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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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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aft 김대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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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41: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넬슨 만델라, 박정희, 김동운, 김종필,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계엄사령부, 김영삼, 신군부,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의 정부, 김정일 &lt;br /&gt;
|장소/공간= 명동성당, 한반도 &lt;br /&gt;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10.26,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IMF 관리 체제, 베를린 선언, 6·15남북공동성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인동초, 향토예비군, 4대국 안전보장안, 긴급조치 9호, 10월 유신, 햇볕 정책,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노벨평화상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기어이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해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데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중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 김대중의 정치 노선에 대한 설명 있음. 대통령으로서 정책 수행의 주요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만큼의 분량 여유 없음.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의의는 만델라처럼 인동초 같은 삶을 살아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햇볕정책 시도라고 봄. 그 외의 업적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에 구체적으로 소개할 만큼은 아니라고 봄&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인터넷 &amp;lt;다음백과&amp;gt;&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김대중’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다음백과)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김대중의 정치노선에 대해 설명하고, 대통령으로서 정책 수행의 주요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면 좋겠다. 대통령 당선 이전 야당 대표로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중요인물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시한 과감한 경제 개혁 착수는 어떤 것이며, IMF 관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 조정 및 대외 개방, 금융 개혁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햇볕정책, ‘베를린선언’, 6.15남북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서술해 줄 것&amp;lt;br/&amp;gt;&lt;br /&gt;
- 김대중 대통령 시기 정책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가 나타난 배경에 대해서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설명하 것 : 외환 위기 극복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진 이유와 노동 조건이 악화된 배경 등&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B1%EB%82%A8%EC%A4%80&amp;diff=550</id>
		<title>Draft 백남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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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4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존 케이지, 플럭서스, 요한 바오로 6세, 샬럿 무어만&lt;br /&gt;
|장소/공간=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뮌헨대학교,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카페 오 고고, 뉴욕 WNET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 베니스 비엔날레, 바젤 국제 아트 페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lt;br /&gt;
|사건= 서울아시안게임, 서울 올림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비디오 아트,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아방가르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포타팩,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오페라 섹스트로닉,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새롭게 만들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무렵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lt;br /&gt;
 &lt;br /&gt;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 무렵 비디오 매체에서 음악과 시각을 결합해 다양한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lt;br /&gt;
 &lt;br /&gt;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된 것이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lt;br /&gt;
 &lt;br /&gt;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김영은, &amp;lt;미술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나의사랑 백남준』(구보타시게코, 남정호 옮김, 이순, 2010)&lt;br /&gt;
* 『백남준의 귀환(백남준총서2)』(백남준아트센터총체미디어연구소, 백남준아트센터 2010)&lt;br /&gt;
*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이용우, 열음사, 2000)&lt;br /&gt;
* 『백남준의세계』(삼성미술관·솔로몬R·구겐하임미술관, 삼성미술관, 2000)&lt;br /&gt;
* 『정보예술 Info ART』(김홍희 신 시아굿맨, 삼신각 1995)&lt;br /&gt;
*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국립현대미술관, Editions API, 199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백남준’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김영은, &amp;lt;미술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였나요? 아니면 어떤 주제를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나요?&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98%EA%B8%B0&amp;diff=549</id>
		<title>Draft 김환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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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39: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킨 화가, 김환기  &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 신사실파, 모더니스트, 대한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 미래파, 김광섭 &lt;br /&gt;
|장소/공간= 아마기화랑, 홍익대학교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서양화가, 구성주의 계열, 추상 미술 운동, 자유전, 신미술 운동, 모더니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 점화, 마티에르, 수묵, 한국일보 대상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농담의 변화, 발묵 효과, 저녁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서양화가로서 20세기 한국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구성주의 계열의 추상 미술을 한국에 들여온 초기 모더니스트이다.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이며 전통적인 한국의 미에 서구 모더니즘을 결합한 화가이다. 또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함께 갖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1933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에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어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고 아마기화랑(天城畫廊)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신미술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서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65년 브라질에서 열린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국제 미술의 주류로 발전하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다른 활동으로 작품 활동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작품 창작에 집중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다. 그후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의 작품 경향은 일본 유학 시기(1930년대~1940년대 초반), 해방 후부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1945~1963), 미국 뉴욕에 있던 시기(1964~1974) 등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유학 중이던 제1기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 등이 현재 남아 있는데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부터 파리를 다녀와 뉴욕으로 가기까지의 시기인 제2기에는 한국적 소재를 담은 작품을 주로 그렸다. 이 시기에는 달과 산, 구름과 학, 나목(裸木) 등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 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던 3년 동안 이런 주제들이 더욱 함축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우거나 극히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산과 나목,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 ‘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의 대표 작품들이다.&lt;br /&gt;
 &lt;br /&gt;
미국 뉴욕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약 10년에 걸친 시기인 제3기에는 지금까지의 경향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화를 그렸고, 이전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 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lt;br /&gt;
 &lt;br /&gt;
뉴욕 시기 김환기의 점화는 색조의 미묘한 변조와 농담의 변화, 발묵 효과와 같은 번짐 효과 등을 통해 미국의 미술 세계와는 다른 동양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우주적 공간의 이미지를 담은 추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세로 236㎝, 가로 172㎝. 개인 소장)’는 김환기의 1970년대 점화의 대표작이다. 점화는 화면 전체에 점을 찍고 그 점 하나 하나를 여러 차례 둘러싸가는 동안 색이 중첩되고 번져나가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체 화면을 메꾸어 만든 그림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먹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의 작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찍어나간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작품의 제목은,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라고 이어지는 시인 김광섭(金珖燮)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1971년부터 1972년까지 가로 2m, 세로 3m 정도 크기의 대작 점화를 여러 점 그렸다. 김환기의 일기에는 자신의 점화에 대해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쓰여 있다.&lt;br /&gt;
 &lt;br /&gt;
● 김환기를 김환기로 이름나게 한 것은 3기의 작품임. 뒷부분은 3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에 대한 소개임. 3기만 길게 소개한 것이 아님.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오광수, 열화당, 1979)&lt;br /&gt;
* 『한국현대화가십인(韓國現代畫家十人)』(오광수, 열화당, 1976)&lt;br /&gt;
* 『김환기화집(金煥基畫集)』(국립현대미술관, 1975)&lt;br /&gt;
*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열음사, 1980)&lt;br /&gt;
* 『김환기』한국의 미술가(삼성문화재단, 1997)&lt;br /&gt;
*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김향안, 우석, 1989)&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우리나라 추상 화가의 선구자인 ‘김환기’ 작품의 특징과 작품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글의 구성과 내용이 필요하다.    &lt;br /&gt;
‘김환기’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미국으로 가서 활동한 이유가 있나?&amp;lt;br/&amp;gt;&lt;br /&gt;
- 김환기 작품의 세 시기에 대해 제3기에 많이 치중하여 설명하였다. 각 시기를 균형있게 설명했으면. 특히 3기에 치중한 이유가 있나?&amp;lt;br/&amp;gt;&lt;br /&gt;
- 원고에 설명된 작품은 사진자료로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6%90%EA%B8%B0%EC%A0%95&amp;diff=548</id>
		<title>Draft 손기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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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38: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동아일보사, 양정고등보통학교, 남승룡, 자발라, 하퍼, 타미라&lt;br /&gt;
|장소/공간= 베를린, 신의주, 만주 안동현, 도쿄, 경성,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 &lt;br /&gt;
|사건= 베를린올림픽, 안의육상경기대회, 경영 마라톤대회, 메이지신궁대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장기말소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소련, 일장기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lt;br /&gt;
 &lt;br /&gt;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야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lt;br /&gt;
 &lt;br /&gt;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lt;br /&gt;
 &lt;br /&gt;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amp;quot;서두르지 말라&amp;quot;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amp;quot;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amp;quot;라고 대답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lt;br /&gt;
 &lt;br /&gt;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당시 손기정은 우승 기념으로 고대 청동 투구를 받았다. 높이 21.5㎝의 이 투구는 기원전 6세기 쯤 고대 그리스 투사들이 마상 경기 때 사용했던 것으로 1875년 그리스 제우스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투구는 올림픽 당시에 손기정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그동안 독일 올림픽 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1986년에 그리스의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 투구가 민족의 것이라고 판단하여 1994년에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현재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 해방 이후의 손기정의 업적은 모두 올림픽 우승에 힘입은 것이므로 별 의미가 없다고 봄.&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 황대진 기자, 조선일보 2015.07.14. (기사명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정찬모, 1996)&lt;br /&gt;
* 대한유상경기연맹 기록(1945∼2002)&lt;br /&gt;
* 베를린올림픽대회 관련 자료&lt;br /&gt;
* 강형구(손기정 특별전시회 자료 수집가) 면담록&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손기정’의 원고 출처가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조선일보 기사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해방 이후 손기정이 한국 마라톤계에서의 업적은 없나? 2002년 사망했는데 1936년도 올림픽 내용만을 쓴 것이 아쉽다.&amp;lt;br/&amp;gt;&lt;br /&gt;
- 손기정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 부상품으로 받은 청동투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을 사진과 일장기 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 사진과 함께 설명하면 시각적 효과가 있어 의미가 있을 듯하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A%B5%AC&amp;diff=547</id>
		<title>Draft 김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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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37: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 김구&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임시 정부, 동학 교도, 일본군 중위 쓰치다, 고종 황제, 안악 양산학교, 재령 보강학교, 이동녕, 이시영,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학도병, 이승만, 미군정, 유엔 총회, 김규식, 김일성,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안두희 &lt;br /&gt;
|장소/공간= 안악 치하포, 해주, 상하이, 충칭, 시안, 푸양, 모스크바, 소련&lt;br /&gt;
|사건=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을사조약, 3·1운동,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진주만 기습, 8.15 광복, 남북 분단, 5 ‧ 10총선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일제강점기, 한학, 조선 왕조, 과거 시험, 신탁 통치, 단독 정부&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호는 ‘백범’인데,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자를 따서 미천한 사람부터 평범한 사람까지 누구나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lt;br /&gt;
 &lt;br /&gt;
을미사변에 충격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가 성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김구는 자신의 저서 &amp;lt;백범일지&amp;gt;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도 썼다. 이로써 독립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과 강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해방 전 임시 정부는 외국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김구는 그해 12월 하순부터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2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lt;br /&gt;
 &lt;br /&gt;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lt;br /&gt;
 &lt;br /&gt;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 ‧ 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김구는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 &lt;br /&gt;
&lt;br /&gt;
● 김구에 대한 평가가 일관적이지 않아서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봄&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 기파랑, 2013.&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백범연구』 제1·2집(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편, 교문사, 1985·1986)&lt;br /&gt;
*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백범전기편찬위원회, 교문사, 1984)&lt;br /&gt;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lt;br /&gt;
* 『백범어록』(백범사상연구소, 사상사, 1973)&lt;br /&gt;
* 『위대한 한국인』백범 김구(선우진, 태극출판사, 1972)&lt;br /&gt;
* 『백범주석최근언론집』(엄항섭 편, 1948)&lt;br /&gt;
* 『백범일지』(김구, 국사원, 1947)&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구’의 원고 출처가 “이영훈,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 기파랑, 2013”,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김구의 『백범일지』와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나의 소원’에 서술된 &amp;lt;민족국가&amp;gt;, &amp;lt;정치이념&amp;gt;, &amp;lt;내가 원하는 우리나라&amp;gt;의 세 편의 글은 김구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설명하면 좋겠다.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는 문구도 제시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서술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김구가 한국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맨 마지막 문단에 정리하여 서술하였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5%88%EC%A4%91%EA%B7%BC&amp;diff=546</id>
		<title>Draft 안중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5%88%EC%A4%91%EA%B7%BC&amp;diff=546"/>
				<updated>2017-07-31T08:36: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안중근&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토 히로부미]], [[고종]], 삼흥학교, 돈의학교, 황병길, 동의회, 단지회, 이완용, 을사5적, 코코프체프, 관동도독부, 마나베, 미즈노&lt;br /&gt;
|장소/공간= 하얼빈, 진남포,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둥 반도, 뤼순 항&lt;br /&gt;
|사건=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한일신협약, 러일 전쟁,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정미7조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대한제국, 통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거사는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의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렀다. &lt;br /&gt;
&lt;br /&gt;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lt;br /&gt;
&lt;br /&gt;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 감정적인 서술은 피하라고 처음에 지침이 있었음.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심산유고(心山遺稿)』&lt;br /&gt;
*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숭모회, 1970)&lt;br /&gt;
*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안중근자필본, 1910)&lt;br /&gt;
*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lt;br /&gt;
* 「안중근공판기록」&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안중근’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인터넷 다음백과”의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가계에 대해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안중근의 묘지는 아직도 뤼순감옥 근처에 있으며, 이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한국으로의 이장에 관한 한국인의 과제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안중근의 유서와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를 서술하면서 안중근과 당시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안중근에 대해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4%EB%8F%99%EC%A3%BC&amp;diff=545</id>
		<title>Draft 윤동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4%EB%8F%99%EC%A3%BC&amp;diff=545"/>
				<updated>2017-07-31T08:34: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교, 조선일보, 경향신문,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송몽규, 이양하, 정병욱&lt;br /&gt;
|장소/공간= 후쿠오카 형무소 &lt;br /&gt;
|사건=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참회록, 생체 실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참회록’ 시의 전문이다.&lt;br /&gt;
&lt;br /&gt;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lt;br /&gt;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lt;br /&gt;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lt;br /&gt;
이다지도 욕될까.&lt;br /&gt;
&lt;br /&gt;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lt;br /&gt;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lt;br /&gt;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lt;br /&gt;
&lt;br /&gt;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lt;br /&gt;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lt;br /&gt;
─ 그때 그 젊은 나이에&lt;br /&gt;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lt;br /&gt;
&lt;br /&gt;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lt;br /&gt;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lt;br /&gt;
&lt;br /&gt;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lt;br /&gt;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lt;br /&gt;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lt;br /&gt;
&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amp;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amp;gt;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amp;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amp;gt;(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윤동주 시의 문학사적 의의」(김용직, 『나라사랑』 23, 1976)&lt;br /&gt;
* 「윤동주론의 행방」(김윤식, 『심상』, 1975.2.)&lt;br /&gt;
* 「선백의 생애」(윤일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74)&lt;br /&gt;
*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김종길, 『진실과 언어』, 일지사, 1974)&lt;br /&gt;
* 「윤동주론」(김흥규, 『창작과 비평』 33, 1974. 가을.)&lt;br /&gt;
* 「윤동주론」(김열규, 『국어국문학』 27, 196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윤동주’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인터넷 다음백과”의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윤동주의 출생한 지역과 가정 환경에 대해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1935년부터 사망하는 1944년까지의 식민지 상황을 본 원고에서 적고 있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치안유지법 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 &lt;br /&gt;
-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상황, 송몽규와의 대화 내용, 당시의 활동 등에 대해 서술하면 시인인 윤동주를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8D%EB%8F%84,_%EC%8B%A0%EC%9C%A4%EB%B3%B5&amp;diff=544</id>
		<title>Draft 김홍도, 신윤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8D%EB%8F%84,_%EC%8B%A0%EC%9C%A4%EB%B3%B5&amp;diff=544"/>
				<updated>2017-07-31T08:33: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단원, 혜원, 도화서, 화원, 문인화가, 강세황, 영조, 왕세손, 정조, 김응환, 정선, 한량과 기녀&lt;br /&gt;
|장소/공간= 충청도 연풍,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풍속화, 근대 명수, 금세의 신필, 어진, 익선관본, 원유관본, 정형 산수, 진경산수, 단원법, 현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lt;br /&gt;
&lt;br /&gt;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amp;lt;금강전도&amp;gt;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그의 화풍은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 정형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는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lt;br /&gt;
&lt;br /&gt;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amp;lt;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amp;gt;을 비롯해서 &amp;lt;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amp;gt;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신윤복도 산수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amp;lt;풍속화첩&amp;gt;이 있다. &amp;lt;풍속화첩&amp;gt;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韓國)의 미(美)』 21-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정양모 감수, 중앙일보사, 1985)&lt;br /&gt;
* 『한국회화사(韓國繪畫史)』(안휘준, 일지사, 1980)&lt;br /&gt;
*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lt;br /&gt;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畫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lt;br /&gt;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생애와 예술」(홍선표, 『학원』296, 1984.7.)&lt;br /&gt;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재세연대고(在世年代攷)」(최순우, 『미술자료』11, 국립중앙박물관, 1966)&lt;br /&gt;
* 『한국회화(韓國繪畵)의 전통(傳統)』(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lt;br /&gt;
* 『한국(韓國)의 미(美) 19 -풍속화(風俗畵)-』(안휘준 감수, 중앙일보사, 1985)&lt;br /&gt;
*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안휘준, 일지사, 1980)&lt;br /&gt;
* 『우리나라의 옛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lt;br /&gt;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홍도와 신윤복’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단원 김홍도(金弘道↔檀園,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amp;lt;br/&amp;gt;&lt;br /&gt;
-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 김응환에 대해 설명할 것.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amp;lt;br/&amp;gt;&lt;br /&gt;
- 김홍도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조선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을 그려 당시 생활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대표적인 화가라고 알고 있다. 씨름도, 서당 등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풍속화에 대해서도 서술하였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제목은 김홍도와 신윤복인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에 대한 분량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균형을 맞추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여져 있는 작품들은 사진자료로 제시하였으면 한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C%A1%B0&amp;diff=543</id>
		<title>Draft 정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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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31: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정조&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장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효장세자, 노론, 규장각, 홍국영, 숙위소, 시파, 벽파, 남인, 소론, 실학자, 장용영, 순조, 영조, 예순대비&lt;br /&gt;
|장소/공간= 화성, 수원, 화산, 화성행궁, 현륭원&lt;br /&gt;
|사건= 임오화변, 화성 건설, 을묘원행&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세손, 책봉, 뒤주, 연좌제, 대리 청정, 붕당, 탕평 정치, 도승지, 외척, 사대 사상, ‘진경산수’, ‘동국진체’, 양반, 중인, 평민, ‘진경 시대’, 상왕, 수렴청정&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당시 조정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조 때 시작된 외척 중심의 노론은 벽파가 되고 정조의 편을 들었던 남인과 소론, 노론 일부는 시파로 뭉쳤던 것이다. 정조가 주로 등용한 사람은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었다. 당파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해서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적인 통치 이념에 맞는 사람들을 찾다보니 시파 중심이 되었다. 이때 벽파는 때가 오기만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였던 예순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예순대비는 정조 치하에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벽파와 함께 정조의 개혁을 모두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영조실록(英祖實錄)』&lt;br /&gt;
* 『정조실록(正祖實錄)』&lt;br /&gt;
* 『일성록(日省錄)』 &lt;br /&gt;
*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푸른역사, 1998)&lt;br /&gt;
* 『진경시대』(최완수 외, 돌베게, 1998)&lt;br /&gt;
* 『꿈의 문화유산 화성』(유봉학, 신구문화사, 1996)&lt;br /&gt;
* 「정조의 『교화사상」(정옥자, 『규장각』19, 1996)&lt;br /&gt;
* 「정조의 초계문신교육과 문체정책」(정옥자, 『규장각』6, 1982)&lt;br /&gt;
* 「정조의 학예사상」(정옥자, 『한국학보』11, 1978)&lt;br /&gt;
*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정형우, 『동방학지』11, 197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정조’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임금(생몰연대, 즉위년도)&amp;lt;br/&amp;gt;&lt;br /&gt;
- 르네상스보다 문예부흥 등으로 말을 바꾸었으면.&amp;lt;br/&amp;gt;&lt;br /&gt;
- 영조, 효장세자,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와의 가계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조선 후기 당쟁과 영정조의 탕평노력에 대해 서술&amp;lt;br/&amp;gt;&lt;br /&gt;
- 정조의 탕평의지와 탕평을 이룰 수 있는 기반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된 기관, 행사라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 개혁 정리&amp;lt;br/&amp;gt;&lt;br /&gt;
- 정조에 대한 학계의 평가&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D%99%A9&amp;diff=542</id>
		<title>Draft 이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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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30: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퇴계 이황&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성균관, 안향, 주세붕, 명종, 선조, 기대승,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몬학파, 구마모토학파&lt;br /&gt;
|장소/공간= 풍기, 백운동 서원, 백록동 서원, 소수서원, 도산서당&lt;br /&gt;
|사건= [[임진왜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주자학, 문과 과거, 사액서원, 예조판서, 대제학, 지경연, 이조판서, 향약, &amp;lt;주자서 절요&amp;gt;, &amp;lt;자성록&amp;gt;, 사단칠정, ‘무진육조소’,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amp;lt;성학십도&amp;gt;, 성학(聖學), 대간, 주리파 철학, 에도시대, 개화기, 도의철학&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20여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덕성을 쌓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amp;lt;주자서 절요&amp;gt; 및 &amp;lt;자성록&amp;gt;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고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amp;lt;성학십도&amp;gt;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이 집약체로 볼 수 있는 &amp;lt;성학십도&amp;gt;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300명에 가까운 학자가 그의 학풍을 따랐고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존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 여러 왕들이 관직을 청했지만 사양한 이유는 썼음&lt;br /&gt;
* 이황 학문의 특징, 주리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 불가능함&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도산전서(陶山全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lt;br /&gt;
*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김형효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lt;br /&gt;
* 『퇴계학 연구논총』(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7)&lt;br /&gt;
* 「퇴계선생의 인성론」(배종호, 『퇴계학보』32, 퇴계학연구원, 1981)&lt;br /&gt;
* 「퇴계철학의 근본문제」(유승국, 『퇴계학보』19, 퇴계학연구원, 1978)&lt;br /&gt;
* 「퇴계의 경사상」(이남영, 『한국인의 인간관』, 한국교육개발원, 1977)&lt;br /&gt;
* 「퇴계선생과 기고봉」(이을호,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72)&lt;br /&gt;
* 「이퇴계와 그의 학설」(이병도, 『한국학연구총서』, 성진문화사, 1971)&lt;br /&gt;
* 「이황-성리학의 진수-」(박종홍,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퇴계 이황’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도입 서술&amp;lt;br/&amp;gt;&lt;br /&gt;
- 여러 왕들이 관직을 청했지만 사양한 이유는?&amp;lt;br/&amp;gt;&lt;br /&gt;
- 이황 학문의 특징, 주리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B%A0%EC%82%AC%EC%9E%84%EB%8B%B9&amp;diff=541</id>
		<title>Draft 신사임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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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28: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 신사임당&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증좌한성 이원수, 율곡 이이, 신명화, 이사온, 안견 &lt;br /&gt;
|장소/공간= 강릉&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시대, 양반, 당호, 유교적 여성상, 진사,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포도도,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 요안조압도, 초서 병풍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 · 그림 · 글씨에 뛰어났던 조선 시대 여성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이름이 아닌 당호이다. 당호는 그 사람이 머무는 집의 이름으로 이름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지체 있거나 양반의 부녀자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여 당호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남편은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가 그녀의 아들이다. 사임당은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과 가정을 이끌었던 능동적인 여성이었고 자식들에게도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던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사임당은 자녀들을 지도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공부하여 이해한 다음에 가르쳤고 자식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현숙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사임당은 조선 사회가 요구한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처럼 여겨 결혼한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그래서 사임당도 외가에서 자라났다. 19세에 결혼한 사임당은 처음에는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사임당은 이따금 강릉의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친정에서 낳았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7세에 이미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배웠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 등은 그녀가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외할아버지의 예술과 학문 세계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어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 고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는 그녀가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깊고 절절한 애정을 가졌는가를 보여주고 어머니가 사임당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다음은 1537년 사임당이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 대관령 고개에서  멀리 있는 친정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의 전문이다. &lt;br /&gt;
&lt;br /&gt;
慈親鶴髮在臨瀛(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lt;br /&gt;
身向長安獨去情(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lt;br /&gt;
回首北村時一望(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lt;br /&gt;
白雲飛下暮山靑(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매화 · 난초 · 산수, 물고기나 새 등을 주된 화제(畫題)로 삼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 ‘포도도’는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아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이 담긴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있는데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자랑했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평소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하여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없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실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실제로 그녀는 잎사귀와 줄기의 느낌 하나하나, 벌레의 다리 끝까지도 꼼꼼하게 그려냈고, 그림 속 물체의 색과 재질까지 특성에 맞게 잘 표현했다. 사임당의 그림은 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볕에 말리려 하자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닭이 쪼아서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도 전한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5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가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여기에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 병풍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신사임당은 현재까지도 현모양처, 훌륭한 여성 작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한국은행에서는 “여성·문화예술인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라며 신사임당을 5만 원 권 도안 인물로 선정하였다. 5만 원 권은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지폐 가운데 가장 고액권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율곡전서(栗谷全書)』&lt;br /&gt;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lt;br /&gt;
* 『신사임당의 생애와 교육』(손인수, 박영사, 1976)&lt;br /&gt;
* 『한국회회소사』(이동주, 서문당, 1972)&lt;br /&gt;
*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은상, 성문각, 1957)&lt;br /&gt;
* 『신사임당』(이병기, 조선명인전, 조광사, 1947)&lt;br /&gt;
* 「신사임당」(이은상,『한국의 인간상』5, 신구문화사, 198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신사임당’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인터넷 다음백과”의 구체적인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현재 한국 지폐 중 5만원권의 주인공이라고 알려주면 어떨까? 5만원권 주인공으로 선정된 이유도 찾아서 서술하면 흥미롭겠다.&amp;lt;br/&amp;gt;&lt;br /&gt;
- 신사임당의 명칭을 설명할 때 ‘조선시대에는 여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당호를 썼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사임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해 이견들이 있으나 엄연히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당호는 여성이 이름 대신 사용했던 별호가 아니다. 여유당 정약처럼 남자도 당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amp;lt;br/&amp;gt;&lt;br /&gt;
- 신사임당의 시 중 주요 싯구를 본문에 적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주요 작품 사진을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E%A5%EC%98%81%EC%8B%A4&amp;diff=540</id>
		<title>Draft 장영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E%A5%EC%98%81%EC%8B%A4&amp;diff=540"/>
				<updated>2017-07-31T08:27: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세종, 이천, 김조 &lt;br /&gt;
|장소/공간= 동래현, 경복궁, 천추전, 흠경각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관노, 양인, 상의원별좌, 세종실록, 천문 관측 의기, 간의,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대호군, 옥루, 시(時) · 경(更) · 점(點), 갑인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린 날에도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amp;lt;세종실록&amp;gt;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lt;br /&gt;
&lt;br /&gt;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lt;br /&gt;
&lt;br /&gt;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 &lt;br /&gt;
&lt;br /&gt;
● 측우기를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음.&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장영실’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세종이 장영실에게 천문기기를 연구하도록 한 이유를 설명할 것, 물시계, 간의, 혼천의, 해시계 등을 만든 이유를 당시 농사와 백성들의 삶과 연결하여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자격루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독자들이 그 모습이 상상하면서 흥미로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격루와 옥루의 모습 중 하나만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를 고루라면 자격루가 더 유명하니 자격루를 설명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시계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갑인자라는 인쇄 기술은 인쇄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던 활자로 그 의미를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측우기에 대한 설명은 없네요. 중요한 발명품인데. 설명해주세요.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B%8F%84%EC%A0%84&amp;diff=539</id>
		<title>Draft 정도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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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25: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정도전&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동북면도지휘사, 조민수, 이방원, 정총, 이방석&lt;br /&gt;
|장소/공간= 명륜당,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 함주 막사, 경복궁, 랴오둥  &lt;br /&gt;
|사건= 위화도 회군, 제1차 왕자의 난&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문신, 개국 공신, 고려,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성리학, 친원 배명 정책, 역성혁명,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불씨잡변, 정학,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경세론, 불교, 성리학, 정학,  유교, 자작농, 산업의 공영화, 관료 정치, 주례, 병농일치, 한나라, 당나라,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 명나라, 대명률, 과거 제도,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 토지 균분, 10분의 1세, 고려국사, 부국강병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amp;lt;시경(詩經)&amp;gt;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태조실록(太祖實錄)』&lt;br /&gt;
* 『태종실록(太宗實錄)』&lt;br /&gt;
* 『삼봉집(三峰集)』&lt;br /&gt;
* 「정도전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lt;br /&gt;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lt;br /&gt;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lt;br /&gt;
* 「정도전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lt;br /&gt;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lt;br /&gt;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lt;br /&gt;
* 「정도전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정도전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정도전’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이 있는 네 번째 문단을 첫 번째 문단 뒤로 넣으면 중복된 내용은 조정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양 천도 시 한양의 공간 계획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면. 서울의 공간을 크게 어떻게 나누었는지, 경복궁의 궁궐 및 전각의 이름을 어떻게 명명했으며 이 명칭 등을 통해 정도전이 원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정도전과 이방원의 국정운영 철학 및 방향에서 어떤 차이가 났으며,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인정하는 배경, 결국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서술했으면 한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538</id>
		<title>Draft 선덕여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538"/>
				<updated>2017-07-31T08:25: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니]], 성조황고, [[박혁거세]], [[김유신]], 자장, 각간 알천, 상대등 비담, 염종 &lt;br /&gt;
|장소/공간= 분황사, 당항성, 압량주, 영묘사, 옥문지, 여근곡, 부산, 월성&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라]], 골품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인평, [[백제]], [[고구려]], 당나라, 첨성대, 황룡사 9층탑, 예지력, 신통력&lt;br /&gt;
|물품/도구/유물= 첨성대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점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lt;br /&gt;
*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lt;br /&gt;
*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선덕여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선덕여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신라시대의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amp;lt;br/&amp;gt;《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왕의 신통력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로 축소하고, 선덕여왕시대에 신라가 이룩하였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황룡사 9층석탑의 설립 배경과 염원을 적으면서, 황룡사 9층석탑은 호국의 상징를 가진 탑임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천문 관측기구인 첨성대를 설립한 이유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지기3사 중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를 좀 돌려 설명할 수 없을까? 여근곡, 남근, 여근 등의 이야기를 외국 학생들에 설명할 수 있을는지.&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는 김춘추, 김유신 등을 중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김춘추를 다시 당나라로 보냈다. 이런 일련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지속적인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권을 유지시키려 했던 통치권자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B%8F%84%EC%A0%84&amp;diff=537</id>
		<title>Draft 정도전</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B%8F%84%EC%A0%84&amp;diff=537"/>
				<updated>2017-07-31T08:24: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정도전&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동북면도지휘사, 조민수, 이방원, 정총, 이방석&lt;br /&gt;
|장소/공간= 명륜당,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 함주 막사, 경복궁, 랴오둥  &lt;br /&gt;
|사건= 위화도 회군, 제1차 왕자의 난&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문신, 개국 공신, 고려,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성리학, 친원 배명 정책, 역성혁명,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불씨잡변, 정학,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경세론, 불교, 성리학, 정학,  유교, 자작농, 산업의 공영화, 관료 정치, 주례, 병농일치, 한나라, 당나라,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 명나라, 대명률, 과거 제도,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 토지 균분, 10분의 1세, 고려국사, 부국강병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amp;lt;시경(詩經)&amp;gt; ‘주아’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게으름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정전을 근정전(勤政殿)이라 이름 지었고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많이 하여 슬기로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지었다고 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공이 큰 자신은 물론 다른 형들을 제치고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 세자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데에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유교주의적 이상 국가로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권 정치를 지향했다. 그런데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왕이 되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한 것이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의 죄명은 무리를 지어 세자 방석(芳碩)과 가깝게 지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태조실록(太祖實錄)』&lt;br /&gt;
* 『태종실록(太宗實錄)』&lt;br /&gt;
* 『삼봉집(三峰集)』&lt;br /&gt;
* 「정도전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lt;br /&gt;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lt;br /&gt;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lt;br /&gt;
* 「정도전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lt;br /&gt;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lt;br /&gt;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lt;br /&gt;
* 「정도전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정도전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정도전’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이 있는 네 번째 문단을 첫 번째 문단 뒤로 넣으면 중복된 내용은 조정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양 천도 시 한양의 공간 계획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면. 서울의 공간을 크게 어떻게 나누었는지, 경복궁의 궁궐 및 전각의 이름을 어떻게 명명했으며 이 명칭 등을 통해 정도전이 원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정도전과 이방원의 국정운영 철학 및 방향에서 어떤 차이가 났으며,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인정하는 배경, 결국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서술했으면 한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B6%80%EC%8B%9D&amp;diff=535</id>
		<title>Draft 김부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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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21: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amp;lt;삼국사기&amp;gt;를 지은 김부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 인종, 이자겸, 여진족, 묘청, 조광, 윤첨, 신채호, 화랑도, 인종, 낭가, 불가, 독립당, 사대당, 유가&lt;br /&gt;
|장소/공간= 경주, 개경, 서경, 송나라 &lt;br /&gt;
|사건=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amp;lt;삼국사기&amp;gt;, 신라, 풍수지리설, 칭제건원, 북벌, 천도, 사대주의, 고구려, 기전체, 본기, 지(志), 표, 열전, &amp;lt;고기&amp;gt;, &amp;lt;삼한고기&amp;gt;, &amp;lt;신라고사&amp;gt;, &amp;lt;구삼국사&amp;gt;, &amp;lt;삼국지&amp;gt;, &amp;lt;후한서&amp;gt;, &amp;lt;신당서&amp;gt;, &amp;lt;구당서&amp;gt;, &amp;lt;자치통감&amp;gt;, 진삼국사기표, &amp;lt;옥해&amp;gt;, 초간본, 성암본&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amp;lt;삼국사기&amp;gt;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 기전체, 열전 이런 말의 설명은 개념 용어 설명으로 하기로 했음. 아니라면 모든 원고의 개념어를 다 풀이해야 함.&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김부식(金富軾)」(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lt;br /&gt;
*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lt;br /&gt;
* 『삼국사기조사보고서』(천혜봉·황천오, 문화재관리국, 1981)&lt;br /&gt;
* 『삼국사기의 원전검토(原典檢討)』(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lt;br /&gt;
* 『삼국사기전거론(三國史記典據論)』(이강래, 민족사, 1996)&lt;br /&gt;
* 『역주삼국사기 1.2.3.4.5』(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1998)&lt;br /&gt;
*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신채호, 조선사연구초, 1930)&lt;br /&gt;
*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고병익,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lt;br /&gt;
* 「삼국사기론」(이기백, 『문학과 지성』7·4, 1976)&lt;br /&gt;
*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신형식, 『한국사논총』 3, 1978)&lt;br /&gt;
* 「삼국사기 지(志)의 분석」(신형식, 『단대학술논총』 3, 1979)&lt;br /&gt;
* 「새로 발견된 고판본(古板本) 삼국사기에 대하여」(천혜봉, 『대동문화연구』 15,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부식’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개경, 서경 등 당시의 지명 옆에 괄호를 사용하여 현재의 지명을 표기할 것&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것 : 적어도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평가에 서술된 개념이 어려워, 낭가, 불가, 한학파, 독립당, 사대당 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을 풀어쓰거나 아니면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이 부분만 쉽게 설명하여 서술하는 것이 나을 듯&amp;lt;br/&amp;gt;&lt;br /&gt;
- &amp;lt;삼국사기&amp;gt;의 기전체, 열전 등등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9C%ED%9D%AC&amp;diff=534</id>
		<title>Draft 서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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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31T08:19: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소손녕, 성종, 이몽전, 중랑장 대도수, 낭장 유방 &lt;br /&gt;
|장소/공간= 동경, 청천강, 봉산군, 서경창, 대동강, 안융진, 평양,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강동6주  &lt;br /&gt;
|사건= 거란의 제1차 침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거란]], 유수, [[고구려]], 화친론과 주전론, [[신라]], 송나라, [[발해]], 조빙, 성보&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2년에는 송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단절되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나타냈다. 그의 가장 뚜렷한 업적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일이다.  &lt;br /&gt;
&lt;br /&gt;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lt;br /&gt;
&lt;br /&gt;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lt;br /&gt;
&lt;br /&gt;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lt;br /&gt;
&lt;br /&gt;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lt;br /&gt;
&lt;br /&gt;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잠식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 :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t;br /&gt;
&lt;br /&gt;
●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에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나와 있음. 당시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불렀는데 京자가 서울을 나타내는 말이니 서경을 도읍이라 했을 수도 있다고 봄. 통일 신라 시대의 5소경도 다섯 개의 작은 서울이라는 뜻으로 쓰임. 경주가 구석에 있어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기 어려우니 지역별로 작은 서울을 둠 것임.&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역옹패설(櫟翁稗說)』&lt;br /&gt;
* 『보한집(補閑集)』&lt;br /&gt;
* 『금남집(錦南集)』&lt;br /&gt;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lt;br /&gt;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lt;br /&gt;
* 「고려(高麗) 성종대(成宗代)의 정치적지배세력(政治的支配勢力)」(이기백, 『호남문화연구』6, 1974)&lt;br /&gt;
* 「서희(徐熙)」(황원구, 『인물한국사』Ⅱ, 박우사, 196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서희’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서희는 우리에게 거란과의 외교담판으로 알려져 있다. 본 원고도 이 부분에 집중되어 서술되었다. 서희에 대한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정치, 외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정책 및 외교에 대한 사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거란과의 담판 및 방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 서희가 활동했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지도와 함께 간략하게 설명해주면, 고려, 송, 거란간의 전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amp;lt;br/&amp;gt;&lt;br /&gt;
-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 서희가 말한 것인데, 고려의 수도는 개경인데, 서희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나?&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533</id>
		<title>Draft 선덕여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533"/>
				<updated>2017-07-31T08:17: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니]], 성조황고, [[박혁거세]], [[김유신]], 자장, 각간 알천, 상대등 비담, 염종 &lt;br /&gt;
|장소/공간= 분황사, 당항성, 압량주, 영묘사, 옥문지, 여근곡, 부산, 월성&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라]], 골품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인평, [[백제]], [[고구려]], 당나라, 첨성대, 황룡사 9층탑, 예지력, 신통력&lt;br /&gt;
|물품/도구/유물= 첨성대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lt;br /&gt;
*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lt;br /&gt;
*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선덕여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선덕여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신라시대의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amp;lt;br/&amp;gt;《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왕의 신통력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로 축소하고, 선덕여왕시대에 신라가 이룩하였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황룡사 9층석탑의 설립 배경과 염원을 적으면서, 황룡사 9층석탑은 호국의 상징를 가진 탑임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천문 관측기구인 첨성대를 설립한 이유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지기3사 중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를 좀 돌려 설명할 수 없을까? 여근곡, 남근, 여근 등의 이야기를 외국 학생들에 설명할 수 있을는지.&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는 김춘추, 김유신 등을 중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김춘추를 다시 당나라로 보냈다. 이런 일련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지속적인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권을 유지시키려 했던 통치권자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7%BC%EC%B4%88%EA%B3%A0%EC%99%95&amp;diff=532</id>
		<title>Draft 근초고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7%BC%EC%B4%88%EA%B3%A0%EC%99%95&amp;diff=532"/>
				<updated>2017-07-31T08:14: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백제]],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 초고왕, 개루-고이-책계-분서, 초구-구수-비류, 마한, [[가야]], 고국원왕, 호족, 백제군, 왜왕, 낙랑군, 대방군, 왕인, 아직기, 고흥 &lt;br /&gt;
|장소/공간= 전라도, 낙동강, 평양성, 랴오시, 이소노가미 신궁, 황해, 한반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변산반도 &lt;br /&gt;
|사건= 평양성 전투&lt;br /&gt;
|기록물= &lt;br /&gt;
|개념용어= 담로제, 남진 정책, 칠지도, 대륙 백제, 금석문자, 명문, 후왕, &amp;lt;[[천자문]]&amp;gt;, &amp;lt;[[논어]]&amp;gt;, &amp;lt;[[서기]]&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 칠지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lt;br /&gt;
&lt;br /&gt;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lt;br /&gt;
&lt;br /&gt;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lt;br /&gt;
&lt;br /&gt;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lt;br /&gt;
&lt;br /&gt;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amp;lt;천자문&amp;gt;과 &amp;lt;논어&amp;gt;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amp;lt;서기(書記)&amp;gt;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amp;lt;서기&amp;gt;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lt;br /&gt;
* 『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 『한국고대사의 연구』(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lt;br /&gt;
* 『한국고대사연구』(이병도, 박영사, 1976)&lt;br /&gt;
*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8)&lt;br /&gt;
* 「백제왕위계승고」(이기백, 『역사학보』 11, 1959)&lt;br /&gt;
* 「백제의 요서경략」(김상기, 『백산학보』 3, 1967)&lt;br /&gt;
* 「백제군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방선주, 『백산학보』 11, 1971)&lt;br /&gt;
* 「백제사회와 그 문화」(김철준, 『무녕왕릉발굴조사보고서』, 1973)&lt;br /&gt;
*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담로체제를 중심으로-」(노중국,『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근초고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근초고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 초구-구수-비류...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구가 아니라 초고입니다.&amp;lt;br/&amp;gt;&lt;br /&gt;
- 근초고왕 당시 영토 확장 관련 지도를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amp;diff=531</id>
		<title>Draft 광개토대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amp;diff=531"/>
				<updated>2017-07-31T08:11: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고구려]], [[백제]], 고국양왕, 아신왕, 왜(倭), [[신라]], [[가야]], [[거란]], 비려, 숙신, 선비족, 모용씨, 후연국, 모용성, 북연, 동부여, 장수왕&lt;br /&gt;
|장소/공간= 석현성, 관미성, 수곡성, 패수, 소자하, 남소성, 신성, 요하, 개원, 영안, 혼춘, 지린성 지안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영락, 연호, 왜구, 조공 관계, 장사, 사마, 참군, 광개토왕릉비, &amp;lt;[[삼국사기]]&amp;gt;, 일본이 왜곡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이름 그대로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을 중심이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44행, 1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고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인터넷 주소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lt;br /&gt;
* 『광개토왕비연구 100년』(고구려연구회, 학연문화사, 1996)&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신연구』(이형구·박노희, 동화출판공사, 1986)&lt;br /&gt;
*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천관우, 『한국사 시민강좌』3, 1988)&lt;br /&gt;
* 「광개토호태왕기의 내정정비에 대하여」(박성봉,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985)&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에 나타난 한일관계」(김술학, 『일본학』1, 1981)&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국론」(천관우, 『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9)&lt;br /&gt;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광개토대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고,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에서 인터넷 주소(URL)는 무엇인지 추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즉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시기의 한반도 모습을 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도록 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원고의 가장 마지막 문장인 ‘일제강점기에 마모된 그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논란이 되어왔다’는 내용은 없애는 것이 나을 듯. 만약 이 문장을 넣고 싶으면 마모된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였다는 말 정도는 적어주는 것이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지도와 함께 영토확장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293</id>
		<title>Draft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293"/>
				<updated>2017-07-27T17:08: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대의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lt;br /&gt;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lt;br /&gt;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기독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신교,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lt;br /&gt;
&lt;br /&gt;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lt;br /&gt;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인 종군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을 뿐이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amp;lt;/ins&amp;gt; 조선 사신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접근했다. 선교사들도 스스로 찾아온 사신들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는 가장 훌륭한 선교의 대상이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신도가 되지 못했다. 학자들이기도 했던 사신들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서적을 국내로 들려왔고, 종교보다는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5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lt;br /&gt;
&lt;br /&gt;
로마 교황청은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에 이어 2014년 8월 16일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실학이란 명분으로 초기 도입된 가톨릭교는 피를 흘리며 조선에 정착,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lt;br /&gt;
&lt;br /&gt;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알렌이었지만 그는 외교관 신분이었고,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됐다. 이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신교는 이를 기준으로 하여 두 해의 중간인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종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교는 동포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0여명의 순교자 중 600여명이 헌정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한국에서 신도의 수가 967만 여명으로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대형교회는 신도가 10만 명을 넘는 곳도 있다.&lt;br /&gt;
&lt;br /&gt;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https://www.mdsd.or.k 명동대성당]&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amp;lt;br/&amp;gt;&lt;br /&gt;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amp;lt;br/&amp;gt;&lt;br /&gt;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amp;lt;br/&amp;gt;&lt;br /&gt;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290</id>
		<title>Draft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290"/>
				<updated>2017-07-27T17:07: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한국 최대의 종교 |집필자= 신현덕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 |장소/공간= 화...&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대의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lt;br /&gt;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lt;br /&gt;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기독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신교,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lt;br /&gt;
&lt;br /&gt;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lt;br /&gt;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인 종군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을 뿐이다.&lt;br /&gt;
&lt;br /&gt;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조선 사신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스스로 접근했다. 선교사들도 스스로 찾아온 사신들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는 가장 훌륭한 선교의 대상이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신도가 되지 못했다. 학자들이기도 했던 사신들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서적을 국내로 들려왔고, 종교보다는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5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lt;br /&gt;
&lt;br /&gt;
로마 교황청은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에 이어 2014년 8월 16일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실학이란 명분으로 초기 도입된 가톨릭교는 피를 흘리며 조선에 정착,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lt;br /&gt;
&lt;br /&gt;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알렌이었지만 그는 외교관 신분이었고,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됐다. 이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 신교는 이를 기준으로 하여 두 해의 중간인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종교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교는 동포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0여명의 순교자 중 600여명이 헌정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신교는 한국에서 신도의 수가 967만 여명으로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대형교회는 신도가 10만 명을 넘는 곳도 있다.&lt;br /&gt;
&lt;br /&gt;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lt;br /&gt;
&lt;br /&gt;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https://www.mdsd.or.k 명동대성당]&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amp;lt;br/&amp;gt;&lt;br /&gt;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amp;lt;br/&amp;gt;&lt;br /&gt;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amp;lt;br/&amp;gt;&lt;br /&gt;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280</id>
		<title>Draft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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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54: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전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행사를 연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lt;br /&gt;
&lt;br /&gt;
연등은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널리 행하여졌는데, 한국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각 사찰에서 다는 등불이다. 이날 각 사찰은 초파일을 맞아 경내·외에 수많은 등불을 달아 세상을 밝힌다. 전국의 사찰 경내가 수백만 개의 등불로 불야성을 이룬다. 이날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과 사진 애호가들이 연등을 찍어 작품을 만든다. 다른 하나는 대대적인 연등행진이다. 대표적인 연등행진은 연등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종파가 참여하여 서울 시내 중심가를 지난다. 이 행진에는 매년 수만 여 개의 각종 등불을 든 신자가 참여, 부처의 밝은 공덕을 중생에게 알린다.&lt;br /&gt;
&lt;br /&gt;
원래 연등은 신라 진흥왕(551년) 때 시작되어 고려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켜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국가의 대대적인 행사였다. 불전에 등불을 켬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밝게 하여 부처의 덕을 기리며 대자대비한 부처와 불법(佛法)과 승가(僧伽)로 돌아가 의지하여 구원을 청한다는 의미를 지녔다.&lt;br /&gt;
&lt;br /&gt;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그곳에 머물면서 사찰 생활을 경험케 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토록 하기 위해 준비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며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서기 372년 고구려(소수림왕 2년)를 통해 서였다.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로 보냈고, 그를 계기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다음해 성문사(省門寺) 등 2개 사찰을 세웠는데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다. 정치적으로는 이곳에 국가를 성립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출발한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해로로 광주(廣州)에 도착, 불교가 왕실로 전파됐다. 백제는 그를 왕궁에 머물게 하며 설법을 들었고, 다음해 백성을 출가시켜 백제인 승려를 배출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라는 사람이 신라의 영토인 경북 서상 지방에 들어와 모례(毛禮)라 불리는 사람 집에서 불법을 전했고, 모례가 최초의 신라 불교 신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씨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씨족들은 고구려가 중앙집권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을 인지, 조직적으로 씨족의 영향력 약화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 결과 불교를 초기에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됐다. 고구려보다 150년 이상 뒤늦은 시점이었다.&lt;br /&gt;
&lt;br /&gt;
신라에서는 불교가 늦게 성행했으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고 이차돈이 순교한 지 140년 후,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는 말기 승려가 나라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지만 관료세력의 거센 반발에 몰렸다. 이때부터 급격하게 쇠퇴한 고려는 결국 20여년 뒤에 나라를 조선에게 넘겼다.&lt;br /&gt;
&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유신그룹이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사상을 서문에 담기도 했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불교에 속한 문화재 중 많은 것들이 국보로 되어 있을 만큼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컸다.&lt;br /&gt;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이 있으며 신도 수는 7,619,332명이다. 불교계에 근무하는 사람은 27,404명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통계청&lt;br /&gt;
*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277</id>
		<title>Draft 불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277"/>
				<updated>2017-07-27T16:53: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집필자= 신현덕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전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행사를 연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lt;br /&gt;
&lt;br /&gt;
연등은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널리 행하여졌는데, 한국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각 사찰에서 다는 등불이다. 이날 각 사찰은 초파일을 맞아 경내·외에 수많은 등불을 달아 세상을 밝힌다. 전국의 사찰 경내가 수백만 개의 등불로 불야성을 이룬다. 이날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과 사진 애호가들이 연등을 찍어 작품을 만든다. 다른 하나는 대대적인 연등행진이다. 대표적인 연등행진은 연등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종파가 참여하여 서울 시내 중심가를 지난다. 이 행진에는 매년 수만 여 개의 각종 등불을 든 신자가 참여, 부처의 밝은 공덕을 중생에게 알린다.&lt;br /&gt;
&lt;br /&gt;
원래 연등은 신라 진흥왕(551년) 때 시작되어 고려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켜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국가의 대대적인 행사였다. 불전에 등불을 켬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밝게 하여 부처의 덕을 기리며 대자대비한 부처와 불법(佛法)과 승가(僧伽)로 돌아가 의지하여 구원을 청한다는 의미를 지녔다.&lt;br /&gt;
&lt;br /&gt;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그곳에 머물면서 사찰 생활을 경험케 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토록 하기 위해 준비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며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서기 372년 고구려(소수림왕 2년)를 통해 서였다.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로 보냈고, 그를 계기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다음해 성문사(省門寺) 등 2개 사찰을 세웠는데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다.&lt;br /&gt;
&lt;br /&gt;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다. 정치적으로는 이곳에 국가를 성립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출발한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해로로 광주(廣州)에 도착, 불교가 왕실로 전파됐다. 백제는 그를 왕궁에 머물게 하며 설법을 들었고, 다음해 백성을 출가시켜 백제인 승려를 배출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라는 사람이 신라의 영토인 경북 서상 지방에 들어와 모례(毛禮)라 불리는 사람 집에서 불법을 전했고, 모례가 최초의 신라 불교 신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씨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씨족들은 고구려가 중앙집권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을 인지, 조직적으로 씨족의 영향력 약화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 결과 불교를 초기에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됐다. 고구려보다 150년 이상 뒤늦은 시점이었다.&lt;br /&gt;
&lt;br /&gt;
신라에서는 불교가 늦게 성행했으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고 이차돈이 순교한 지 140년 후,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는 말기 승려가 나라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지만 관료세력의 거센 반발에 몰렸다. 이때부터 급격하게 쇠퇴한 고려는 결국 20여년 뒤에 나라를 조선에게 넘겼다.&lt;br /&gt;
&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유신그룹이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사상을 서문에 담기도 했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불교에 속한 문화재 중 많은 것들이 국보로 되어 있을 만큼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컸다.&lt;br /&gt;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이 있으며 신도 수는 7,619,332명이다. 불교계에 근무하는 사람은 27,404명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통계청&lt;br /&gt;
* 연등회 &lt;br /&gt;
*보존위원회 &lt;br /&gt;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9%95%EB%A6%89&amp;diff=271</id>
		<title>Draft 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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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46: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능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장소/공간= 도성, 개성...&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능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lt;br /&gt;
|장소/공간= 도성, 개성 &lt;br /&gt;
|사건=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상신, 효, 혈통, 지위 계승의 영속성, &amp;lt;국조오례의&amp;gt;, 풍수지리 상 명당, 세계문화유산, 석물, 홍살문, 참도, 정자각, 문무석인,  강(岡), &amp;lt;국장도감의궤&amp;gt;, &amp;lt;빈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 실록, 의궤, 능지, 제례, 속절제, 기신제,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 청명, 종묘 제례, 사직 대제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amp;lt;국조오례의&amp;gt;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lt;br /&gt;
&lt;br /&gt;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lt;br /&gt;
&lt;br /&gt;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홍살문에서 시작하는 참도와 정자각의 절제된 건축 형태,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눈에 띠는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 ‘강(岡)’이라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의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amp;lt;산릉도감의궤&amp;gt;를 비롯한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amp;lt;국장도감의궤&amp;gt;, &amp;lt;빈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가 있다. &amp;lt;산릉도감의궤&amp;gt;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amp;lt;산릉도감의궤&amp;gt;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문화재청 조선왕릉 홈페이지&lt;br /&gt;
* 황인희,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북21, 2010.&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lt;br /&gt;
* 『옛무덤의 사회사』(장철수, 웅진출판사, 1995)&lt;br /&gt;
* 『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황인희, 북21, 201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문화재청,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문화재청,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및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왕릉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 이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했으면 흥미로울 것 같다.&amp;lt;br/&amp;gt;&lt;br /&gt;
- 왕릉을 구성하는 홍살문, 참도, 정자각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왕릉 지도(?)를 실었으면 한다. 왕릉의 공간, 구조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왕릉이 몇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문무석은 왜 세워놓았는지 등을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왕릉이 ‘강(岡)’이라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 무슨 뜻인지 쉽게 풀어서 설명할 것. 왕릉이 있는 위치를 ‘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인가?&amp;lt;br/&amp;gt;&lt;br /&gt;
- 의궤, 능지에 대한 설명은 좀 더 요약 및 축소해도 될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amp;lt;br/&amp;gt;&lt;br /&gt;
① 총 42기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amp;lt;br/&amp;gt;&lt;br /&gt;
② 조영된 조선왕릉은 엄격한 규범에 따라 왕의 유택인 능침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공간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능침공간은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직경 18미터 높이 4미터 정도의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단 아래로 내려가서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두 단을 합쳐서 한 공간에 문무석상과 석마를 배치했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품을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비보로 설치한 인공연못이 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263</id>
		<title>Draft 조선왕조실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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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42: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태조, 철종, 순종, 실록청, 춘...&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조, 철종, 순종, 실록청, 춘추관, 도청, 사관, 총재관, 도청 당상,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lt;br /&gt;
|장소/공간= 자하문, 차일암,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태인, 금산, 정읍 내장산 &lt;br /&gt;
|사건= 무오사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amp;lt;순종황제실록&amp;gt;, 사초,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amp;lt;조보&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amp;lt;춘추관 시정기&amp;gt;, &amp;lt;태조실록&amp;gt;, &amp;lt;명종실록&amp;gt;, &amp;lt;태조실록&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 &amp;lt;순종황제실록&amp;gt;으로 따로 분류한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amp;lt;조보(朝報)&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lt;br /&gt;
&lt;br /&gt;
사초는 전 왕 재위 시에 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기록으로 실록의 중심 자료가 되었다. 네 명의 전임 사관은 궁중에서 항상 임금 곁에 있다가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과 풍속의 미악(美惡)과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는 성격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필화(筆禍)를 막기 위해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에도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엄하게 단속한 덕분에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사초에 대한 비밀 유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같은 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에는 작성한 사관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관은 자신이 써놓은 사초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 또는 바꿔 쓰는 일이 간혹 있었다. 또 당쟁이 심할 때는 집권당의 사관이 자기 당파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여 공정성을 잃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실록이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등이다.&lt;br /&gt;
&lt;br /&gt;
실록 편찬은, 사초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실록청에 모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록청의 구성원은 모두 춘추관의 관원이었는데,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을 완성하였다. 첫째 단계는, 셋에서 여섯 개로 나뉜 각 방에서 각종 자료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실을 골라내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심 부서인 도청에서 초고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간 원고를 작성하였다. 셋째, 실록청의 우두머리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간 원고의 잘못을 재수정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낸다.  &lt;br /&gt;
&lt;br /&gt;
실록이 완성되면 이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편찬에 이용한 기본 자료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고와 중간 원고는 서울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세초란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는 것인데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amp;lt;태조실록&amp;gt;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amp;lt;태조실록&amp;gt;부터 &amp;lt;명종실록&amp;gt;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lt;br /&gt;
* 『조선왕조실록』 1―범례―(신석호, 국사편찬위원회, 1955)&lt;br /&gt;
* 「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이성무, 『민족문화』 17, 1994)&lt;br /&gt;
*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정구복,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lt;br /&gt;
* 「조선전기 실록과 사론」(차장섭, 『국사관논총』 32, 1992)&lt;br /&gt;
*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한우근, 『진단학보』 66, 1988)&lt;br /&gt;
* 「조선전기의 사관」(차장섭, 『경북사학』 6, 1983)&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태도와 사관의 역사의식」(차용걸, 『한국사론』 6, 국사편찬위원회, 1979)&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 5, 196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후세 → 후기&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실록은 1927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amp;lt;br/&amp;gt;&lt;br /&gt;
②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여 413책으로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 제작되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8C%80%EC%A4%91&amp;diff=256</id>
		<title>Draft 김대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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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35: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출처 및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넬슨 만델라, 박정희, 김동운, 김종필,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계엄사령부, 김영삼, 신군부,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의 정부, 김정일 &lt;br /&gt;
|장소/공간= 명동성당, 한반도 &lt;br /&gt;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10.26,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IMF 관리 체제, 베를린 선언, 6·15남북공동성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인동초, 향토예비군, 4대국 안전보장안, 긴급조치 9호, 10월 유신, 햇볕 정책,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노벨평화상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기어이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해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데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중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lt;br /&gt;
&lt;br /&gt;
1992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는 후유증이 생겼고 햇볕 정책의 무리한 추진, 임기 말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인터넷 &amp;lt;다음백과&amp;gt;&lt;br /&gt;
====관련자료====&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김대중’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다음백과)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김대중의 정치노선에 대해 설명하고, 대통령으로서 정책 수행의 주요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면 좋겠다. 대통령 당선 이전 야당 대표로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중요인물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시한 과감한 경제 개혁 착수는 어떤 것이며, IMF 관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 조정 및 대외 개방, 금융 개혁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햇볕정책, ‘베를린선언’, 6.15남북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서술해 줄 것&amp;lt;br/&amp;gt;&lt;br /&gt;
- 김대중 대통령 시기 정책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가 나타난 배경에 대해서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설명하 것 : 외환 위기 극복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진 이유와 노동 조건이 악화된 배경 등&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8C%80%EC%A4%91&amp;diff=255</id>
		<title>Draft 김대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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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34: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넬슨 만델라, 박정희, 김동운, 김종필, 윤보선,...&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넬슨 만델라, 박정희, 김동운, 김종필,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계엄사령부, 김영삼, 신군부,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의 정부, 김정일 &lt;br /&gt;
|장소/공간= 명동성당, 한반도 &lt;br /&gt;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10.26,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IMF 관리 체제, 베를린 선언, 6·15남북공동성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인동초, 향토예비군, 4대국 안전보장안, 긴급조치 9호, 10월 유신, 햇볕 정책,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노벨평화상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기어이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lt;br /&gt;
&lt;br /&gt;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lt;br /&gt;
&lt;br /&gt;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해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데에 합의했다.&lt;br /&gt;
&lt;br /&gt;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중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lt;br /&gt;
&lt;br /&gt;
1992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lt;br /&gt;
&lt;br /&gt;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lt;br /&gt;
&lt;br /&gt;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는 후유증이 생겼고 햇볕 정책의 무리한 추진, 임기 말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인터넷 &amp;lt;다음백과&amp;gt;&lt;br /&gt;
====관련자료====&lt;br /&gt;
*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김대중’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다음백과)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김대중의 정치노선에 대해 설명하고, 대통령으로서 정책 수행의 주요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면 좋겠다. 대통령 당선 이전 야당 대표로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중요인물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시한 과감한 경제 개혁 착수는 어떤 것이며, IMF 관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 조정 및 대외 개방, 금융 개혁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햇볕정책, ‘베를린선언’, 6.15남북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서술해 줄 것&amp;lt;br/&amp;gt;&lt;br /&gt;
- 김대중 대통령 시기 정책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가 나타난 배경에 대해서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설명하 것 : 외환 위기 극복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진 이유와 노동 조건이 악화된 배경 등&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0%B1%EB%82%A8%EC%A4%80&amp;diff=250</id>
		<title>Draft 백남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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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31: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존 케이지, 플럭서스, 요한 바오로 6세, 샬럿 무...&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존 케이지, 플럭서스, 요한 바오로 6세, 샬럿 무어만&lt;br /&gt;
|장소/공간=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뮌헨대학교,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카페 오 고고, 뉴욕 WNET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 베니스 비엔날레, 바젤 국제 아트 페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lt;br /&gt;
|사건= 서울아시안게임, 서울 올림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비디오 아트,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아방가르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포타팩,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오페라 섹스트로닉,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비디오 아트 분야를 새롭게 만들고 많은 작품을 발표한 현대 예술가이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제품을 표현 매체로 활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와 미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비디오 아트가 만들어짐으로써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백남준에게 독일의 언론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는 음악과 철학에 심취하였다. 1957년 독일로 간 백남준은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무렵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독일에서 꽃피웠던 국제적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중시하였다. &lt;br /&gt;
&lt;br /&gt;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열세 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1965년에 발표되었다.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한 것이 미술사에 기록된 첫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 등 음악과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뉴욕에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1966년 ‘오페라 섹스트로닉’ 초연 때는 무어만이 웃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다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974년부터 백남준은 TV 모니터를 여러 개 설치하고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 영상을 내보내는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이 무렵 발표된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었다. &lt;br /&gt;
&lt;br /&gt;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1984년 1월 1일 실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된 것이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바이바이 키플링’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담은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 기마 인물상’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lt;br /&gt;
&lt;br /&gt;
1996년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다시 일어서 독일 비디오 조각전,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또 2000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에서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의 작품으로 레이저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선보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유해는 화장 후 본인의 소망대로 한국과 미국,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한국의 서울은 백남준이 태어난 곳이고 미국의 뉴욕은 주요 활동 무대였으며 독일은 그가 평소 예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나라이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김영은, &amp;lt;미술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나의사랑 백남준』(구보타시게코, 남정호 옮김, 이순, 2010)&lt;br /&gt;
* 『백남준의 귀환(백남준총서2)』(백남준아트센터총체미디어연구소, 백남준아트센터 2010)&lt;br /&gt;
*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이용우, 열음사, 2000)&lt;br /&gt;
* 『백남준의세계』(삼성미술관·솔로몬R·구겐하임미술관, 삼성미술관, 2000)&lt;br /&gt;
* 『정보예술 Info ART』(김홍희 신 시아굿맨, 삼신각 1995)&lt;br /&gt;
*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국립현대미술관, Editions API, 1992)&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백남준’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김영은, &amp;lt;미술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였나요? 아니면 어떤 주제를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나요?&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98%EA%B8%B0&amp;diff=249</id>
		<title>Draft 김환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98%EA%B8%B0&amp;diff=249"/>
				<updated>2017-07-27T16:29: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킨 화가, 김환기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 신사실파,...&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킨 화가, 김환기  &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 신사실파, 모더니스트, 대한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 미래파, 김광섭 &lt;br /&gt;
|장소/공간= 아마기화랑, 홍익대학교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서양화가, 구성주의 계열, 추상 미술 운동, 자유전, 신미술 운동, 모더니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 점화, 마티에르, 수묵, 한국일보 대상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농담의 변화, 발묵 효과, 저녁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다. 그는 구성주의 계열의 추상 미술을 한국에 들여온 초기 모더니스트이다. 또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함께 갖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1933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에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어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고 아마기화랑(天城畫廊)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신미술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서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그의 작품 경향은 일본 유학 시기(1930년대~1940년대 초반), 해방 후부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1945~1963), 미국 뉴욕에 있던 시기(1964~1974) 등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유학 중이던 제1기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 등이 현재 남아 있는데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부터 파리를 다녀와 뉴욕으로 가기까지의 시기인 제2기에는 한국적 소재를 담은 작품을 주로 그렸다. 이 시기에는 달과 산, 구름과 학, 나목(裸木) 등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 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던 3년 동안 이런 주제들이 더욱 함축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우거나 극히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산과 나목,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 ‘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의 대표 작품들이다.&lt;br /&gt;
&lt;br /&gt;
미국 뉴욕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약 10년에 걸친 시기인 제3기에는 지금까지의 경향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화를 그렸고, 이전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 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lt;br /&gt;
&lt;br /&gt;
뉴욕 시기 김환기의 점화는 색조의 미묘한 변조와 농담의 변화, 발묵 효과와 같은 번짐 효과 등을 통해 미국의 미술 세계와는 다른 동양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우주적 공간의 이미지를 담은 추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세로 236㎝, 가로 172㎝. 개인 소장)’는 김환기의 1970년대 점화의 대표작이다. 점화는 화면 전체에 점을 찍고 그 점 하나 하나를 여러 차례 둘러싸가는 동안 색이 중첩되고 번져나가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체 화면을 메꾸어 만든 그림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먹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의 작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찍어나간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작품의 제목은,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라고 이어지는 시인 김광섭(金珖燮)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김환기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1971년부터 1972년까지 가로 2m, 세로 3m 정도 크기의 대작 점화를 여러 점 그렸다. 김환기의 일기에는 자신의 점화에 대해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쓰여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오광수, 열화당, 1979)&lt;br /&gt;
* 『한국현대화가십인(韓國現代畫家十人)』(오광수, 열화당, 1976)&lt;br /&gt;
* 『김환기화집(金煥基畫集)』(국립현대미술관, 1975)&lt;br /&gt;
*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열음사, 1980)&lt;br /&gt;
* 『김환기』한국의 미술가(삼성문화재단, 1997)&lt;br /&gt;
*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김향안, 우석, 1989)&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우리나라 추상 화가의 선구자인 ‘김환기’ 작품의 특징과 작품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글의 구성과 내용이 필요하다.    &lt;br /&gt;
‘김환기’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미국으로 가서 활동한 이유가 있나?&amp;lt;br/&amp;gt;&lt;br /&gt;
- 김환기 작품의 세 시기에 대해 제3기에 많이 치중하여 설명하였다. 각 시기를 균형있게 설명했으면. 특히 3기에 치중한 이유가 있나?&amp;lt;br/&amp;gt;&lt;br /&gt;
- 원고에 설명된 작품은 사진자료로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6%90%EA%B8%B0%EC%A0%95&amp;diff=246</id>
		<title>Draft 손기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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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26: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동아일보사, 양정고등보통학교, 남승룡,...&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동아일보사, 양정고등보통학교, 남승룡, 자발라, 하퍼, 타미라&lt;br /&gt;
|장소/공간= 베를린, 신의주, 만주 안동현, 도쿄, 경성,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 &lt;br /&gt;
|사건= 베를린올림픽, 안의육상경기대회, 경영 마라톤대회, 메이지신궁대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장기말소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소련, 일장기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lt;br /&gt;
&lt;br /&gt;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야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lt;br /&gt;
&lt;br /&gt;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lt;br /&gt;
&lt;br /&gt;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amp;quot;서두르지 말라&amp;quot;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amp;quot;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amp;quot;라고 대답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 황대진 기자, 조선일보 2015.07.14. (기사명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정찬모, 1996)&lt;br /&gt;
* 대한유상경기연맹 기록(1945∼2002)&lt;br /&gt;
* 베를린올림픽대회 관련 자료&lt;br /&gt;
* 강형구(손기정 특별전시회 자료 수집가) 면담록&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손기정’의 원고 출처가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조선일보 기사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해방 이후 손기정이 한국 마라톤계에서의 업적은 없나? 2002년 사망했는데 1936년도 올림픽 내용만을 쓴 것이 아쉽다.&amp;lt;br/&amp;gt;&lt;br /&gt;
- 손기정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 부상품으로 받은 청동투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을 사진과 일장기 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 사진과 함께 설명하면 시각적 효과가 있어 의미가 있을 듯하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A%B5%AC&amp;diff=240</id>
		<title>Draft 김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A%B5%AC&amp;diff=240"/>
				<updated>2017-07-27T16:22: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 김구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임시 정부, 동학 교도, 일본군 중...&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임시 정부의 중심 인물 김구&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임시 정부, 동학 교도, 일본군 중위 쓰치다, 고종 황제, 안악 양산학교, 재령 보강학교, 이동녕, 이시영,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학도병, 이승만, 미군정, 유엔 총회, 김규식, 김일성,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안두희 &lt;br /&gt;
|장소/공간= 안악 치하포, 해주, 상하이, 충칭, 시안, 푸양, 모스크바, 소련&lt;br /&gt;
|사건=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을사조약, 3·1운동,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진주만 기습, 8.15 광복, 남북 분단, 5 ‧ 10총선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일제강점기, 한학, 조선 왕조, 과거 시험, 신탁 통치, 단독 정부&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구(金九, 1876∼1949)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로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고 17세에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 동학 교도가 되었던 김구는 갑오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lt;br /&gt;
&lt;br /&gt;
을미사변에 충격 받은 21세의 김구는 1896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집행 직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다음 해 봄에 탈옥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 운동에 나서서 1907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7년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는 이동녕 ·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수뇌들을 직접 처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거사가 성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1940년 3월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항일 무장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였다. 또 미 육군과 제휴하여 비밀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는 등,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추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해방 전 임시 정부는 외국의 독립 운동 단체를 대표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쓸렸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서로 심하게 갈등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로부터 신탁 통치 방침이 전해지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남한에서 정치적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반공산주의만을 외친 것이 아니고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도 두 차례나 계획했다.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한민족 스스로 통일된 독립국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되자 김구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또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김구는 그해 12월 하순부터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에게 민족의 분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8년 2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도 더 지난 후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lt;br /&gt;
&lt;br /&gt;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2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이다. 김일성은 남한의 단독 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고,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며 평양으로 향했다. &lt;br /&gt;
&lt;br /&gt;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 ‧ 10총선거를 거부하였다. 1948년 국회에서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는 열세 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하였다. 김구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도 유엔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영훈,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 기파랑, 2013.&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백범연구』 제1·2집(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편, 교문사, 1985·1986)&lt;br /&gt;
*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백범전기편찬위원회, 교문사, 1984)&lt;br /&gt;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lt;br /&gt;
* 『백범어록』(백범사상연구소, 사상사, 1973)&lt;br /&gt;
* 『위대한 한국인』백범 김구(선우진, 태극출판사, 1972)&lt;br /&gt;
* 『백범주석최근언론집』(엄항섭 편, 1948)&lt;br /&gt;
* 『백범일지』(김구, 국사원, 1947)&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구’의 원고 출처가 “이영훈, &amp;lt;대한민국 역사&amp;gt;, 기파랑, 2013”,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김구의 『백범일지』와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나의 소원’에 서술된 &amp;lt;민족국가&amp;gt;, &amp;lt;정치이념&amp;gt;, &amp;lt;내가 원하는 우리나라&amp;gt;의 세 편의 글은 김구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설명하면 좋겠다.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는 문구도 제시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서술했으면.&amp;lt;br/&amp;gt;&lt;br /&gt;
- 김구가 한국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맨 마지막 문단에 정리하여 서술하였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5%88%EC%A4%91%EA%B7%BC&amp;diff=238</id>
		<title>Draft 안중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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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안중근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이토 히로부미, 고종, 삼흥학교, 돈의학...&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안중근&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토 히로부미]], [[고종]], 삼흥학교, 돈의학교, 황병길, 동의회, 단지회, 이완용, 을사5적, 코코프체프, 관동도독부, 마나베, 미즈노&lt;br /&gt;
|장소/공간= 하얼빈, 진남포,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둥 반도, 뤼순 항&lt;br /&gt;
|사건=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한일신협약, 러일 전쟁,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정미7조약&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대한제국, 통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거사는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의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렀다. &lt;br /&gt;
&lt;br /&gt;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lt;br /&gt;
&lt;br /&gt;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lt;br /&gt;
&lt;br /&gt;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심산유고(心山遺稿)』&lt;br /&gt;
*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숭모회, 1970)&lt;br /&gt;
*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안중근자필본, 1910)&lt;br /&gt;
*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lt;br /&gt;
* 「안중근공판기록」&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안중근’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인터넷 다음백과”의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가계에 대해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안중근의 묘지는 아직도 뤼순감옥 근처에 있으며, 이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한국으로의 이장에 관한 한국인의 과제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안중근의 유서와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를 서술하면서 안중근과 당시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안중근에 대해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C%A4%EB%8F%99%EC%A3%BC&amp;diff=228</id>
		<title>Draft 윤동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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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4: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시로 독립운동을 한 윤동주&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광명학원, 연희전문학교, 조선일보, 경향신문,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송몽규, 이양하, 정병욱&lt;br /&gt;
|장소/공간= 후쿠오카 형무소 &lt;br /&gt;
|사건=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참회록, 생체 실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1930년대 말기부터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이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 성찰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다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창작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연희전문 시절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작품으로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amp;lt;문우(文友)&amp;gt;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amp;lt;경향신문&amp;gt;에 발표된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lt;br /&gt;
&lt;br /&gt;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lt;br /&gt;
&lt;br /&gt;
‘참회록’은 망국민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치열한 자아 성찰의 의지를 나타낸 시로,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성찰의 매개체는 거울이다.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이 욕됨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 삶에 대해 참회의 글을 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이 된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 쓰는 참회록에 대해 다시 참회할 것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lt;br /&gt;
&lt;br /&gt;
1942년 일본에서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옮겼다. 함께 유학 간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lt;br /&gt;
&lt;br /&gt;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이로써 윤동주와 송몽규가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모아 시집 &amp;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amp;gt;를 발간하려 했다. 이때 서시(序詩)까지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옮겨 적은 복사본 세 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1945년 해방 후 정병욱 등이 다른 유고와 함께 묶어 &amp;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amp;gt;(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유고 시집을 발간하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윤동주 시의 문학사적 의의」(김용직, 『나라사랑』 23, 1976)&lt;br /&gt;
* 「윤동주론의 행방」(김윤식, 『심상』, 1975.2.)&lt;br /&gt;
* 「선백의 생애」(윤일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74)&lt;br /&gt;
*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김종길, 『진실과 언어』, 일지사, 1974)&lt;br /&gt;
* 「윤동주론」(김흥규, 『창작과 비평』 33, 1974. 가을.)&lt;br /&gt;
* 「윤동주론」(김열규, 『국어국문학』 27, 196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윤동주’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인터넷 다음백과”의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윤동주의 출생한 지역과 가정 환경에 대해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윤동주가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1935년부터 사망하는 1944년까지의 식민지 상황을 본 원고에서 적고 있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치안유지법 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amp;lt;br/&amp;gt; &lt;br /&gt;
-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상황, 송몽규와의 대화 내용, 당시의 활동 등에 대해 서술하면 시인인 윤동주를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D%99%8D%EB%8F%84,_%EC%8B%A0%EC%9C%A4%EB%B3%B5&amp;diff=221</id>
		<title>Draft 김홍도, 신윤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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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11: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단원, 혜원, 도화서, 화원, 문인화가, 강세황,...&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단원, 혜원, 도화서, 화원, 문인화가, 강세황, 영조, 왕세손, 정조, 김응환, 정선, 한량과 기녀&lt;br /&gt;
|장소/공간= 충청도 연풍,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풍속화, 근대 명수, 금세의 신필, 어진, 익선관본, 원유관본, 정형 산수, 진경산수, 단원법, 현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단원 김홍도(金弘道 檀園,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lt;br /&gt;
&lt;br /&gt;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amp;lt;금강전도&amp;gt;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그의 화풍은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 정형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는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lt;br /&gt;
&lt;br /&gt;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김홍도는 1791년 원유관본을 그린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5년 동안 현감을 지냈다. 현감에서 물러난 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대표작으로는 &amp;lt;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amp;gt;을 비롯해서 &amp;lt;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amp;gt;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신윤복도 산수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amp;lt;풍속화첩&amp;gt;이 있다. &amp;lt;풍속화첩&amp;gt;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韓國)의 미(美)』 21-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정양모 감수, 중앙일보사, 1985)&lt;br /&gt;
* 『한국회화사(韓國繪畫史)』(안휘준, 일지사, 1980)&lt;br /&gt;
*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lt;br /&gt;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畫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lt;br /&gt;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생애와 예술」(홍선표, 『학원』296, 1984.7.)&lt;br /&gt;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재세연대고(在世年代攷)」(최순우, 『미술자료』11, 국립중앙박물관, 1966)&lt;br /&gt;
* 『한국회화(韓國繪畵)의 전통(傳統)』(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lt;br /&gt;
* 『한국(韓國)의 미(美) 19 -풍속화(風俗畵)-』(안휘준 감수, 중앙일보사, 1985)&lt;br /&gt;
*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안휘준, 일지사, 1980)&lt;br /&gt;
* 『우리나라의 옛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lt;br /&gt;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홍도와 신윤복’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단원 김홍도(金弘道↔檀園,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amp;lt;br/&amp;gt;&lt;br /&gt;
-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 김응환에 대해 설명할 것.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amp;lt;br/&amp;gt;&lt;br /&gt;
- 김홍도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조선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을 그려 당시 생활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대표적인 화가라고 알고 있다. 씨름도, 서당 등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풍속화에 대해서도 서술하였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제목은 김홍도와 신윤복인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에 대한 분량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균형을 맞추었으면 한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여져 있는 작품들은 사진자료로 제시하였으면 한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C%A1%B0&amp;diff=217</id>
		<title>Draft 정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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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08: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정조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장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효장세자, 노론, 규...&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 정조&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장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효장세자, 노론, 규장각, 홍국영, 숙위소, 시파, 벽파, 남인, 소론, 실학자, 장용영, 순조, 영조, 예순대비&lt;br /&gt;
|장소/공간= 화성, 수원, 화산, 화성행궁, 현륭원&lt;br /&gt;
|사건= 임오화변, 화성 건설, 을묘원행&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세손, 책봉, 뒤주, 연좌제, 대리 청정, 붕당, 탕평 정치, 도승지, 외척, 사대 사상, ‘진경산수’, ‘동국진체’, 양반, 중인, 평민, ‘진경 시대’, 상왕, 수렴청정&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훗날 장조로 추존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가 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해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두 해 뒤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세손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들도 처벌받는 연좌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다가는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775년 이미 82세가 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 정치를 구현하는 데 힘쓰면서 조선 왕조의 중흥과 문화 정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날쌘 병사들을 따로 뽑아 왕궁을 호위하는 숙위소를 창설하였다. 규장각은 정조를 배척하는 세력에 맞설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문화 정치를 펼치기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당시 조정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조 때 시작된 외척 중심의 노론은 벽파가 되고 정조의 편을 들었던 남인과 소론, 노론 일부는 시파로 뭉쳤던 것이다. 정조가 주로 등용한 사람은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었다. 당파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해서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적인 통치 이념에 맞는 사람들을 찾다보니 시파 중심이 되었다. 이때 벽파는 때가 오기만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정조 시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에 의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룩된 문예부흥기였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가,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독자적인 풍이 유행했다.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화첩을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진짜 우리 산천의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발전이 양반층에만 한한 것이 아니고 중인 이하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른바 ‘진경 시대’라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뤘다. &lt;br /&gt;
&lt;br /&gt;
정조의 역사적 사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았으며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은 현륭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거기에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으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해진 대 역사였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현륭원 천장 이후 열두 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1795년에 정조는 5천여 명의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한 대행차를 했다.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을묘원행은 아버지 능과 가까운 화성에서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한 행차였다. 정조는 이 행차에서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렬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사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정조는 그로부터 5년 정도 더 통치를 하다가 세자가 15세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려고 화성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49세 된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였던 예순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예순대비는 정조 치하에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벽파와 함께 정조의 개혁을 모두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영조실록(英祖實錄)』&lt;br /&gt;
* 『정조실록(正祖實錄)』&lt;br /&gt;
* 『일성록(日省錄)』 &lt;br /&gt;
*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푸른역사, 1998)&lt;br /&gt;
* 『진경시대』(최완수 외, 돌베게, 1998)&lt;br /&gt;
* 『꿈의 문화유산 화성』(유봉학, 신구문화사, 1996)&lt;br /&gt;
* 「정조의 『교화사상」(정옥자, 『규장각』19, 1996)&lt;br /&gt;
* 「정조의 초계문신교육과 문체정책」(정옥자, 『규장각』6, 1982)&lt;br /&gt;
* 「정조의 학예사상」(정옥자, 『한국학보』11, 1978)&lt;br /&gt;
*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정형우, 『동방학지』11, 197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정조’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임금(생몰연대, 즉위년도)&amp;lt;br/&amp;gt;&lt;br /&gt;
- 르네상스보다 문예부흥 등으로 말을 바꾸었으면.&amp;lt;br/&amp;gt;&lt;br /&gt;
- 영조, 효장세자,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와의 가계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조선 후기 당쟁과 영정조의 탕평노력에 대해 서술&amp;lt;br/&amp;gt;&lt;br /&gt;
- 정조의 탕평의지와 탕평을 이룰 수 있는 기반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된 기관, 행사라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 개혁 정리&amp;lt;br/&amp;gt;&lt;br /&gt;
- 정조에 대한 학계의 평가&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D%99%A9&amp;diff=210</id>
		<title>Draft 이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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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04: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퇴계 이황&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성균관, 안향, 주세붕, 명종, 선조, 기대승,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몬학파, 구마모토학파&lt;br /&gt;
|장소/공간= 풍기, 백운동 서원, 백록동 서원, 소수서원, 도산서당&lt;br /&gt;
|사건= [[임진왜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주자학, 문과 과거, 사액서원, 예조판서, 대제학, 지경연, 이조판서, 향약, &amp;lt;주자서 절요&amp;gt;, &amp;lt;자성록&amp;gt;, 사단칠정, ‘무진육조소’,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amp;lt;성학십도&amp;gt;, 성학(聖學), 대간, 주리파 철학, 에도시대, 개화기, 도의철학&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20여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amp;lt;주자서 절요&amp;gt; 및 &amp;lt;자성록&amp;gt;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고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amp;lt;성학십도&amp;gt;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이 집약체로 볼 수 있는 &amp;lt;성학십도&amp;gt;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300명에 가까운 학자가 그의 학풍을 따랐고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존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도산전서(陶山全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lt;br /&gt;
*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김형효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lt;br /&gt;
* 『퇴계학 연구논총』(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7)&lt;br /&gt;
* 「퇴계선생의 인성론」(배종호, 『퇴계학보』32, 퇴계학연구원, 1981)&lt;br /&gt;
* 「퇴계철학의 근본문제」(유승국, 『퇴계학보』19, 퇴계학연구원, 1978)&lt;br /&gt;
* 「퇴계의 경사상」(이남영, 『한국인의 인간관』, 한국교육개발원, 1977)&lt;br /&gt;
* 「퇴계선생과 기고봉」(이을호,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72)&lt;br /&gt;
* 「이퇴계와 그의 학설」(이병도, 『한국학연구총서』, 성진문화사, 1971)&lt;br /&gt;
* 「이황-성리학의 진수-」(박종홍,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퇴계 이황’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도입 서술&amp;lt;br/&amp;gt;&lt;br /&gt;
- 여러 왕들이 관직을 청했지만 사양한 이유는?&amp;lt;br/&amp;gt;&lt;br /&gt;
- 이황 학문의 특징, 주리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4%ED%99%A9&amp;diff=209</id>
		<title>Draft 이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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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04: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퇴계 이황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성균관, 안향, 주세붕, 명종, 선조, 기대승, 주...&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퇴계 이황&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성균관, 안향, 주세붕, 명종, 선조, 기대승,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몬학파, 구마모토학파&lt;br /&gt;
|장소/공간= 풍기, 백운동 서원, 백록동 서원, 소수서원, 도산서당&lt;br /&gt;
|사건= 임진왜란&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주자학, 문과 과거, 사액서원, 예조판서, 대제학, 지경연, 이조판서, 향약, &amp;lt;주자서 절요&amp;gt;, &amp;lt;자성록&amp;gt;, 사단칠정, ‘무진육조소’,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amp;lt;성학십도&amp;gt;, 성학(聖學), 대간, 주리파 철학, 에도시대, 개화기, 도의철학&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에도 이황은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20여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amp;lt;주자서 절요&amp;gt; 및 &amp;lt;자성록&amp;gt;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고 &amp;lt;논어집주&amp;gt;, &amp;lt;주역&amp;gt;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amp;lt;성학십도&amp;gt;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lt;br /&gt;
&lt;br /&gt;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lt;br /&gt;
&lt;br /&gt;
이황의 학문이 집약체로 볼 수 있는 &amp;lt;성학십도&amp;gt;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300명에 가까운 학자가 그의 학풍을 따랐고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존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도산전서(陶山全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lt;br /&gt;
*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김형효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lt;br /&gt;
* 『퇴계학 연구논총』(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7)&lt;br /&gt;
* 「퇴계선생의 인성론」(배종호, 『퇴계학보』32, 퇴계학연구원, 1981)&lt;br /&gt;
* 「퇴계철학의 근본문제」(유승국, 『퇴계학보』19, 퇴계학연구원, 1978)&lt;br /&gt;
* 「퇴계의 경사상」(이남영, 『한국인의 인간관』, 한국교육개발원, 1977)&lt;br /&gt;
* 「퇴계선생과 기고봉」(이을호,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72)&lt;br /&gt;
* 「이퇴계와 그의 학설」(이병도, 『한국학연구총서』, 성진문화사, 1971)&lt;br /&gt;
* 「이황-성리학의 진수-」(박종홍,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7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퇴계 이황’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도입 서술&amp;lt;br/&amp;gt;&lt;br /&gt;
- 여러 왕들이 관직을 청했지만 사양한 이유는?&amp;lt;br/&amp;gt;&lt;br /&gt;
- 이황 학문의 특징, 주리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B%A0%EC%82%AC%EC%9E%84%EB%8B%B9&amp;diff=204</id>
		<title>Draft 신사임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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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6:00: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 신사임당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증좌한성 이원수, 율곡 이이, 신명화, 이사온, 안견...&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 최고의 여성 화가, 신사임당&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증좌한성 이원수, 율곡 이이, 신명화, 이사온, 안견 &lt;br /&gt;
|장소/공간= 강릉&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시대, 양반, 당호, 유교적 여성상, 진사,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포도도,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 요안조압도, 초서 병풍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 · 그림 · 글씨에 뛰어났던 조선 시대 여성 예술가이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집 여자를 부를 때는 그가 살던 집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이를 당호라고 했는데 사임당도 그녀의 이름이 아닌 당호이다. &lt;br /&gt;
&lt;br /&gt;
남편은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가 그녀의 아들이다. 사임당은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과 가정을 이끌었던 능동적인 여성이었고 자식들에게도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던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사임당은 자녀들을 지도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공부하여 이해한 다음에 가르쳤고 자식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현숙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사임당은 조선 사회가 요구한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처럼 여겨 결혼한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그래서 사임당도 외가에서 자라났다. 19세에 결혼한 사임당은 처음에는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사임당은 이따금 강릉의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친정에서 낳았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7세에 이미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배웠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 등은 그녀가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외할아버지의 예술과 학문 세계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어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 고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는 그녀가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깊고 절절한 애정을 가졌는가를 보여주고 어머니가 사임당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매화 · 난초 · 산수, 물고기나 새 등을 주된 화제(畫題)로 삼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 ‘포도도’는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아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이 담긴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있는데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자랑했다. &lt;br /&gt;
&lt;br /&gt;
사임당은 평소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하여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없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실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lt;br /&gt;
&lt;br /&gt;
실제로 그녀는 잎사귀와 줄기의 느낌 하나하나, 벌레의 다리 끝까지도 꼼꼼하게 그려냈고, 그림 속 물체의 색과 재질까지 특성에 맞게 잘 표현했다. 사임당의 그림은 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볕에 말리려 하자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닭이 쪼아서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도 전한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은 5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가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여기에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lt;br /&gt;
&lt;br /&gt;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 병풍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lt;br /&gt;
* 인터넷 다음백과&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율곡전서(栗谷全書)』&lt;br /&gt;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lt;br /&gt;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lt;br /&gt;
* 『신사임당의 생애와 교육』(손인수, 박영사, 1976)&lt;br /&gt;
* 『한국회회소사』(이동주, 서문당, 1972)&lt;br /&gt;
*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은상, 성문각, 1957)&lt;br /&gt;
* 『신사임당』(이병기, 조선명인전, 조광사, 1947)&lt;br /&gt;
* 「신사임당」(이은상,『한국의 인간상』5, 신구문화사, 198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신사임당’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인터넷 다음백과”로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인터넷 다음백과”의 구체적인 인터넷 주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현재 한국 지폐 중 5만원권의 주인공이라고 알려주면 어떨까? 5만원권 주인공으로 선정된 이유도 찾아서 서술하면 흥미롭겠다.&amp;lt;br/&amp;gt;&lt;br /&gt;
- 신사임당의 명칭을 설명할 때 ‘조선시대에는 여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당호를 썼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사임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해 이견들이 있으나 엄연히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당호는 여성이 이름 대신 사용했던 별호가 아니다. 여유당 정약처럼 남자도 당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amp;lt;br/&amp;gt;&lt;br /&gt;
- 신사임당의 시 중 주요 싯구를 본문에 적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주요 작품 사진을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E%A5%EC%98%81%EC%8B%A4&amp;diff=199</id>
		<title>Draft 장영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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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57: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세종, 이천, 김조  |장소/공간= 동래현, 경복궁, 천추전...&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세종, 이천, 김조 &lt;br /&gt;
|장소/공간= 동래현, 경복궁, 천추전, 흠경각 &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관노, 양인, 상의원별좌, 세종실록, 천문 관측 의기, 간의,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대호군, 옥루, 시(時) · 경(更) · 점(點), 갑인자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amp;lt;세종실록&amp;gt;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이다.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옥루(玉漏)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설치하였다. 옥루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가진 물시계였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lt;br /&gt;
&lt;br /&gt;
1438년에 만들어진 옥루는 장영실이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개발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amp;lt;세종실록&amp;gt; 1437년 4월 15일자 기사에는 옥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 천추전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 : 바퀴)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玉女)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 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사철의 풍경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 &lt;br /&gt;
&lt;br /&gt;
이외에도 장영실은 조선 시대의 활판 인쇄 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장영실’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세종이 장영실에게 천문기기를 연구하도록 한 이유를 설명할 것, 물시계, 간의, 혼천의, 해시계 등을 만든 이유를 당시 농사와 백성들의 삶과 연결하여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자격루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독자들이 그 모습이 상상하면서 흥미로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격루와 옥루의 모습 중 하나만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를 고루라면 자격루가 더 유명하니 자격루를 설명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시계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 갑인자라는 인쇄 기술은 인쇄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던 활자로 그 의미를 설명하면 좋겠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측우기에 대한 설명은 없네요. 중요한 발명품인데. 설명해주세요.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95%EB%8F%84%EC%A0%84&amp;diff=197</id>
		<title>Draft 정도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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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54: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정도전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동북면도지휘사, 조...&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정도전&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동북면도지휘사, 조민수, 이방원, 정총, 이방석&lt;br /&gt;
|장소/공간= 명륜당,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 함주 막사, 경복궁, 랴오둥  &lt;br /&gt;
|사건= 위화도 회군, 제1차 왕자의 난&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문신, 개국 공신, 고려,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성리학, 친원 배명 정책, 역성혁명,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불씨잡변, 정학,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경세론, 불교, 성리학, 정학,  유교, 자작농, 산업의 공영화, 관료 정치, 주례, 병농일치, 한나라, 당나라,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 명나라, 대명률, 과거 제도,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 토지 균분, 10분의 1세, 고려국사, 부국강병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문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 공신이며 새 나라의 사상적 기초를 이뤄낸 학자이다. 고려 말에는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직책을 얻어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 동안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는데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lt;br /&gt;
&lt;br /&gt;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앞장섰다. 한때 정몽주 등 고려 구세력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 주역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공신으로 여러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넣었다. 1394년에는 한양 천도를 계획하는 데 참여한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새 궁궐이 다 지어졌을 때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역성혁명에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개혁 의지가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개혁을 위해 이론을 마련하고 그 이론을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과 제도에 있어 조선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해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하였다. 또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펼쳤다. 그의 경세론을 요약하면 자작농을 많이 키우고 산업의 공영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며 능력에 토대를 둔 관료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이전에 있던 중국의 제도 가운데 좋은 제도를 골라 만든 조선의 통치 규범으로 제시한 책이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 · 군현제(郡縣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경제문감≫에서는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에 대해 논했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도전은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의 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10분의 1세의 확립, 공업 · 상업 · 염전 · 광산 등의 국영화를 꾀하였다.&lt;br /&gt;
&lt;br /&gt;
정도전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이다.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이성계가 일으킨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확실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정도전은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렸고 1396년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랴오둥[遼東] 수복 운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39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정도전의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 : 무리를 지어 가깝게 지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태조실록(太祖實錄)』&lt;br /&gt;
* 『태종실록(太宗實錄)』&lt;br /&gt;
* 『삼봉집(三峰集)』&lt;br /&gt;
* 「정도전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lt;br /&gt;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lt;br /&gt;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lt;br /&gt;
* 「정도전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lt;br /&gt;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lt;br /&gt;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lt;br /&gt;
* 「정도전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lt;br /&gt;
* 「정도전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정도전’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정도전은 고려 말기 9년 동안~’이 있는 네 번째 문단을 첫 번째 문단 뒤로 넣으면 중복된 내용은 조정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양 천도 시 한양의 공간 계획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면. 서울의 공간을 크게 어떻게 나누었는지, 경복궁의 궁궐 및 전각의 이름을 어떻게 명명했으며 이 명칭 등을 통해 정도전이 원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했으면 한다.&amp;lt;br/&amp;gt;&lt;br /&gt;
- 정도전과 이방원의 국정운영 철학 및 방향에서 어떤 차이가 났으며,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인정하는 배경, 결국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서술했으면 한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B6%80%EC%8B%9D&amp;diff=194</id>
		<title>Draft 김부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B6%80%EC%8B%9D&amp;diff=194"/>
				<updated>2017-07-27T15:50: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amp;lt;삼국사기&amp;gt;를 지은 김부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 인종, 이자겸, 여진족, 묘청, 조광, 윤첨, 신채호, 화랑도, 인종, 낭가, 불가, 독립당, 사대당, 유가&lt;br /&gt;
|장소/공간= 경주, 개경, 서경, 송나라 &lt;br /&gt;
|사건=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amp;lt;삼국사기&amp;gt;, 신라, 풍수지리설, 칭제건원, 북벌, 천도, 사대주의, 고구려, 기전체, 본기, 지(志), 표, 열전, &amp;lt;고기&amp;gt;, &amp;lt;삼한고기&amp;gt;, &amp;lt;신라고사&amp;gt;, &amp;lt;구삼국사&amp;gt;, &amp;lt;삼국지&amp;gt;, &amp;lt;후한서&amp;gt;, &amp;lt;신당서&amp;gt;, &amp;lt;구당서&amp;gt;, &amp;lt;자치통감&amp;gt;, 진삼국사기표, &amp;lt;옥해&amp;gt;, 초간본, 성암본&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lt;br /&gt;
&lt;br /&gt;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묘청의 난을, 신라 화랑도에서 이어진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에  한학파가 대항한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amp;lt;삼국사기&amp;gt;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김부식(金富軾)」(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lt;br /&gt;
*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lt;br /&gt;
* 『삼국사기조사보고서』(천혜봉·황천오, 문화재관리국, 1981)&lt;br /&gt;
* 『삼국사기의 원전검토(原典檢討)』(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lt;br /&gt;
* 『삼국사기전거론(三國史記典據論)』(이강래, 민족사, 1996)&lt;br /&gt;
* 『역주삼국사기 1.2.3.4.5』(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1998)&lt;br /&gt;
*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신채호, 조선사연구초, 1930)&lt;br /&gt;
*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고병익,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lt;br /&gt;
* 「삼국사기론」(이기백, 『문학과 지성』7·4, 1976)&lt;br /&gt;
*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신형식, 『한국사논총』 3, 1978)&lt;br /&gt;
* 「삼국사기 지(志)의 분석」(신형식, 『단대학술논총』 3, 1979)&lt;br /&gt;
* 「새로 발견된 고판본(古板本) 삼국사기에 대하여」(천혜봉, 『대동문화연구』 15,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2)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부식’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개경, 서경 등 당시의 지명 옆에 괄호를 사용하여 현재의 지명을 표기할 것&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것 : 적어도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평가에 서술된 개념이 어려워, 낭가, 불가, 한학파, 독립당, 사대당 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을 풀어쓰거나 아니면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이 부분만 쉽게 설명하여 서술하는 것이 나을 듯&amp;lt;br/&amp;gt;&lt;br /&gt;
- &amp;lt;삼국사기&amp;gt;의 기전체, 열전 등등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9%80%EB%B6%80%EC%8B%9D&amp;diff=193</id>
		<title>Draft 김부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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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49: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amp;lt;삼국사기&amp;gt;를 지은 김부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 인종, 이자겸, 여진족, 묘청, 조광, 윤첨, 신채호, 화랑도, 인종, 낭가, 불가, 독립당, 사대당, 유가&lt;br /&gt;
|장소/공간= 경주, 개경, 서경, 송나라 &lt;br /&gt;
|사건=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amp;lt;삼국사기&amp;gt;, 신라, 풍수지리설, 칭제건원, 북벌, 천도, 사대주의, 고구려, 기전체, 본기, 지(志), 표, 열전, &amp;lt;고기&amp;gt;, &amp;lt;삼한고기&amp;gt;, &amp;lt;신라고사&amp;gt;, &amp;lt;구삼국사&amp;gt;, &amp;lt;삼국지&amp;gt;, &amp;lt;후한서&amp;gt;, &amp;lt;신당서&amp;gt;, &amp;lt;구당서&amp;gt;, &amp;lt;자치통감&amp;gt;, 진삼국사기표, &amp;lt;옥해&amp;gt;, 초간본, 성암본&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lt;br /&gt;
&lt;br /&gt;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묘청의 난을, 신라 화랑도에서 이어진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에  한학파가 대항한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amp;lt;삼국사기&amp;gt;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김부식(金富軾)」(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lt;br /&gt;
*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lt;br /&gt;
* 『삼국사기조사보고서』(천혜봉·황천오, 문화재관리국, 1981)&lt;br /&gt;
* 『삼국사기의 원전검토(原典檢討)』(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lt;br /&gt;
* 『삼국사기전거론(三國史記典據論)』(이강래, 민족사, 1996)&lt;br /&gt;
* 『역주삼국사기 1.2.3.4.5』(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1998)&lt;br /&gt;
*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신채호, 조선사연구초, 1930)&lt;br /&gt;
*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고병익,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lt;br /&gt;
* 「삼국사기론」(이기백, 『문학과 지성』7·4, 1976)&lt;br /&gt;
*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신형식, 『한국사논총』 3, 1978)&lt;br /&gt;
* 「삼국사기 지(志)의 분석」(신형식, 『단대학술논총』 3, 1979)&lt;br /&gt;
* 「새로 발견된 고판본(古板本) 삼국사기에 대하여」(천혜봉, 『대동문화연구』 15,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2)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부식’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개경, 서경 등 당시의 지명 옆에 괄호를 사용하여 현재의 지명을 표기할 것&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것 : 적어도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평가에 서술된 개념이 어려워, 낭가, 불가, 한학파, 독립당, 사대당 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을 풀어쓰거나 아니면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사용자:최한샘|최한샘]] ([[사용자토론:최한샘|토론]]) 2017년 7월 28일 (금) 00:19 (KST) 이 부분만 쉽게 설명하여 서술하는 것이 나을 듯&amp;lt;br/&amp;gt;&lt;br /&gt;
- &amp;lt;삼국사기&amp;gt;의 기전체, 열전 등등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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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aft 김부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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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48: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amp;lt;삼국사기&amp;gt;를 지은 김부식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amp;lt;삼국사기&amp;gt;를 지은 김부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 인종, 이자겸, 여진족, 묘청, 조광, 윤첨, 신채호, 화랑도, 인종, 낭가, 불가, 독립당, 사대당, 유가&lt;br /&gt;
|장소/공간= 경주, 개경, 서경, 송나라 &lt;br /&gt;
|사건=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amp;lt;삼국사기&amp;gt;, 신라, 풍수지리설, 칭제건원, 북벌, 천도, 사대주의, 고구려, 기전체, 본기, 지(志), 표, 열전, &amp;lt;고기&amp;gt;, &amp;lt;삼한고기&amp;gt;, &amp;lt;신라고사&amp;gt;, &amp;lt;구삼국사&amp;gt;, &amp;lt;삼국지&amp;gt;, &amp;lt;후한서&amp;gt;, &amp;lt;신당서&amp;gt;, &amp;lt;구당서&amp;gt;, &amp;lt;자치통감&amp;gt;, 진삼국사기표, &amp;lt;옥해&amp;gt;, 초간본, 성암본&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이다.&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lt;br /&gt;
&lt;br /&gt;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lt;br /&gt;
&lt;br /&gt;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묘청의 난을, 신라 화랑도에서 이어진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에  한학파가 대항한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amp;lt;삼국사기&amp;gt;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amp;lt;삼국사기&amp;gt;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amp;lt;삼국사기&amp;gt;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amp;lt;고기(古記)&amp;gt;, &amp;lt;삼한고기(三韓古記)&amp;gt;, &amp;lt;신라고사(新羅古史)&amp;gt;, &amp;lt;구삼국사(舊三國史)&amp;gt; 등 국내 문헌과 &amp;lt;삼국지(三國志)&amp;gt;, &amp;lt;후한서(後漢書)&amp;gt;, &amp;lt;신당서(新唐書)&amp;gt;, &amp;lt;구당서(舊唐書)&amp;gt;, &amp;lt;자치통감(資治通鑑)&amp;gt;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amp;lt;삼국사기&amp;gt;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amp;lt;고기&amp;gt;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1174년 고려 사신이 &amp;lt;삼국사기&amp;gt;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amp;lt;옥해(玉海)&amp;gt;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amp;lt;삼국사기&amp;gt;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김부식(金富軾)」(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lt;br /&gt;
*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lt;br /&gt;
* 『삼국사기조사보고서』(천혜봉·황천오, 문화재관리국, 1981)&lt;br /&gt;
* 『삼국사기의 원전검토(原典檢討)』(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lt;br /&gt;
* 『삼국사기전거론(三國史記典據論)』(이강래, 민족사, 1996)&lt;br /&gt;
* 『역주삼국사기 1.2.3.4.5』(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1998)&lt;br /&gt;
*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신채호, 조선사연구초, 1930)&lt;br /&gt;
*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고병익,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lt;br /&gt;
* 「삼국사기론」(이기백, 『문학과 지성』7·4, 1976)&lt;br /&gt;
*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신형식, 『한국사논총』 3, 1978)&lt;br /&gt;
* 「삼국사기 지(志)의 분석」(신형식, 『단대학술논총』 3, 1979)&lt;br /&gt;
* 「새로 발견된 고판본(古板本) 삼국사기에 대하여」(천혜봉, 『대동문화연구』 15,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2)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김부식’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개경, 서경 등 당시의 지명 옆에 괄호를 사용하여 현재의 지명을 표기할 것&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것 : 적어도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amp;lt;br/&amp;gt;&lt;br /&gt;
- 역사학자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평가에 서술된 개념이 어려워, 낭가, 불가, 한학파, 독립당, 사대당 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을 풀어쓰거나 아니면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사용자:최한샘|최한샘]] ([[사용자토론:최한샘|토론]]) 이 부분만 쉽게 설명하여 서술하는 것이 나을 듯&amp;lt;br/&amp;gt;&lt;br /&gt;
- &amp;lt;삼국사기&amp;gt;의 기전체, 열전 등등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9C%ED%9D%AC&amp;diff=185</id>
		<title>Draft 서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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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44: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소손녕, 성종, 이몽전, 중랑장 대도수, 낭장 유방 &lt;br /&gt;
|장소/공간= 동경, 청천강, 봉산군, 서경창, 대동강, 안융진, 평양,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강동6주  &lt;br /&gt;
|사건= 거란의 제1차 침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거란]], 유수, [[고구려]], 화친론과 주전론, [[신라]], 송나라, [[발해]], 조빙, 성보&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덕분에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lt;br /&gt;
&lt;br /&gt;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lt;br /&gt;
&lt;br /&gt;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잠식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 :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역옹패설(櫟翁稗說)』&lt;br /&gt;
* 『보한집(補閑集)』&lt;br /&gt;
* 『금남집(錦南集)』&lt;br /&gt;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lt;br /&gt;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lt;br /&gt;
* 「고려(高麗) 성종대(成宗代)의 정치적지배세력(政治的支配勢力)」(이기백, 『호남문화연구』6, 1974)&lt;br /&gt;
* 「서희(徐熙)」(황원구, 『인물한국사』Ⅱ, 박우사, 196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서희’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서희는 우리에게 거란과의 외교담판으로 알려져 있다. 본 원고도 이 부분에 집중되어 서술되었다. 서희에 대한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정치, 외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정책 및 외교에 대한 사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거란과의 담판 및 방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 서희가 활동했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지도와 함께 간략하게 설명해주면, 고려, 송, 거란간의 전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amp;lt;br/&amp;gt;&lt;br /&gt;
-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 서희가 말한 것인데, 고려의 수도는 개경인데, 서희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나?&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9C%ED%9D%AC&amp;diff=184</id>
		<title>Draft 서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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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44: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소손녕, 성종, 이몽전, 중랑장 대도수, 낭장 유방  |장소/...&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소손녕, 성종, 이몽전, 중랑장 대도수, 낭장 유방 &lt;br /&gt;
|장소/공간= 동경, 청천강, 봉산군, 서경창, 대동강, 안융진, 평양,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강동6주  &lt;br /&gt;
|사건= 거란의 제1차 침입&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고려]], 문신, [[거란]], 유수, [[고구려]], 화친론과 주전론, [[신라]], 송나라, [[발해]], 조빙, 성보&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덕분에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lt;br /&gt;
&lt;br /&gt;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lt;br /&gt;
&lt;br /&gt;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lt;br /&gt;
&lt;br /&gt;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amp;lt;br/&amp;gt;  &lt;br /&gt;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lt;br /&gt;
&lt;br /&gt;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잠식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 :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lt;br /&gt;
&lt;br /&gt;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고려사(高麗史)』&lt;br /&gt;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lt;br /&gt;
* 『역옹패설(櫟翁稗說)』&lt;br /&gt;
* 『보한집(補閑集)』&lt;br /&gt;
* 『금남집(錦南集)』&lt;br /&gt;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lt;br /&gt;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lt;br /&gt;
* 「고려(高麗) 성종대(成宗代)의 정치적지배세력(政治的支配勢力)」(이기백, 『호남문화연구』6, 1974)&lt;br /&gt;
* 「서희(徐熙)」(황원구, 『인물한국사』Ⅱ, 박우사, 196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서희’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근호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출처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서희는 우리에게 거란과의 외교담판으로 알려져 있다. 본 원고도 이 부분에 집중되어 서술되었다. 서희에 대한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정치, 외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정책 및 외교에 대한 사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거란과의 담판 및 방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 서희가 활동했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지도와 함께 간략하게 설명해주면, 고려, 송, 거란간의 전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amp;lt;br/&amp;gt;&lt;br /&gt;
-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 서희가 말한 것인데, 고려의 수도는 개경인데, 서희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나?&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179</id>
		<title>Draft 선덕여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179"/>
				<updated>2017-07-27T15:38: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니]], 성조황고, [[박혁거세]], [[김유신]], 자장, 각간 알천, 상대등 비담, 염종 &lt;br /&gt;
|장소/공간= 분황사, 당항성, 압량주, 영묘사, 옥문지, 여근곡, 부산, 월성&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라]], 골품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인평, [[백제]], [[고구려]], 당나라, 첨성대, 황룡사 9층탑, 예지력, 신통력&lt;br /&gt;
|물품/도구/유물= 첨성대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도 있다. 636년 궁 서쪽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며칠 동안 계속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각간 알천(閼川) 등에게 군사를 데리고 서쪽 교외에 있는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 매복한 적병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실제로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었고 그곳에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적군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lt;br /&gt;
*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lt;br /&gt;
*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선덕여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선덕여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신라시대의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amp;lt;br/&amp;gt;《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왕의 신통력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로 축소하고, 선덕여왕시대에 신라가 이룩하였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황룡사 9층석탑의 설립 배경과 염원을 적으면서, 황룡사 9층석탑은 호국의 상징를 가진 탑임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천문 관측기구인 첨성대를 설립한 이유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지기3사 중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를 좀 돌려 설명할 수 없을까? 여근곡, 남근, 여근 등의 이야기를 외국 학생들에 설명할 수 있을는지.&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는 김춘추, 김유신 등을 중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김춘추를 다시 당나라로 보냈다. 이런 일련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지속적인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권을 유지시키려 했던 통치권자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178</id>
		<title>Draft 선덕여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4%A0%EB%8D%95%EC%97%AC%EC%99%95&amp;diff=178"/>
				<updated>2017-07-27T15:38: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니]], 성조황고, [[박혁거세]], [[김유신]], 자장, 각간 알천, 상대등 비담, 염종 &lt;br /&gt;
|장소/공간= 분황사, 당항성, 압량주, 영묘사, 옥문지, 여근곡, 부산, 월성&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라]], 골품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인평, [[백제]], [[고구려]], 당나라, 첨성대, 황룡사 9층탑, 예지력, 신통력&lt;br /&gt;
|물품/도구/유물= 첨성대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lt;br /&gt;
&lt;br /&gt;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lt;br /&gt;
 &lt;br /&gt;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lt;br /&gt;
&lt;br /&gt;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lt;br /&gt;
&lt;br /&gt;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도 있다. 636년 궁 서쪽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며칠 동안 계속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각간 알천(閼川) 등에게 군사를 데리고 서쪽 교외에 있는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 매복한 적병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실제로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었고 그곳에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적군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lt;br /&gt;
&lt;br /&gt;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외,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삼국유사(三國遺事)』&lt;br /&gt;
*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lt;br /&gt;
*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lt;br /&gt;
*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선덕여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선덕여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신라시대의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amp;lt;br/&amp;gt;《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왕의 신통력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로 축소하고, 선덕여왕시대에 신라가 이룩하였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lt;br /&gt;
|의견2=  - 황룡사 9층석탑의 설립 배경과 염원을 적으면서, 황룡사 9층석탑은 호국의 상징를 가진 탑임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천문 관측기구인 첨성대를 설립한 이유도 서술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지기3사 중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를 좀 돌려 설명할 수 없을까? 여근곡, 남근, 여근 등의 이야기를 외국 학생들에 설명할 수 있을는지.&amp;lt;br/&amp;gt;&lt;br /&gt;
- 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는 김춘추, 김유신 등을 중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김춘추를 다시 당나라로 보냈다. 이런 일련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지속적인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권을 유지시키려 했던 통치권자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7%BC%EC%B4%88%EA%B3%A0%EC%99%95&amp;diff=171</id>
		<title>Draft 근초고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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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33: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백제,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백제]],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 초고왕, 개루-고이-책계-분서, 초구-구수-비류, 마한, [[가야]], 고국원왕, 호족, 백제군, 왜왕, 낙랑군, 대방군, 왕인, 아직기, 고흥 &lt;br /&gt;
|장소/공간= 전라도, 낙동강, 평양성, 랴오시, 이소노가미 신궁, 황해, 한반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변산반도 &lt;br /&gt;
|사건= 평양성 전투&lt;br /&gt;
|기록물= &lt;br /&gt;
|개념용어= 담로제, 남진 정책, 칠지도, 대륙 백제, 금석문자, 명문, 후왕, &amp;lt;[[천자문]]&amp;gt;, &amp;lt;[[논어]]&amp;gt;, &amp;lt;[[서기]]&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 칠지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구-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lt;br /&gt;
&lt;br /&gt;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lt;br /&gt;
&lt;br /&gt;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lt;br /&gt;
&lt;br /&gt;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lt;br /&gt;
&lt;br /&gt;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amp;lt;천자문&amp;gt;과 &amp;lt;논어&amp;gt;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amp;lt;서기(書記)&amp;gt;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amp;lt;서기&amp;gt;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lt;br /&gt;
* 『일본서기(日本書紀)』&lt;br /&gt;
* 『한국고대사의 연구』(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lt;br /&gt;
* 『한국고대사연구』(이병도, 박영사, 1976)&lt;br /&gt;
*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8)&lt;br /&gt;
* 「백제왕위계승고」(이기백, 『역사학보』 11, 1959)&lt;br /&gt;
* 「백제의 요서경략」(김상기, 『백산학보』 3, 1967)&lt;br /&gt;
* 「백제군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방선주, 『백산학보』 11, 1971)&lt;br /&gt;
* 「백제사회와 그 문화」(김철준, 『무녕왕릉발굴조사보고서』, 1973)&lt;br /&gt;
*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담로체제를 중심으로-」(노중국,『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5)&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근초고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재운, &amp;lt;한국사를 움직인 100인&amp;gt;, 청아출판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근초고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 초구-구수-비류...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구가 아니라 초고입니다.&amp;lt;br/&amp;gt;&lt;br /&gt;
- 근초고왕 당시 영토 확장 관련 지도를 제시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amp;diff=160</id>
		<title>Draft 광개토대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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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7-27T15:25: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최한샘: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고구려]], [[백제]], 고국양왕, 아신왕, 왜(倭), [[신라]], [[가야]], [[거란]], 비려, 숙신, 선비족, 모용씨, 후연국, 모용성, 북연, 동부여, 장수왕&lt;br /&gt;
|장소/공간= 석현성, 관미성, 수곡성, 패수, 소자하, 남소성, 신성, 요하, 개원, 영안, 혼춘, 지린성 지안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영락, 연호, 왜구, 조공 관계, 장사, 사마, 참군, 광개토왕릉비, &amp;lt;[[삼국사기]]&amp;gt;, 일본이 왜곡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이름 그대로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을 중심이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lt;br /&gt;
&lt;br /&gt;
&amp;lt;삼국사기&amp;gt;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44행, 1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마모된 그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논란이 되어왔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인터넷 주소 추가)&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삼국사기(三國史記)』&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lt;br /&gt;
* 『광개토왕비연구 100년』(고구려연구회, 학연문화사, 1996)&lt;br /&gt;
* 『광개토대왕릉비신연구』(이형구·박노희, 동화출판공사, 1986)&lt;br /&gt;
*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천관우, 『한국사 시민강좌』3, 1988)&lt;br /&gt;
* 「광개토호태왕기의 내정정비에 대하여」(박성봉,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985)&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에 나타난 한일관계」(김술학, 『일본학』1, 1981)&lt;br /&gt;
* 「광개토왕릉비문국론」(천관우, 『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9)&lt;br /&gt;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광개토대왕’의 원고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라고 되어 있다. 인용 또는 발췌한 내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출처를 명시하고,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에서 인터넷 주소(URL)는 무엇인지 추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즉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시기의 한반도 모습을 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도록 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원고의 가장 마지막 문장인 ‘일제강점기에 마모된 그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논란이 되어왔다’는 내용은 없애는 것이 나을 듯. 만약 이 문장을 넣고 싶으면 마모된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였다는 말 정도는 적어주는 것이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지도와 함께 영토확장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중요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최한샘</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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