국유사|''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三國遺事, ''Samguk yusa'')]], written by the Buddhist master Iryeon. Early 20th century cultural nationalists declared it to be “the original Korean nation,” and made numerological calculations to set its foundation in 2333 BCE.&lt;br /&gt;
&lt;br /&gt;
This Gojoseon proto-state flourished until 194 BCE, but then fell to a noble warrior named Wiman from the Han Dynasty who introduced iron-age culture to Korea. King Ugeo, grandson of Wiman, was defeated in an attack by the Han Dynasty in 108 BCE.&lt;br /&gt;
&lt;br /&gt;
Hence, the first rulers of the first Korean proto-state were lines of chieftains descended from Dangun and Wiman. But a number of Chinese history books including [[사기|''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史記, ''Shiji'')]] state that Gojoseon was conquered by a man named Gija from China. Who is Gija and what do Koreans say about him? &lt;br /&gt;
&lt;br /&gt;
Very ancient Chinese records say that as the Zhou Dynasty was founded in 1046 BCE a Shang nobleman called Gija survived, but make no mention of him going to the Korean peninsula. Gija is first described as the ruler of the Korean peninsula in Han Dynasty histories.&lt;br /&gt;
&lt;br /&gt;
Gija is included in that myth beginning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and from other records written in the Goryeo Dynasty it seems that ancient Koreans were aware of a ruler named Gija but did not consider him important. Indeed, Gija did not loom large in the Korean consciousness until the 13th Century, when two foreign invasions gave rise to a strong national awareness and reexamination of the tales of Gojoseon. Confucian scholars considered Gija to be important as the man who brought Chinese culture to Korea, and hence as evidence that Korea's Confucian tradition is almost as old as that of China. &lt;br /&gt;
&lt;br /&gt;
In Korea today, however, neither Gija nor “''Gija Joseon''” are recognized as historical fact, considering the distance Gija would have had to travel and the dissimilarity between the bronze-age culture of China and Korea at the time. Whether Gija really came to Korea or not, some scholars argue that the story of Gija shows that Korean culture was greatly influenced by China.&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C%9E%90:_%ED%95%9C%EA%B5%AD_%EC%9C%A0%EA%B5%90_%EB%AC%B8%EB%AA%85%EC%9D%98_%EA%B8%B0%EC%9B%90%EB%A1%A0&amp;diff=1034</id>
		<title>Draf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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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13T02:31: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 2차 교열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한국인은 기자를 모른다&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기자]], [[위만]]&lt;br /&gt;
|장소/공간=[[평양]], [[황하 유역]], [[강화도 첨성단]]&lt;br /&gt;
|사건=[[고조선 건국]], [[몽골의 침략]]&lt;br /&gt;
|기록물=[[삼국유사]], [[상서대전]], [[사기]], [[제왕운기]]&lt;br /&gt;
|개념용어=[[고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lt;br /&gt;
|물품/도구/유물=[[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고인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이다. 한반도에는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선’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도 부른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일부 국가에서는 한반도의 기원을 서술할 때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에 따르면 ‘기자’는 기원전 1000년 전후에 중국 은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은나라에 충언을 하다가 폭군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서에는 ‘기자’가 한반도로 옮겨갔다는 내용은 없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책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다른 책에서는 기자가 무왕을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아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의 고대인들도 ‘기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의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며 고조선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 단군과 기자를 함께 찬양하고 있는데 『제왕운기』의 역사관은 조선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기자’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며, ‘기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고조선을 설명할 때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쓴 부분은 제외해도 괜찮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본 글의 제목 ‘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를 수정가능하다면, 어떤 제목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amp;lt;br/&amp;gt;&lt;br /&gt;
→ 유학은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이 경전에 근거한 후세 학자들의 체계적인 학문이고, 공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에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단군의 나라 고조선===&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자===&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은나라의 현자 기자===&lt;br /&gt;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에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고, 외국인들 중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기자===&lt;br /&gt;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lt;br /&gt;
&lt;br /&gt;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노태돈,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388 기자동래설]&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C%9E%90:_%ED%95%9C%EA%B5%AD_%EC%9C%A0%EA%B5%90_%EB%AC%B8%EB%AA%85%EC%9D%98_%EA%B8%B0%EC%9B%90%EB%A1%A0&amp;diff=1033</id>
		<title>Draf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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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9-13T02:24: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lt;br /&gt;
|집필자=남정란&lt;br /&gt;
|제목수정안=한국인은 기자를 모른다&lt;br /&gt;
|교열자=유안리&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기자]], [[위만]]&lt;br /&gt;
|장소/공간=[[평양]], [[황하 유역]], [[강화도 첨성단]]&lt;br /&gt;
|사건=[[고조선 건국]], [[몽골의 침략]]&lt;br /&gt;
|기록물=[[삼국유사]], [[상서대전]], [[사기]], [[제왕운기]]&lt;br /&gt;
|개념용어=[[고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lt;br /&gt;
|물품/도구/유물=[[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고인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차 원고'''==&lt;br /&gt;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이다. 한반도에는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선’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도 부른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일부 국가에서는 한반도의 기원을 서술할 때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에 따르면 ‘기자’는 기원전 1000년 전후에 중국 은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은나라에 충언을 하다가 폭군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서에는 ‘기자’가 한반도로 옮겨갔다는 내용은 없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책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다른 책에서는 기자가 무왕을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아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의 고대인들도 ‘기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의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며 고조선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 단군과 기자를 함께 찬양하고 있는데 『제왕운기』의 역사관은 조선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기자’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며, ‘기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고조선을 설명할 때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쓴 부분은 제외해도 괜찮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본 글의 제목 ‘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를 수정가능하다면, 어떤 제목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amp;lt;br/&amp;gt;&lt;br /&gt;
→ 유학은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이 경전에 근거한 후세 학자들의 체계적인 학문이고, 공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에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수정 원고'''==&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단군의 나라 고조선===&lt;br /&gt;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lt;br /&gt;
&lt;br /&gt;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자===&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lt;br /&gt;
&lt;br /&gt;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lt;br /&gt;
=='''2차 교열본'''==&lt;br /&gt;
===은나라의 현자 기자===&lt;br /&gt;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에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고, 외국인들 중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lt;br /&gt;
&lt;br /&gt;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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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기자===&lt;br /&gt;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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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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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lt;br /&gt;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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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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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lt;br /&gt;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lt;br /&gt;
**노태돈, &amp;quot;[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388 기자동래설]&amp;quot;, &amp;lt;html&amp;gt;&amp;lt;online style=&amp;quot;color:purple&amp;quot;&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sup&amp;gt;online&amp;lt;/sup&amp;gt;&amp;lt;/online&amp;gt;&amp;lt;/html&amp;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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