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Korea100/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A%B9%80%EC%84%A0%EB%AF%B8</id>
		<title>Korea100 - 사용자 기여 [ko]</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A%B9%80%EC%84%A0%EB%AF%B8"/>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ED%8A%B9%EC%88%98:%EA%B8%B0%EC%97%AC/%EA%B9%80%EC%84%A0%EB%AF%B8"/>
		<updated>2026-04-30T21:16:02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578</id>
		<title>Draft 불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578"/>
				<updated>2017-07-31T19:42: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을 달고 그 무렵 연등행진을 한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신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탑돌이와 같은 대규모 행사 중 하나이다.&lt;br /&gt;
&lt;br /&gt;
개인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불자의 실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도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사찰에서 외국어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의 예를 들면 “누구든 유서깊은 한국 문화를 배워 익히고 실참실수를 통해 한국의 정통선을 명철하게 체험하여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amp;lt;ref&amp;gt;화계사 홈페이지 http://www.hwagyesa.org/maha/kukjae/about_01.html&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늦었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인이 불법을 전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6부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겨우 불교를 공인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늦게 성행했으나,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이 무렵 해외에서의 불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혜초는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널리 알려진 「왕오천출국전」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문왕과 경덕왕의 왕자들은 불상 등을 일본에 전하거나 불사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은 교역과 유학 등의 명분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신라인들은 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을 세웠고, 거기에 신라 사찰인 신라원을 세웠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중국 산동성 적산에 중건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 지어진 향가는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 전해오고 있다. 또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남긴 것으로 『일본서기』가 전한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는 고려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했고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또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불교 신봉을 강조했고, 아들을 직접 출가시켰다. 이후 고려는 불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개념과 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불교로 흥한 고려가 지나친 종교관련 행사와 인물들로 인해 망한 것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lt;br /&gt;
&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서울을 현재 위치에 터 잡을 때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이 나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궁궐 안에 절을 세우기도 했고, 법석을 벌였고,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lt;br /&gt;
&lt;br /&gt;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불교 사상도 존중했고, 훈민정음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지금도 불교 교리를 실천하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돌아가신 조상을 극락에 가도록 비는 49재, 100일재 등 여러 종류의 천도재를 지낸다. 젊은이들이 중요한 시험이 100일이 남았다거나, 서로 사귄지 100일째가 되었을 때 파티를 하는 것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짐승이나 가축 등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선을 하는 민간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불교 사찰이 보존해온 많은 문화재가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전·전수하고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다보탑과 석가탑, 부석사 무량수전, 법주사 팔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유산이다. 또 순천의 송광사에는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국사전 등 국보와 대반열반경소, 경질, 경패 등 총 12점의 보물 그리고 각종 지방 문화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봉원사 등에서 거행하는 영산재는 세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한용운은 승려이었으며,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꽃피웠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계는 활발하게 해외 선교를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스콘신 주 매디슨 등에 사찰을 설립했다. &lt;br /&gt;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에 신도는 7,619,332명이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 국세통계&lt;br /&gt;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영산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577</id>
		<title>Draft 불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B6%88%EA%B5%90&amp;diff=577"/>
				<updated>2017-07-31T19:42: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lt;br /&gt;
|사건= 순교&lt;br /&gt;
|기록물=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lt;br /&gt;
|개념용어=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lt;br /&gt;
|물품/도구/유물= 등&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을 달고 그 무렵 연등행진을 한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신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탑돌이와 같은 대규모 행사 중 하나이다.&lt;br /&gt;
&lt;br /&gt;
개인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불자의 실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도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사찰에서 외국어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의 예를 들면 “누구든 유서깊은 한국 문화를 배워 익히고 실참실수를 통해 한국의 정통선을 명철하게 체험하여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amp;lt;ref&amp;gt;화계사 홈페이지 http://www.hwagyesa.org/maha/kukjae/about_01.html&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고구려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늦었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인이 불법을 전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6부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겨우 불교를 공인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불교는 늦게 성행했으나,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이 무렵 해외에서의 불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혜초는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널리 알려진 「왕오천출국전」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문왕과 경덕왕의 왕자들은 불상 등을 일본에 전하거나 불사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lt;br /&gt;
&lt;br /&gt;
신라인들은 교역과 유학 등의 명분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신라인들은 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을 세웠고, 거기에 신라 사찰인 신라원을 세웠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중국 산동성 적산에 중건되었다.&lt;br /&gt;
&lt;br /&gt;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 지어진 향가는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 전해오고 있다. 또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남긴 것으로 『일본서기』가 전한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는 고려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했고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또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불교 신봉을 강조했고, 아들을 직접 출가시켰다. 이후 고려는 불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개념과 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불교로 흥한 고려가 지나친 종교관련 행사와 인물들로 인해 망한 것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lt;br /&gt;
&lt;br /&gt;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서울을 현재 위치에 터 잡을 때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이 나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궁궐 안에 절을 세우기도 했고, 법석을 벌였고,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lt;br /&gt;
&lt;br /&gt;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불교 사상도 존중했고, 훈민정음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지금도 불교 교리를 실천하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돌아가신 조상을 극락에 가도록 비는 49재, 100일재 등 여러 종류의 천도재를 지낸다. 젊은이들이 중요한 시험이 100일이 남았다거나, 서로 사귄지 100일째가 되었을 때 파티를 하는 것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짐승이나 가축 등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선을 하는 민간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lt;br /&gt;
&lt;br /&gt;
 또 불교 사찰이 보존해온 많은 문화재가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전·전수하고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다보탑과 석가탑, 부석사 무량수전, 법주사 팔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유산이다. 또 순천의 송광사에는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국사전 등 국보와 대반열반경소, 경질, 경패 등 총 12점의 보물 그리고 각종 지방 문화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봉원사 등에서 거행하는 영산재는 세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한용운은 승려이었으며,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꽃피웠다.&lt;br /&gt;
&lt;br /&gt;
한국 불교계는 활발하게 해외 선교를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스콘신 주 매디슨 등에 사찰을 설립했다. &lt;br /&gt;
&lt;br /&gt;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에 신도는 7,619,332명이다. &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 국세통계&lt;br /&gt;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 [http://www.llf.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연등회 보존위원회]&lt;br /&gt;
*영산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amp;lt;br/&amp;gt;&lt;br /&gt;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신라 불교 유입 과정에 대한 내용 중 씨족이라는 말 대신 귀족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유교’ 주제에 유교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을 서술하였듯이 불교 역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미친 내용도 서술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49제 등을 하는 것을 제시했으면 합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도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자세함과 분량에 비해 고려에서 불교의 역할 및 행사, 조선에서 배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등 설명이 너무 간략하고 적습니다.&amp;lt;br/&amp;gt;&lt;br /&gt;
- 불교의 주요 사상가(스님)와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도 서술하면 어떨까요?&amp;lt;br/&amp;gt;&lt;br /&gt;
- 한국 불교만의 특징을 서술했으면 합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576</id>
		<title>Draft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576"/>
				<updated>2017-07-31T19:38: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1. 한국 최대의 종교&amp;lt;br/&amp;gt; 2. 자벌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amp;lt;br/&amp;gt;  3. 피로 정착된 한국 기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lt;br /&gt;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lt;br /&gt;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기독교&amp;lt;ref&amp;gt;&amp;lt;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amp;lt;/ref&amp;gt;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가톨릭교회, 신교,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lt;br /&gt;
&lt;br /&gt;
기독교 중 가톨릭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가톨릭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조선인 신도들의 안내로 선교사가 입국하여 가톨릭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한국에 온 스페인인 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다.&amp;lt;ref&amp;gt;2017.6.29. 창원 시청 시민홀. 박철 한국외국어대학교 전 총장의 ‘역사 바로알기’ 특강. 세스페데스가 일본군 종군신부였는가에 대한 논란과 관련한 내용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을 통해서였다. 조선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간 조선인들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서양문물에 관한 관심을 가졌든 이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지식습득을 위해서 관련서적을 구해 읽으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그중 대표로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1612~1645년)가 베이징에 머물던 선교사로부터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등을 선물로 받았다고 전한다. 소현세자는 서학보급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귀국한 그 해 급작스런 죽음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곧이어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최초로 파견되었다.&lt;br /&gt;
&lt;br /&gt;
계속된 7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주문모 등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가톨릭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amp;lt;ref&amp;gt;명동대성당 홈페이지 「한국천주교 교회사」&amp;lt;/ref&amp;gt; 박해의 주요 이유로는 아버지와 왕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유교의 교리 중 하나인 삼강오륜을 크게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lt;br /&gt;
&lt;br /&gt;
조선 개화기에 이르러 가톨릭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로마 교황청은 1984년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했고, 2014년 8월 16일에는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lt;br /&gt;
&lt;br /&gt;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전쟁이후 무자비한 경제발전 시기에 명동성당 등 가톨릭교회는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한국의 가톨릭교는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정착,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줄곧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lt;br /&gt;
&lt;br /&gt;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판에도 참여했다.&amp;lt;ref&amp;gt;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 18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amp;lt;/ref&amp;gt; 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신교의 늦었으나, 19세기 말의 혼란한 극동지역 정세를 타파하기 위한 조선 왕실의 묵인 아래 선교가 이루어졌다.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미국인 알렌(1884년)이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위험했기 때문에 외교관 신분으로 입국했다.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목사는 언더우드(1885년)였으며, 같은 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lt;br /&gt;
&lt;br /&gt;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희전문(언더우드가 세운 학당을 모태로 함&amp;lt;ref&amp;gt;연세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yonsei.ac.kr/sc/intro/history1.jsp&amp;lt;/ref&amp;gt;) 이화여대(메리 f.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이 모태&amp;lt;ref&amp;gt;이화여지대학교 홈페이지&lt;br /&gt;
  http://www.ewha.ac.kr/mbs/ewhakr/subview.jsp?id=ewhakr_010601010000&amp;lt;/ref&amp;gt;) 배재학당(아펜젤러 설립&amp;lt;ref&amp;gt;배재고등학교 홈페이지 http://www.paichai.hs.kr/?c=1/11&amp;lt;/ref&amp;gt;) 등 한국의 초기 교육기관과 왕립병원인 광혜원(알렌 설립)으로 출발한 세브란스병원 등의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lt;br /&gt;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에는 이승훈 길선주 등 16명이 포함돼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amp;lt;ref&amp;gt;문화재청 홈페이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lt;br /&gt;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amp;amp;VdkVgwKey=13,02990000,31&lt;br /&gt;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lt;br /&gt;
1919년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lt;br /&gt;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lt;br /&gt;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amp;lt;/ref&amp;gt;에서는 무고한 신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2,600명 중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 600여 명이 헌정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새문안교회 등이 민주화 운동이 기여했으며, 한국의 CBS라디오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공정보도를 했고, 극동방송은 선교사 파견이 불가능한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선교를 위해 설립돼 현재도 방송중이다.&lt;br /&gt;
&lt;br /&gt;
신교는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년이 되는 1984년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신교 신도 수는 967만 여명으로 한국의 종교 중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신도 수가 10만 명을 넘는 대형교회도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https://www.mdsd.or.k 명동대성당]&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amp;lt;br/&amp;gt;&lt;br /&gt;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amp;lt;br/&amp;gt;&lt;br /&gt;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amp;lt;br/&amp;gt;&lt;br /&gt;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575</id>
		<title>Draft 기독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8%B0%EB%8F%85%EA%B5%90&amp;diff=575"/>
				<updated>2017-07-31T19:36: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1. 한국 최대의 종교&amp;lt;br/&amp;gt; 2. 자벌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amp;lt;br/&amp;gt;  3. 피로 정착된 한국 기독교&lt;br /&gt;
|집필자= 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 프란치스코 교황, 이승훈, 알랜, 언더우드, 아펜젤러)&lt;br /&gt;
|장소/공간= 화성시, 세종문화문화광장, 장연군, &lt;br /&gt;
|사건= 제암리 학살사건, 시복시성식&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시복, 복자, 순교, 기독교, 신교, 가톨릭교, 그리스정교,&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기독교&amp;lt;ref&amp;gt;&amp;lt;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ref&amp;gt;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즉 가톨릭교회, 신교, 그리스 정교를 포함한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그리스정교 신도가 거의 없을 만큼 지극히 적어 제외하고, 이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만을 다룬다.&lt;br /&gt;
기독교 중 가톨릭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조선시대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선교사가 들어와 가톨릭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스스로 먼저 신도가 되었고, 이어 조선인 신도들의 안내로 선교사가 입국하여 가톨릭교를 전파하는 순서가 되었다.&lt;br /&gt;
기록에 의하면 가톨릭교회 선교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한국에 온 스페인인 신부 세스페데스(G. de Cespedes)였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를 한국의 남해안에 파견,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게 했다. 신부가 조선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영세를 받았다.&amp;lt;ref&amp;gt;2017.6.29. 창원 시청 시민홀. 박철 한국외국어대학교 전 총장의 ‘역사 바로알기’ 특강. 세스페데스가 일본군 종군신부였는가에 대한 논란과 관련한 내용이다.&amp;lt;/ref&amp;gt;&lt;br /&gt;
그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을 통해서였다. 조선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던 베이징에 간 조선인들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서양문물에 관한 관심을 가졌든 이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지식습득을 위해서 관련서적을 구해 읽으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그중 대표로 인질로 중국에 가 있던 소현세자(1612~1645년)가 베이징에 머물던 선교사로부터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등을 선물로 받았다고 전한다. 소현세자는 서학보급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귀국한 그 해 급작스런 죽음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lt;br /&gt;
조선인 최초의 신도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순조롭게 전교가 이루어지던 중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한 신도들이 처형되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곧이어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최초로 파견되었다.&lt;br /&gt;
계속된 7차례의 커다란 박해로 주문모 등 외국인 신부는 물론 1만여 명의 조선인들도 가톨릭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amp;lt;ref&amp;gt;명동대성당 홈페이지 「한국천주교 교회사」&amp;lt;/ref&amp;gt; 박해의 주요 이유로는 아버지와 왕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유교의 교리 중 하나인 삼강오륜을 크게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lt;br /&gt;
조선 개화기에 이르러 가톨릭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lt;br /&gt;
로마 교황청은 1984년 순교한 한국인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했고, 2014년 8월 16일에는 124위를 위한 시복 미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했다. 시복식을 집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했으며 5월 29일을 그분들의 축일로 허락했다.&lt;br /&gt;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전쟁이후 무자비한 경제발전 시기에 명동성당 등 가톨릭교회는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lt;br /&gt;
한국의 가톨릭교는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정착,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줄곧 교세가 성장해 왔다. 현재(2014년) 389만여 명이 믿고 있으며, 2,051개의 성당 건물이 있다.&lt;br /&gt;
한편 한국에 신교가 전래된 것은 가톨릭교회보다는 늦으며. 한국인 최초의 교인은 1883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다. 그는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판에도 참여했다.&amp;lt;ref&amp;gt;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 1882년에 번역되었다. 이로써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미 완성된 성경 번역본으로 전교할 수 있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됐다.&amp;lt;ref&amp;gt; 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에 세웠으나, 지금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복원했다.&lt;br /&gt;
신교의 늦었으나, 19세기 말의 혼란한 극동지역 정세를 타파하기 위한 조선 왕실의 묵인 아래 선교가 이루어졌다. 한국에 처음 온 서양 목사는 미국인 알렌(1884년)이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위험했기 때문에 외교관 신분으로 입국했다.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목사는 언더우드(1885년)였으며, 같은 해 아펜젤러 목사도 들어왔다.&lt;br /&gt;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개혁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희전문(언더우드가 세운 학당을 모태로 함&amp;lt;ref&amp;gt;연세대학교 홈페이지 http://www.yonsei.ac.kr/sc/intro/history1.jsp&amp;lt;/ref&amp;gt;) 이화여대(메리 f.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이 모태&amp;lt;ref&amp;gt;이화여지대학교 홈페이지&lt;br /&gt;
  http://www.ewha.ac.kr/mbs/ewhakr/subview.jsp?id=ewhakr_010601010000&amp;lt;/ref&amp;gt;) 배재학당(아펜젤러 설립&amp;lt;ref&amp;gt;배재고등학교 홈페이지 http://www.paichai.hs.kr/?c=1/11&amp;lt;/ref&amp;gt;) 등 한국의 초기 교육기관과 왕립병원인 광혜원(알렌 설립)으로 출발한 세브란스병원 등의 의료기관 설립을 들 수 있다.&lt;br /&gt;
신교는 가톨릭교보다는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에는 이승훈 길선주 등 16명이 포함돼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학살 사건&amp;lt;ref&amp;gt;문화재청 홈페이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lt;br /&gt;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amp;amp;VdkVgwKey=13,02990000,31&lt;br /&gt;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lt;br /&gt;
1919년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lt;br /&gt;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lt;br /&gt;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amp;lt;/ref&amp;gt;에서는 무고한 신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다 순교한 2,600명 중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 600여 명이 헌정되어 있다.&lt;br /&gt;
새문안교회 등이 민주화 운동이 기여했으며, 한국의 CBS라디오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공정보도를 했고, 극동방송은 선교사 파견이 불가능한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선교를 위해 설립돼 현재도 방송중이다.&lt;br /&gt;
신교는 1884년을 한국 전래연도로 삼았고, 100년이 되는 1984년 100주년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거행했다.&lt;br /&gt;
한국의 신교 신도 수는 967만 여명으로 한국의 종교 중 가장 많으며, 교회의 건물도 55,767개에 달한다. 신도 수가 10만 명을 넘는 대형교회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통계청&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https://www.mdsd.or.k 명동대성당]&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300년이 아니라 “그 후 약 100년 뒤”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82년’는 오타이므로 정확한 연도를 표기해야 한다. 마지막 문단의 ‘기독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는 북한동포 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민주화운동 및 북한동포 선교 활동에 기여하였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장은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출처 및 근거자료가 통계청만 제시되어 있다. 이 글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내용의 짜임새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용이 산만한 인상을 줍니다.&amp;lt;br/&amp;gt;&lt;br /&gt;
- 그 300년 뒤 정식으로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였다 →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임진왜란으로 부터 300년 뒤가 아닙니다.&amp;lt;br/&amp;gt;&lt;br /&gt;
- 서양학문 즉 실학으로 접근했다 : 서양학문이 실학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겠습니다. → 실학자들이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천주교를 서학(西學)이 아닌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 실학자들에 대해 서술할 것. 이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다.&amp;lt;br/&amp;gt;&lt;br /&gt;
-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개항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서상륜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3년에는 아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이다. 서상륜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한국의 사회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초기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주요 기관명과 각 기관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역할로 학교 및 교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좋을 듯.  화성시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사건 자체에 대해 설명할 것&amp;lt;br/&amp;gt;&lt;br /&gt;
- 신약성경은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982년에 번역되었다. → 정확한 년도 확인해서 수정할 것&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574</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574"/>
				<updated>2017-07-31T19:27: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  종교 이상의 힘을 지녔던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lt;br /&gt;
&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lt;br /&gt;
&lt;br /&gt;
이를 가정, 마을, 국가에서 행하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의 터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이를 높여서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현재 어의가 확대되어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집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터주를 놓는다.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터주는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lt;br /&gt;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씨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lt;br /&gt;
둘째로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lt;br /&gt;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2016.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 11호』&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lt;br /&gt;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주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lt;br /&gt;
&lt;br /&gt;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 유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국가가 행하는 신앙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타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2003,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점,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다시 등장했고,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마을신앙의 사회사&lt;br /&gt;
====관련자료====&lt;br /&gt;
*왕조실록&lt;br /&gt;
*삼국유사&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합니다. 원고 검토를 위해 찾아보니,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입니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네요.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요?&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친절히 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573</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573"/>
				<updated>2017-07-31T19:27: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  종교 이상의 힘을 지녔던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에서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lt;br /&gt;
이를 가정, 마을, 국가에서 행하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의 가정은 자기들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집의 터를 지켜주는 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속 신앙의 표시이다. 이를 높여서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현재 어의가 확대되어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집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터주를 놓는다. 이 신에게는 가을 농사가 끝나면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lt;br /&gt;
터주는 5~6ℓ가 들어가는 옹기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고, 장독대 옆에 놓는다. 그리고는 매년 햇벼가 나면 갈아 넣고 고사를 지냈다. 지난해 넣은 벼는 정미하여 떡을 만들어 가족끼리만 먹었다. 남에게 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다.&lt;br /&gt;
불을 의미하는 조왕신을 섬겼다. 부엌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씨를 관리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였다. 불씨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불씨를 꺼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lt;br /&gt;
집 전체를 보호하며 가장을 지키는 성주신도 모셨다. 성주신은 집 안의 중심인 대청 중심에 놓인 뒤주나 쌀이 담긴 작은 항아리 등을 대들보에 모시기도 했다.&lt;br /&gt;
이밖에도 자손을 돌본다는 삼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 등이 있어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빌었다.&lt;br /&gt;
둘째로 마을 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이다. 지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서 상호부조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빈다. 그 대표가 동제다. 동제는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로 온 마을사람들을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농촌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다. &lt;br /&gt;
산신제, 서낭제, 당산제 용왕제&amp;lt;ref&amp;gt;김도현, 2016. 「동해안지역의 민간신앙 전통과 이사부」, 『이사부와 동해 제 11호』&amp;lt;/ref&amp;gt; 등 지역과 마을의 위치에 따라 행하는 종류가 다르다.&lt;br /&gt;
정월 초나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관이 지낸다.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주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황토는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색이며 금줄은 경계를 표시한다.&lt;br /&gt;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제는 마을민의 단합과 유대강화를 위한 연출이며,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의 행위이기도 하다.&lt;br /&gt;
전국의 수많은 마을 신앙 중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와,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amp;lt;ref&amp;gt;문화재청 인류무형문화 유산&amp;lt;/ref&amp;gt;&lt;br /&gt;
마지막으로 국가가 행하는 신앙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대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기우제도 국가신앙의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조선에는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있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한국의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경제개발과 미신타타 정책에 밀려났다가&amp;lt;ref&amp;gt;정구영, 2003, 새마을운동이 민간신앙에 미친 영향,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amp;lt;/ref&amp;gt; 21세기 들어 지역마다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라기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행한다. 점, 동지 팥죽, 장승, 솟대가 다시 등장했고,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마을신앙의 사회사&lt;br /&gt;
====관련자료====&lt;br /&gt;
*왕조실록&lt;br /&gt;
*삼국유사&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합니다. 원고 검토를 위해 찾아보니,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입니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네요.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요?&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친절히 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572</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572"/>
				<updated>2017-07-31T19:22: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인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의견2의 부분은 거의 다 수용하여 고쳤음&lt;br /&gt;
● ‘덕수궁’ 궁호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것을 참조하였음.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 2개의 원고 중 황인희 집필 원고가 내용이 더 충실하다. 황인희 원고를 중심으로 황정욱 원고 중 일부를 포함하여 보완하면 좋을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 보완 및 수정할 내용&amp;lt;br/&amp;gt;&lt;br /&gt;
①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 궁궐에서 주요한 대부분의 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 왕릉에 참배 또는 능행으로 고칠 것, &amp;lt;br/&amp;gt;&lt;br /&gt;
②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 세조 임금은 제7왕 &amp;lt;br/&amp;gt;&lt;br /&gt;
③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인 경우가 많다.&amp;lt;br/&amp;gt;&lt;br /&gt;
④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덕수궁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는 것 정도는 포함시키면 궁궐로서의 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amp;lt;br/&amp;gt;&lt;br /&gt;
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국권을 빼앗았다.&amp;lt;br/&amp;gt;&lt;br /&gt;
⑥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 소속된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amp;lt;br/&amp;gt;&lt;br /&gt;
⑦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 덕수궁의 명칭은 일제가 ‘경운궁’의 품위를 깍으려고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한 후, 사실이면 이 부분은 없애도 될 것 같습니다. &amp;lt;br/&amp;gt;&lt;br /&gt;
⑧ 경희궁은 조선후기 이궐로 많은 왕들이 즉위를 하고 집무를 보았던 왕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궁궐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너무 내용이 약소합니다. 좀 더 보충했으면 합니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 원고에서 내용을 요약, 축소했으면 하는 내용 :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고종은 (1896년)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amp;lt;br/&amp;gt;&lt;br /&gt;
①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6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의식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외전, 관료들이 일하는 궐내각사,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전, 세자와 세자빈이 사는 동궁, 왕실가족과 후궁, 상궁, 궁녀 등이 생활하는 공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amp;lt;br/&amp;gt;&lt;br /&gt;
②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amp;lt;br/&amp;gt;&lt;br /&gt;
③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국왕 집무실인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광화문도 2차례의 중건을 통해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98%EA%B6%A4&amp;diff=571</id>
		<title>Draft 의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98%EA%B6%A4&amp;diff=571"/>
				<updated>2017-07-31T19:20: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의궤&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도감]], [[실록청]], 찬수청, 의궤청, [[세종]], 의인왕후, 강화부, [[의정부]], [[예조]], [[춘추관]]&lt;br /&gt;
|장소/공간=[[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외규장각&lt;br /&gt;
|사건=[[임진왜란]], [[병인양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왕, 세자, 세자빈, 왕비, [[책례]], [[국장]], 빈전, 혼전, 부묘, 산릉, 존호, 능원, [[실록]], 선원보, [[어진]], [[영정]], 반차도, 복제, 장구, 의물, [[이두]], 차자, [[&amp;lt;국조오례의&amp;gt;]], [[오례]], &amp;lt;빈전혼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 &amp;lt;을묘원행정리의궤&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lt;br /&gt;
&lt;br /&gt;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amp;lt;국조오례의&amp;gt;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amp;lt;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amp;gt;와 &amp;lt;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amp;gt;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 예조 · 춘추관 · 강화부(江華府)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lt;br /&gt;
&lt;br /&gt;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 ·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amp;lt;을묘원행정리의궤&amp;gt;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 중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 소장본과 같은 것도 있지만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lt;br /&gt;
====관련자료====&lt;br /&gt;
*『조선조의 의궤(儀軌)』(박병선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lt;br /&gt;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박병선, 태학사, 200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병인양요 때 프랑스로부터 약탈당했던 의궤 중 일부가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내용도 추가해야 한다. 또한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국립중앙박물관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의궤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황인희 원고를 기본으로 삼고, 황정욱의 글 중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되어 있는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5년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amp;lt;br/&amp;gt;&lt;br /&gt;
-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나? 청계천변에 타일로 제작해 놓은 &amp;lt;원행을묘정리의궤&amp;gt;의 반차도?&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9%95%EB%A6%89&amp;diff=570</id>
		<title>Draft 왕릉</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9%95%EB%A6%89&amp;diff=570"/>
				<updated>2017-07-31T19:18: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조선 왕릉&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능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lt;br /&gt;
|장소/공간= 도성, 개성 &lt;br /&gt;
|사건= &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상신, 효, 혈통, 지위 계승의 영속성, &amp;lt;국조오례의&amp;gt;, 풍수지리 상 명당, 세계문화유산, 석물, 홍살문, 참도, 정자각, 문무석인,  강(岡), &amp;lt;국장도감의궤&amp;gt;, &amp;lt;빈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 실록, 의궤, 능지, 제례, 속절제, 기신제,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 청명, 종묘 제례, 사직 대제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에는 조선 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다. 왕릉은 그들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祖上神)의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또 후손 왕들에게는 효로써 마음을 다하면서 혈통과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조선 왕릉의 기본 구조는 &amp;lt;국조오례의&amp;gt;라는 예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lt;br /&gt;
&lt;br /&gt;
왕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풍수지리 상 명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이 있는 도성에서 약 40킬로미터 안에 위치해야 한다. 왕이 능에 참배를 해야 하는데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주변 약 10㎞ 정도에는 다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곳에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소나무들을 심었고 그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도 안 되었다. &lt;br /&gt;
&lt;br /&gt;
원래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의 개성에 있는 두 기를 제외한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홍살문에서 시작하는 참도와 정자각의 절제된 건축 형태, 각 능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문무석인의 조형 등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조선 왕릉의 눈에 띠는 특징 중 하나는, 왕릉이 ‘강(岡)’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강은, 땅 속에 흐르는 생기의 저장 탱크라는 의미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왕권의 시각적 과시를 위한 장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유택인 능침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계의 능침 공간에는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 단 아래인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품을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 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인공 연못이 있다. &lt;br /&gt;
&lt;br /&gt;
풍수 이론을 적용하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조선 왕릉의 가치를 더해준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amp;lt;산릉도감의궤&amp;gt;를 비롯한 왕릉 관련 기록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새 임금이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한다. 그리고 왕릉을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에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실록(實錄)과 의궤(儀軌), 능지(陵誌)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실록에도 왕릉에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만 의궤와 능지를 별도로 만들어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겨두었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장례에 관련한 &amp;lt;국장도감의궤&amp;gt;, &amp;lt;빈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가 있다. &amp;lt;산릉도감의궤&amp;gt;에는 왕릉 조성을 전후로 논의된 내용, 각종 공문, 건축하는 데 소용된 물품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능지는 능역을 지키는 시행 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절목과 제례를 행할 때의 절차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는 능관(陵官)이 업무를 행하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에는 능역의 위치 및 건물의 규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요소 등도 기록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이런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조선시대의 왕실 역사는 물론 제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amp;lt;산릉도감의궤&amp;gt;에는 산릉을 조성하는 공정은 물론 흙을 나르는 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어 이 의궤 자체만도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제례 등을 통해 물리적 보존은 물론 무형적 문화 전통까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 왕조가 망한 후 왕릉의 제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제례를 계속 이어와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왕릉에서는 매년 속절제(俗節祭)와 기신제(忌辰祭)를 지낸다. 속절제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날인 정월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과 청명(淸明)날에 지내는 제례이다. 또 기신제는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난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릉 제례를 종묘 제례와 사직 대제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정성껏 모셨다.  &lt;br /&gt;
&lt;br /&gt;
* ‘강(岡)’은 한자가 그대로 언덕이라는 뜻임.&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 문화재청 조선왕릉 홈페이지&lt;br /&gt;
* 황인희,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북21, 2010.&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lt;br /&gt;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lt;br /&gt;
* 『옛무덤의 사회사』(장철수, 웅진출판사, 1995)&lt;br /&gt;
* 『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황인희, 북21, 201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문화재청,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문화재청, &amp;lt;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기행&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발췌 및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amp;lt;br/&amp;gt;&lt;br /&gt;
왕릉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 시대에 따라, 왕이나 왕비의 살아 있을 때, 혹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에 따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능의 지형에 따라, 당시 나라의 형편에 따라 다 그 모습이 달라졌다. → 이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했으면 흥미로울 것 같다.&amp;lt;br/&amp;gt;&lt;br /&gt;
- 왕릉을 구성하는 홍살문, 참도, 정자각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왕릉 지도(?)를 실었으면 한다. 왕릉의 공간, 구조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왕릉이 몇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문무석은 왜 세워놓았는지 등을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왕릉이 ‘강(岡)’이라 언덕 위에 있다는 것이다 → 무슨 뜻인지 쉽게 풀어서 설명할 것. 왕릉이 있는 위치를 ‘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인가?&amp;lt;br/&amp;gt;&lt;br /&gt;
- 의궤, 능지에 대한 설명은 좀 더 요약 및 축소해도 될 듯하다.&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amp;lt;br/&amp;gt;&lt;br /&gt;
① 총 42기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amp;lt;br/&amp;gt;&lt;br /&gt;
② 조영된 조선왕릉은 엄격한 규범에 따라 왕의 유택인 능침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산 자들을 위한 진입공간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능침공간은 3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직경 18미터 높이 4미터 정도의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봉분 하단은 화강암 병풍석과 돌난간으로 감쌌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자리한다. 봉분의 한 단 아래에는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마주하고 있다. 다시 한단 아래로 내려가서 무석인과 석마가 좌우 한 쌍씩 있다. 영조 이후에는 두 단을 합쳐서 한 공간에 문무석상과 석마를 배치했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수품을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건물이다. 정자각과 좌우 인접하여 비각과 수복방, 수라간 등이 있다. 진입공간에는 금천교와 능묘관리인이 근무하는 재실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비보로 설치한 인공연못이 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569</id>
		<title>Draft 조선왕조실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amp;diff=569"/>
				<updated>2017-07-31T19:16: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lt;br /&gt;
|집필자= 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 태조, 철종, 순종, 실록청, 춘추관, 도청, 사관, 총재관, 도청 당상,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lt;br /&gt;
|장소/공간= 자하문, 차일암,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태인, 금산, 정읍 내장산 &lt;br /&gt;
|사건= 무오사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조선,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amp;lt;순종황제실록&amp;gt;, 사초,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amp;lt;조보&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amp;lt;춘추관 시정기&amp;gt;, &amp;lt;태조실록&amp;gt;, &amp;lt;명종실록&amp;gt;, &amp;lt;태조실록&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amp;lt;승정원일기&amp;gt; &amp;lt;의정부등록&amp;gt;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amp;lt;조보(朝報)&amp;gt; &amp;lt;비변사등록&amp;gt; &amp;lt;일성록&amp;gt;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lt;br /&gt;
&lt;br /&gt;
사초는 전 왕 재위 시에 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기록으로 실록의 중심 자료가 되었다. 네 명의 전임 사관은 궁중에서 항상 임금 곁에 있다가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과 풍속의 미악(美惡)과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는 성격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필화(筆禍)를 막기 위해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에도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엄하게 단속한 덕분에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사초에 대한 비밀 유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같은 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사초에는 작성한 사관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관은 자신이 써놓은 사초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 또는 바꿔 쓰는 일이 간혹 있었다. 또 당쟁이 심할 때는 집권당의 사관이 자기 당파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여 공정성을 잃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실록이 &amp;lt;선조수정실록&amp;gt; · &amp;lt;현종개수실록&amp;gt; · &amp;lt;경종개수실록&amp;gt; 등이다.&lt;br /&gt;
&lt;br /&gt;
실록 편찬은, 사초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실록청에 모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록청의 구성원은 모두 춘추관의 관원이었는데,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을 완성하였다. 첫째 단계는, 셋에서 여섯 개로 나뉜 각 방에서 각종 자료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실을 골라내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심 부서인 도청에서 초고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간 원고를 작성하였다. 셋째, 실록청의 우두머리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간 원고의 잘못을 재수정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낸다.  &lt;br /&gt;
&lt;br /&gt;
실록이 완성되면 이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편찬에 이용한 기본 자료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고와 중간 원고는 서울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세초란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는 것인데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amp;lt;태조실록&amp;gt;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amp;lt;태조실록&amp;gt;부터 &amp;lt;명종실록&amp;gt;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amp;lt;고종황제실록&amp;gt; · &amp;lt;순종황제실록&amp;gt;으로 따로 분류한다. 이 두 황제 실록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27부터 1932년 사이에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황제와 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 왜곡이 많다. &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조선왕조실록&amp;gt;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 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국역본이 413책이 완성되어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lt;br /&gt;
====관련자료====&lt;br /&gt;
*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lt;br /&gt;
* 『조선왕조실록』 1―범례―(신석호, 국사편찬위원회, 1955)&lt;br /&gt;
* 「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이성무, 『민족문화』 17, 1994)&lt;br /&gt;
*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정구복,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lt;br /&gt;
* 「조선전기 실록과 사론」(차장섭, 『국사관논총』 32, 1992)&lt;br /&gt;
*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한우근, 『진단학보』 66, 1988)&lt;br /&gt;
* 「조선전기의 사관」(차장섭, 『경북사학』 6, 1983)&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태도와 사관의 역사의식」(차용걸, 『한국사론』 6, 국사편찬위원회, 1979)&lt;br /&gt;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 5, 1960)&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후세 → 후기&amp;lt;br/&amp;gt;&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실록은 1927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amp;lt;br/&amp;gt;&lt;br /&gt;
②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여 413책으로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 제작되었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교열본'''==&lt;br /&gt;
&lt;br /&gt;
[[분류: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568</id>
		<title>Draft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568"/>
				<updated>2017-07-31T19:15: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lt;br /&gt;
|장소/공간=[[종묘]], 정전, [[영녕전]] &lt;br /&gt;
|사건=[[일제강점기]], 광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어 탁조라고도 함.&lt;br /&gt;
● 영녕전 1991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가 모셔져서 총 34위임.(종묘 홈피 참조)&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위키백과&lt;br /&gt;
====관련자료====&lt;br /&gt;
*홀기해설(宗廟大祭笏記解說)』(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75)  &lt;br /&gt;
*[http://www.jongmyo.net/ 종묘제례 홈페이지]&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밑 줄 친 부분은 종묘 제례를 설명할 때 필요한 내용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설]부분의 내용과 일치한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의 전체 내용은 종묘제례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종묘제례를 설명하는 세부 내용과 글의 전개 방식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종묘제례의 설명과 차별성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일부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출처 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종묘제례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lt;br /&gt;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기울기가 가팔라 → 다른 표현 없을까요? 기울기가 심해서?&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왕은 총 27명인데, 정전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 영녕전에는 16명의 왕과 17명의 왕비가 모셔졌는데, 각각 다른 전에 구별하여 모신 기준을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4대 선조는 어디에 모셨는지?&amp;lt;br/&amp;gt;&lt;br /&gt;
- 종묘 건축의 특징은 계속 증축되었다는 것, 그럼 언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도 간략히 적어주었으면. &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황인희의 글은 영녕전에 33명의 신주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황정욱 글에는 34명의 신주가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서 수정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②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서거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amp;lt;br/&amp;gt;&lt;br /&gt;
③ 종묘의 위치 :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amp;lt;br/&amp;gt;&lt;br /&gt;
④ 황인희는 종묘제례의 순서를 자세히 썼는데, 황정욱은 이를 간략하게 3절차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서 정리하였으면 한다. &lt;br /&gt;
⑤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이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567</id>
		<title>Draft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567"/>
				<updated>2017-07-31T19:14: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lt;br /&gt;
|장소/공간=[[종묘]], 정전, [[영녕전]] &lt;br /&gt;
|사건=[[일제강점기]], 광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lt;br /&gt;
&lt;br /&gt;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lt;br /&gt;
&lt;br /&gt;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lt;br /&gt;
&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lt;br /&gt;
&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lt;br /&gt;
&lt;br /&gt;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어 탁조라고도 함.&lt;br /&gt;
● 영녕전 1991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가 모셔져서 총 34위임.(종묘 홈피 참조)&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위키백과&lt;br /&gt;
====관련자료====&lt;br /&gt;
*홀기해설(宗廟大祭笏記解說)』(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75)  &lt;br /&gt;
*[http://www.jongmyo.net/ 종묘제례 홈페이지]&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밑 줄 친 부분은 종묘 제례를 설명할 때 필요한 내용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설]부분의 내용과 일치한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의 전체 내용은 종묘제례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종묘제례를 설명하는 세부 내용과 글의 전개 방식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종묘제례의 설명과 차별성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일부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출처 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종묘제례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lt;br /&gt;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기울기가 가팔라 → 다른 표현 없을까요? 기울기가 심해서?&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왕은 총 27명인데, 정전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 영녕전에는 16명의 왕과 17명의 왕비가 모셔졌는데, 각각 다른 전에 구별하여 모신 기준을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4대 선조는 어디에 모셨는지?&amp;lt;br/&amp;gt;&lt;br /&gt;
- 종묘 건축의 특징은 계속 증축되었다는 것, 그럼 언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도 간략히 적어주었으면. &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황인희의 글은 영녕전에 33명의 신주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황정욱 글에는 34명의 신주가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서 수정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②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서거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amp;lt;br/&amp;gt;&lt;br /&gt;
③ 종묘의 위치 :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amp;lt;br/&amp;gt;&lt;br /&gt;
④ 황인희는 종묘제례의 순서를 자세히 썼는데, 황정욱은 이를 간략하게 3절차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서 정리하였으면 한다. &lt;br /&gt;
⑤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이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566</id>
		<title>Draf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566"/>
				<updated>2017-07-31T19:11: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 엷어지는 유리천장&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여성가족부, 여성경제인연합회&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공무원집단항명&lt;br /&gt;
|기록물=공공부문 여성대표성제고계획&lt;br /&gt;
|개념용어=[[유리천장]], 가족 내 의사결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lt;br /&gt;
&lt;br /&gt;
한국은 2015년 7월 1일부터 「양성평등기본법」을 시행중이다. 이 법의 기본 이념은 “개인의 존엄과 인권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차별적 의식과 관행을 해소하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참여와 대우를 받고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책임과 권리를 공유함으로써 실질적 양성평등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이 법의 목적은 “대한민국 헌법의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은 “가족과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한 대우를 받고 양성평등한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책무”도 규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을 공포,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도록 본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때까지 여러 분야에서 차별받던 여성들의 권익을 보장하도록 강력하게 주문했고, 여성의 참여도가 낮은 분야가 있을 경우 남녀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등을 부여했다.&lt;br /&gt;
&lt;br /&gt;
여성이 임신·출산 및 수유 기간에는 특별히 보호받아야 하며, 특히 이로 인하여 인사 승진 급여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했다. 가정 내 폭력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했다. 저소득 모자가정·미혼모·가출여성 등은 보호를 받으며, 대충매체를 통해 남녀평등 의식을 확산토록 했다. 또 성희롱예방을 위한 교육,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등도 마련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2015년 여성의 사회적 지위 점검’&amp;lt;ref&amp;gt;이 점검에 앞서 2013년 청와대 여성가족부 통계청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이 참여하는 테스크 포스 팀을 구성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측정할 지표를 개발했음. 경제활동, 의사결정, 안전, 일·가정 양립, 건강과 교육 등 5개 분야 46개 지료로 되어 있음.&amp;lt;/ref&amp;gt;에 따르면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녀 각각 74.0%와 51.3%였다. 아직도 큰 격차가 존재하지만 이는 전년도보다 각각  0.8%p와 1.1%p가 증가한 것이다. 남성 대비 여성 임금비율은 68.1%에서 67.0%로 1.1%p 축소되어 여성들의 근로상황이 매년 향상되고 있음을 나타낸다.&lt;br /&gt;
&lt;br /&gt;
월평균 근로시간은 여성이 남성보다 10.9시간이나 짧았고, 청년층 고용률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오히려 3.6%p 높았으며(여성 42.5% 남성 38.9%), 이는 전년보다 각각 1.2%p와 0.8%p가 증가한 수치다. 이를 청년층에서 보면 여성근로자가 남성근로자보다 더 많이 고용된 셈이다.&lt;br /&gt;
&lt;br /&gt;
반면 기업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관리직 여성 비율은 11.1%로 낮다. 고위공무원단 여성비율도 4.5%에 불과해 개선되어야할 분야다. 하지만 전체 공무원의 44.6%(2015년)가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조만간 이 수치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여성지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 이전만하더라도 한국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만 했다. ≪예기≫의 의례(儀禮) &amp;lt;상복전(喪服傳)&amp;gt;에 나오는 말로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하였다.”&amp;lt;ref&amp;gt;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f&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 말은 여성의 삶은 독립적이 아니라 늘 종속적으로 살아야했던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없어진 호주제도에 따르면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남편이 죽고 딸들이 다 출가하고 나면, 나이에 관계없이 친정으로 호적을 옮겨야만 하는 슬픈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일부 문중에서는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인 족보에 며느리는 어느 가문의 몇째 딸로만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남녀차별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던 한국 여성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와 능력, 자존감을 드러내며 살고 있다. 가족관계부에 따라 여자도 당당하게 가계를 대표할 수 있고, 홀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양육할 수도 있다.&lt;br /&gt;
&lt;br /&gt;
20세기 말부터 계속된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입어 여성을 배척f하는 업종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한국의 최초 우주비행사가 여성이었듯, 자동차 경주와 심해잠수부 같은 고위험 고난도 직종에도 여성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금녀 지대였던 사관학교에도 여생도 입학이 허락되었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2017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여생도 3명이 나란히 1,2,3등으로 졸업했다. 여성들의 군내 위상(군의 여성 장교 5.6%)도 계속 향상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육계는 여성이 대세이다. 초등학교 교사 중 전체의 77%인 141,248명이 여교사이다. 중학교는 68%, 고등학교는 50.8%이다.&amp;lt;ref&amp;gt;통계청의 교육 분야 통계 자료&amp;lt;/ref&amp;gt; 1980년대만 해도 여성이 교육계 진출할 때, 남녀가 50대 50으로 강제적인 제약을 받았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오히려 일부 학부모들은 아직도 남학생수가 더 많은데 남학생이 남성성 교육을 받는데 역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여성의 의료계 진출도 크게 늘었다. 1980년 13.6%에 불과하던 여성 의사가 2016년에는 25.1%를 차지했다. 전체 약사의 64%를 여성이 차지, 여성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lt;br /&gt;
여성의 가정 내 지위 변화도 눈에 띈다. 통계에 따르면 가정에서 육아와 교육은 여성이 절대에 가까운 결정권한을 갖고 있다. 40대 가정의 자녀 교육 결정권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 남성만의 결정이 2.6%인데 반해 여성만의 결정은 21.7%이다. 자녀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할 무렵의 연배에서 나타난 수치는 한국의 교육계 전반에 대한 가정에서의 의사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생활비지출 결정은 여성의 의사에 좌우되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40대 부부의 경우 생활비 지출 결정권을 가진 남성이 4.5%인 반면 여성은 17.9%이다.&lt;br /&gt;
특히 젊은 부부일수록 여러 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하다. 이는 결혼 연령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최근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5년간 연상여성과 결혼한 신혼은 전체의 15.6%에 달한다. 이를 두고 여성이 가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아직도 깨뜨려야할 유리천장이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초중고교의 여성 교감·교장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전체 여교원이 차지하는 비율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민간부문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수준이 아직도 낮아, 한국의 10대 재벌 그룹 여성임원 비율은 2.4%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사회학자들은 그러나 한국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각 단체의 적극적인 개선 노력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욱 늘고, 지위도 지금 보다도 더 크게 향상 될 것으로 예상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lt;br /&gt;
*여성가족부&lt;br /&gt;
====관련자료====&lt;br /&gt;
*7개 공공부문별 여성비율 개선현황&lt;br /&gt;
*국립국어원 표준말대사전&lt;br /&gt;
*육군사관학교 보도자료&lt;br /&gt;
*전경련&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게 된 사회적 배경, 정부 정책, 가치관의 변화 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제시된 사례가 한정적이거나 적절치 않다. 글의 주제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변화’를 주제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은 과거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일부의 사례(교육계에서의 여성, 생활비 지출권 결정,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만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으로 볼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높은 성적을 받은 것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기 때문인가? 생활비 지출을 결정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과 교육계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높은 것을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로 보긴 어렵다. &lt;br /&gt;
|의견2=- 본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이 상당수 있을텐데.... 본 주제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보완했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 과거 여성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서술하고, 차별적 지위를 고치고 양성평등을 위해 과거 여성계와 정부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서술할 것. 법적 지위 변화-재산상속권, 호주제, 취직조건, 승진, 업무의 내용 등등&amp;lt;br/&amp;gt;&lt;br /&gt;
- 여성 고등교육의 비율과 사회진출의 모습, 다양한 분야의 진출,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565</id>
		<title>Draf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565"/>
				<updated>2017-07-31T19:10: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 엷어지는 유리천장&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여성가족부, 여성경제인연합회&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공무원집단항명&lt;br /&gt;
|기록물=공공부문 여성대표성제고계획&lt;br /&gt;
|개념용어=[[유리천장]], 가족 내 의사결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lt;br /&gt;
&lt;br /&gt;
한국은 2015년 7월 1일부터 「양성평등기본법」을 시행중이다. 이 법의 기본 이념은 “개인의 존엄과 인권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차별적 의식과 관행을 해소하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참여와 대우를 받고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책임과 권리를 공유함으로써 실질적 양성평등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또 이 법의 목적은 “대한민국 헌법의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은 “가족과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한 대우를 받고 양성평등한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책무”도 규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을 공포,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도록 본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때까지 여러 분야에서 차별받던 여성들의 권익을 보장하도록 강력하게 주문했고, 여성의 참여도가 낮은 분야가 있을 경우 남녀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등을 부여했다.&lt;br /&gt;
&lt;br /&gt;
여성이 임신·출산 및 수유 기간에는 특별히 보호받아야 하며, 특히 이로 인하여 인사 승진 급여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했다. 가정 내 폭력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했다. 저소득 모자가정·미혼모·가출여성 등은 보호를 받으며, 대충매체를 통해 남녀평등 의식을 확산토록 했다. 또 성희롱예방을 위한 교육,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등도 마련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2015년 여성의 사회적 지위 점검’&amp;lt;ref&amp;gt;이 점검에 앞서 2013년 청와대 여성가족부 통계청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이 참여하는 테스크 포스 팀을 구성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측정할 지표를 개발했음. 경제활동, 의사결정, 안전, 일·가정 양립, 건강과 교육 등 5개 분야 46개 지료로 되어 있음.&amp;lt;/ref&amp;gt;에 따르면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녀 각각 74.0%와 51.3%였다. 아직도 큰 격차가 존재하지만 이는 전년도보다 각각  0.8%p와 1.1%p가 증가한 것이다. 남성 대비 여성 임금비율은 68.1%에서 67.0%로 1.1%p 축소되어 여성들의 근로상황이 매년 향상되고 있음을 나타낸다.&lt;br /&gt;
&lt;br /&gt;
월평균 근로시간은 여성이 남성보다 10.9시간이나 짧았고, 청년층 고용률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오히려 3.6%p 높았으며(여성 42.5% 남성 38.9%), 이는 전년보다 각각 1.2%p와 0.8%p가 증가한 수치다. 이를 청년층에서 보면 여성근로자가 남성근로자보다 더 많이 고용된 셈이다.&lt;br /&gt;
&lt;br /&gt;
반면 기업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관리직 여성 비율은 11.1%로 낮다. 고위공무원단 여성비율도 4.5%에 불과해 개선되어야할 분야다. 하지만 전체 공무원의 44.6%(2015년)가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조만간 이 수치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lt;br /&gt;
&lt;br /&gt;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여성지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 이전만하더라도 한국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만 했다. ≪예기≫의 의례(儀禮) &amp;lt;상복전(喪服傳)&amp;gt;에 나오는 말로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하였다.”&amp;lt;ref&amp;gt;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f&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 말은 여성의 삶은 독립적이 아니라 늘 종속적으로 살아야했던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없어진 호주제도에 따르면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남편이 죽고 딸들이 다 출가하고 나면, 나이에 관계없이 친정으로 호적을 옮겨야만 하는 슬픈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일부 문중에서는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인 족보에 며느리는 어느 가문의 몇째 딸로만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남녀차별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던 한국 여성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와 능력, 자존감을 드러내며 살고 있다. 가족관계부에 따라 여자도 당당하게 가계를 대표할 수 있고, 홀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양육할 수도 있다.&lt;br /&gt;
&lt;br /&gt;
20세기 말부터 계속된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입어 여성을 배척f하는 업종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한국의 최초 우주비행사가 여성이었듯, 자동차 경주와 심해잠수부 같은 고위험 고난도 직종에도 여성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금녀 지대였던 사관학교에도 여생도 입학이 허락되었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2017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여생도 3명이 나란히 1,2,3등으로 졸업했다. 여성들의 군내 위상(군의 여성 장교 5.6%)도 계속 향상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교육계는 여성이 대세이다. 초등학교 교사 중 전체의 77%인 141,248명이 여교사이다. 중학교는 68%, 고등학교는 50.8%이다.&amp;lt;ref&amp;gt;통계청의 교육 분야 통계 자료&amp;lt;/ref&amp;gt; 1980년대만 해도 여성이 교육계 진출할 때, 남녀가 50대 50으로 강제적인 제약을 받았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오히려 일부 학부모들은 아직도 남학생수가 더 많은데 남학생이 남성성 교육을 받는데 역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여성의 의료계 진출도 크게 늘었다. 1980년 13.6%에 불과하던 여성 의사가 2016년에는 25.1%를 차지했다. 전체 약사의 64%를 여성이 차지, 여성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lt;br /&gt;
여성의 가정 내 지위 변화도 눈에 띈다. 통계에 따르면 가정에서 육아와 교육은 여성이 절대에 가까운 결정권한을 갖고 있다. 40대 가정의 자녀 교육 결정권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 남성만의 결정이 2.6%인데 반해 여성만의 결정은 21.7%이다. 자녀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할 무렵의 연배에서 나타난 수치는 한국의 교육계 전반에 대한 가정에서의 의사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생활비지출 결정은 여성의 의사에 좌우되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40대 부부의 경우 생활비 지출 결정권을 가진 남성이 4.5%인 반면 여성은 17.9%이다.&lt;br /&gt;
특히 젊은 부부일수록 여러 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하다. 이는 결혼 연령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최근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5년간 연상여성과 결혼한 신혼은 전체의 15.6%에 달한다. 이를 두고 여성이 가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아직도 깨뜨려야할 유리천장이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초중고교의 여성 교감·교장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전체 여교원이 차지하는 비율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민간부문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수준이 아직도 낮아, 한국의 10대 재벌 그룹 여성임원 비율은 2.4%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사회학자들은 그러나 한국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각 단체의 적극적인 개선 노력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욱 늘고, 지위도 지금 보다도 더 크게 향상 될 것으로 예상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lt;br /&gt;
*여성가족부&lt;br /&gt;
====관련자료====&lt;br /&gt;
*7개 공공부문별 여성비율 개선현황&lt;br /&gt;
*국립국어원 표준말대사전&lt;br /&gt;
*육군사관학교 보도자료&lt;br /&gt;
*전경련&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게 된 사회적 배경, 정부 정책, 가치관의 변화 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제시된 사례가 한정적이거나 적절치 않다. 글의 주제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변화’를 주제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은 과거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일부의 사례(교육계에서의 여성, 생활비 지출권 결정,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만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으로 볼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높은 성적을 받은 것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기 때문인가? 생활비 지출을 결정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과 교육계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높은 것을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로 보긴 어렵다. &lt;br /&gt;
|의견2=- 본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이 상당수 있을텐데.... 본 주제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보완했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 과거 여성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서술하고, 차별적 지위를 고치고 양성평등을 위해 과거 여성계와 정부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서술할 것. 법적 지위 변화-재산상속권, 호주제, 취직조건, 승진, 업무의 내용 등등&amp;lt;br/&amp;gt;&lt;br /&gt;
- 여성 고등교육의 비율과 사회진출의 모습, 다양한 분야의 진출,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564</id>
		<title>Draft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564"/>
				<updated>2017-07-31T19:05: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모두 함께 사는 한국인 / 국가발전의 동반자&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혼혈아 향가 색목인 [[단일민족]] [[쇄국정책]] 세계화&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다문화 사회 외국인 거주자 200만 시대&lt;br /&gt;
모두가 함께 사는 한국인&lt;br /&gt;
&lt;br /&gt;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 명(전체 인구의 4.0%)을 넘어섰다. 2007년의 100만 명(인구 대비 2.2%)을 넘어선 지 9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중국인이 1,016,607명(49.6%)으로 가장 많고, 베트남 149,384명(7.3%), 미국 140,222명(6.8%), 타일란드 100.860명(4.9%), 필리핀 56,980명(2.8%), 우즈베키스탄 54,490명(2.7%) 순이다.&lt;br /&gt;
&lt;br /&gt;
외국인의 국내 체류자는 2013년 이후 매년 0.2%p~0.4%p씩 증가하여, 전체 인구에 대한 외국인 체류자의 수가 1%p 증가하는데 4년이 걸렸다. 이 같은 증가 추세라면 체류 외국인이 인구의 10%에 이르는 시점이 늦어도 2024년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정부도 이제는 그들의 국내 정착을 돕는데서, 그들이 본격적인 역량을 발휘하도록 방향을 바궜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사회 각 분야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그중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국제결혼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이 미미하지만 매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결혼 이민자의 수는 2011년 144,681명이던 것이 2015년에는 151,608명으로 매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이들 중 84.6%가 여성으로, 한국 남성들이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인 것이다. 여성이 외국인 남성을 신랑으로 맞아들인 것은 15.4%로 남성에 비해 월등하게 적다. 이들로 구성된 다문화&amp;lt;ref&amp;gt;김문희 문영숙 김병희,2012, 「텔레비전 광고 콘텐츠에 묘사된 외국인 모델의 특성 분석」, 광고학연구, Vol.23 No.8, p.9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었지만, 지난 2005년 정부 차원에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 대책을 모색하면서 급부상되었다&amp;lt;/ref&amp;gt; 가구가 전체 가구의 1.5%인 299,241가구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들 가구와 가족 구성원수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도 늘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가족 간에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원활하게 소통되지 않는 점이다. 이에 따라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과 사회적응 등 다방면의 문제를 낳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8년부터 다문화가정 기본계획을 수립, 시행해오고 있으며 2017년에는 다문화 가족이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는 총 1,506억 원의 예산을 들여 가족관계 개선, 정체성 형성, 사회성 발달, 미래설계 등을 지원하는 사업인 ‘다재다능 프로그램’ 운영기관을 105개로 늘리고, 이중언어 가족 환경 조성사업 등을 도울 계획이다.&lt;br /&gt;
&lt;br /&gt;
또 결혼이민자의 안정적인 가족생활과 사회경제적 진출 확대를 위해, 한국생활 정보를 담은 휴대용 안내서 배포하고, ‘다누리 포털’(www.liveinkorea.kr)을 확장한다.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여 취업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인력을 대폭 확충한다. 결혼이민자의 국내 거주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결혼이민자 정착단계별 지원 패키지 프로그램’을 100개 이상으로 확대한다.&lt;br /&gt;
&lt;br /&gt;
다문화교육을 위한 ‘다누리배움터’(www.danurischool.kr)에 유아용 콘텐츠를 개발하여, 다문화 아동들의 다문화교육, 다문화교육자료, 온라인학습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lt;br /&gt;
&lt;br /&gt;
각 방송과 기업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KBS, MBC 등 각 방송사는 한류 드라마에 다문화를 포함하고, 때로는 그들을 주연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또 삼성, 현대, LG U+, 하나금융그룹 등은 공익광고를 통해서도 다문화의 유리함과 우수성을 지원하자고 광고한다. 한 기업광고에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과 함께 “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당신처럼 이 아이는 한국인입니다”라는 카피가 흘러나오며, 아이가 밥을 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군대에 갈 것이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당신처럼!&amp;lt;ref&amp;gt;하나금융그룹 공익광고&amp;lt;/ref&amp;gt;”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자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온 유학생도 10만 명에 가깝다. 2015년 91,332명이 세계 160개국 이상에서 왔다. 이들의 전공은 다양하며 특히 기술 분야와 한국어, 한국 역사, 한류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인력이 부족하자 정부는 1991년부터 산업연수생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이도록 제도화했고, 각 기업들은 외국의 우수한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근로자들을 필요로 했다.&lt;br /&gt;
&lt;br /&gt;
한국이 이처럼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가 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20세기만 해도 그들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말을 순수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썼고, 때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때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외국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외국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네덜란드 영국 등에 산재해 있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에 등장하는 남자도 외국인이며, 고려 시대 ‘쌍화점’에는 아예 색목인으로 못 박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바꾸기 조금씩 허물어졌다. 한국전쟁에 16개 나라가 파병해 한국 국토와 자유와 인권을 지켰다. 그 후 남북이 분단되었고 대한민국은 섬나라처럼 외국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 했다. 그 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1980년대 문호를 활짝 열었다. 한국은  근로자, 무역상, 유학생, 서비스 산업 종사자 등이 해외로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뒤이어 그 나라 사람들이 묻어 왔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 정착했고, 국적까지 취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외국에서 온 이주 근로자들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 한국인들이 꺼리던 육체노동분야로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분야의 대세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정부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근로자의 입국을 허용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연수시키는 동시에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를 포함한 국가가 될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한국 사회는 보다 더 성숙한 사회로 나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lt;br /&gt;
*표준국어대사전 &lt;br /&gt;
*조선왕조실록&lt;br /&gt;
*산업연수생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대상 독자는 외국인임을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혈통주의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국제결혼 등으로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한 것은 불과 2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갖추어 나가고 있으므로 이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기사 제목으로 제시한 “같이 갑시다”는 다문화가 시작되던 초기에는 의미있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한국 사회는 오늘날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으므로 다른 기사 제목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단일민족 및 다문화가정에 대한 과거의 생각, 현재 생각의 변화 및 정책에 대해서도 서술&amp;lt;br/&amp;gt;&lt;br /&gt;
- 현재 다문화사회가 되게 된 상황을 시대 순서별 그리고 상황별로 나누어 설명했으면. 외국인 유입에 대해 표를 만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lt;br /&gt;
- 농촌 총각들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이 2000년대에 들어와 확산되었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비율은?&amp;lt;br/&amp;gt; &lt;br /&gt;
- 본 원고는 다문화사회에 대해 농촌 총각들의 결혼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는데, 그 외 시기별로 변화하는 다른 요소들도 정리하였으면 좋겠다. &lt;br /&gt;
- 다문화가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익광고 등을 현재 한국의 노력과 앞으로의 전망도 적어주었으면.&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563</id>
		<title>Draft 스마트폰과 인터넷</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563"/>
				<updated>2017-07-31T16:5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바꾼 생활패턴&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lt;br /&gt;
|장소/공간=가정&lt;br /&gt;
|사건= 은행 감소, 전화로 가정생활&lt;br /&gt;
|기록물= 한국통계연감, 전전자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탄생&lt;br /&gt;
|개념용어= 스몸비, 홈오토매틱,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중독&lt;br /&gt;
|물품/도구/유물= 스마트폰, 유선전화,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강국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진 휴대전화기가 2017년 현재 6천만대를 넘어서 한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넘어섰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결합한 스마트 시스템 사용이 증가하며 한국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 폰과 인터넷으로 시작된 변화는 한국인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직장생활은 물론 가정생활과 농·어업 금융업 등 산업전반에서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다.&lt;br /&gt;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한국의 중요기업 경영자들은 이미 시·공간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에서나 경영에 관한 모든 일을 스마트 폰과 인터넷으로 처리하고 있다. 일반 개인도 스마트폰으로 영업장을 관리, 조절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과 연계된 가상세계(Virtual Reality)가 한국인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의 KBS 등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국은 2017년부터 UHF방송을 시작했으며 방송과 통신을 연결하는 기술 발달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lt;br /&gt;
&lt;br /&gt;
모든 가정생활도 스마트화 되는 중이다. 집 안의 온도 조절, 청소 등 관리는 물론 가사까지도 스마트폰과 로봇이 연계되어 자동으로 처리한다. 사물인터넷과 연결된 냉장고가 재고가 없는 식료품을 구매하고,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해마다 구입하던 생선과 젓갈류 과일과 야채 구입시기를 조절해 주인의 스마트 폰으로 결제를 유도한다. 이처럼 가정은 홈 오토메이션과 스마트 시스템으로 급격하게 변했다. 사물인터넷은 가정생활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pink&amp;quot;&amp;gt;&lt;br /&gt;
한국에는 최근 스마트워치 붐이 일고 있다. 스마트워치는 시계 기능은 물론이고 주변 온도 습도 고도 등 주변 상태는 물론 하루에 필요한 운동량, 그날 소모한 칼로리, 움직인 거리 등 필요한 기능을 모두 갖추고 상태를 측정한다.&lt;br /&gt;
&lt;br /&gt;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등에는 모든 버스와 지하철의 운행 상황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첫차와 막차 시간, 운행 간격, 승객이 얼마나 타고 있는 것까지도 알려준다.&lt;br /&gt;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스마트 농장과 축사 등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농촌진흥청은 스마트 농사법 전수에 나섰고, ICT를 접목한 스마트 축사를 개발하고, 가축의 행동, 호흡, 맥박, 기침 등 생체지표를 수집, 분석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시스템은 ‘가축 생산성을 최고 30% 향상하고, 노동력을 25% 절감한다. 농촌진흥청은 또 기구를 신설, 국가 빅데이터를 활용한 컨설팅과 환경제어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금융업도 변화중이다. 금융과 기술이 합한 핀테크가 금융업의 개혁을 이끌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은 2017년 초 지점수를 80% 줄이고 인력을 전화 상담과 온라인 업무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의 30대 이하 젊은 세대들이 은행에 가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뱅킹을 통해 손 안에서 금융결제를 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이에 힘입어 출범한 한국의 인터넷 은행은 한국의 금융거래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 이용자들은 간편한 앱을 이용, 가입자끼리 소액의 현금을 간단하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누구든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즉석에서 결제와 송금 등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국내은행에 등록된 스마트폰뱅킹 고객은 3월말 기준 7,734만 명이며 스마트폰뱅킹을 이용한 고객은 4866만 명이다. 이용금액은 전분기와 비교하여 11.7%가 증가하여 통계에 편입된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융업계는 이런 추세가 더욱 급속하게 확장돼 20년 이내에 모든 결제가 스마트 폰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lt;br /&gt;
&lt;br /&gt;
국가의 행정전산망을 이용한 국민생활 변화도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하다. 각종 정부 서류를 집에서 발급받고, 각종 통계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의 보급 증가에 따른 부작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몸비(Smombie)&amp;lt;ref&amp;gt;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이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사람을 말한다. 스마트폰에 집중해 주변 환경을 빨리 인지하기 어려워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거나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으로 인한 사고 위험이 높다.&lt;br /&gt;
&lt;br /&gt;
&amp;lt;/ref&amp;gt;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외국인들이 ‘코리안 범프’라는 ‘어깨빵’, 폰딧불(스마트폰+반딧불이)이라는 말도 새로 생겼다. 스마트 폰에 빠져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무례함이다.&lt;br /&gt;
&lt;br /&gt;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이상 한국인의 5%가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울 만큼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18세에서 29세 사이에서는 18.2%가 스마트폰 사용빈도가 아주 많다.&lt;br /&gt;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File:tn_스마트폰과 인터넷02.jpg | 농촌진흥청이 농가에 제공하는 스마트 딸기농장 (농촌진흥청 제공)&lt;br /&gt;
File:tn_스마트폰과 인터넷03.jpg | 스마트폰으로 관리되는 온실(농촌진흥청 제공)&lt;br /&gt;
File:tn_스마트폰과 인터넷.jpg | 스마트 딸기 농장(농촌진흥청 제공)&lt;br /&gt;
&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보건복지부 통계&lt;br /&gt;
*통계청 통계연감&lt;br /&gt;
*조선일보&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주제는 세계에서 IT 강국으로의 면모와 정보기기로 인한 한국인의 생활의 변화이다.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모습을 서술해야하는데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만을 한 페이지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과 관련한 내용을 줄이고, 가상현실 도입, 사물 인터넷(IOT), 로봇, 웨어러블 기기 등 한국인의 생활변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인터넷 기능을 핸드폰에 넣어 스마트폰이 된 것이니까.&lt;br /&gt;
-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인터넷 기능이 핸드폰에 포함되어 특정 장소가 아닌 어느 장소에서나 인터넷으로 업무, 정보수집, 가정의 전자제품 작동 등이 가능해진 내용 등을 서술하여 과거의 생활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본 원고의 글이 몇 년 후에도 읽힐 것을 대비하여,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년도를 밝혀주었으면 한다. 휴대전화기 6천만대를 넘어선 시점, 외국계 은행의 발표 시기, 금융경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시점 등등&amp;lt;br/&amp;gt;&lt;br /&gt;
- 글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의 폐해도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이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변화한 장점도 서술해주었으면 한다. 스몸비, 어깨빵, 폰딧불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좋겠다. 본 주제에서 구지 3문단씩 할애할 필요가 없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559</id>
		<title>Draf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559"/>
				<updated>2017-07-31T16:13: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lt;br /&gt;
|개념용어=평균기대수명, 경제성장률, 산아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lt;br /&gt;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lt;br /&gt;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시작하며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정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여기에다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몰려온 젊은 세대들의 개인주의에 가까운 의식 변화와 소득 수준 향상 욕구 등에 따라 출산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의 가구가 된다. 이중 혼자 사는 가구가 36.3%로 한국의 대표 가구가 된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보다는 문제를 떠않게 되었다. 이는 자식 없이 사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홀로된 사람이 재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한다.&lt;br /&gt;
&lt;br /&gt;
인간의 수명 연장은 발전의 상징이었다. 한국도 선진 각국의 예처럼 의학기술발달과 의료보험 혜택 증가, 위생시설 확장, 영양상태 증진 등에 투자를 확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노령인구가 출산율 저하와는 역으로 급속하게 증가, 인구구성이 빠르게 고령사회로 접근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섰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가,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노인 문제도 저출산 문제만큼이나 심각하다. 자살, 빈곤, 질병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그중 자살률은(10만 명당 25.8명)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영국의 BBC 방송은 2017년 2월 “2030년에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할 것으로 보여 한국의 노인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노후생활을 보장받기 시작했고,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저출산과 노령화가 종국에는 경제활동 인구 감축으로 이어져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시장도 위축되면서 곧바로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나쁜 사이클로 들어간다는 의미다.&lt;br /&gt;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지금처럼 급속하게 인구의 고령화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10년 후 0%대로 내려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amp;lt;ref&amp;gt;한국은행 경제연구원, 2017,  「인구고령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amp;lt;/ref&amp;gt; 이런 추세라면 경제성장률은 2000~2015년 3.9%성장에서 2016~2025년에는 1.9%로 내려갈 전망이다. 이어 2026~2035년에는 0.4%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2036년에는 생산가능인구비중이 하락하고, 인구증가율 하락에 따른 효과까지 감안하면 성장률이 0%로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였던 것과 비교하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으며, 성장률은 2%대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는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 문제가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자 2012년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국은행은 OECD 회원국의 사례를 분석한 ‘고령화의 원인과 특징’ 보고서에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2~2012년 32개 회원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고, 남녀 간 임금격차가 작을수록 출산율이 높았다. 양육수당 등 가족복지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으로 은퇴 후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고, 주택가격상승률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lt;br /&gt;
&lt;br /&gt;
이 자료에 따르면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1%p 늘면 출산율은 0.31%p 증가했다. 남녀임금격차가 1%p 감소하면 출산율은 0.05%p 늘었다. 복지 지출도 출산율을 높이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보육수당, 출산·휴직 급여, 출산지원금 등이 1%p 높을수록 출산율도 0.05%p 늘었다. 공적연금 지출이 1%p 늘면 출산율이 0.02%p 높아졌다. 가족복지뿐만 아니라 안정적 노후 소득 보장이 출산과 자녀 양육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주택 가격 상승률도 출산에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결론으로 이 문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하며 국민들도 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참고문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BBC&lt;br /&gt;
*OECD&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lt;br /&gt;
*국무총리실&lt;br /&gt;
*통계청&lt;br /&gt;
*한국고용정보원&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주제는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성장인데 산아제한 정책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핵가족화, 개인주의 생활방식, 노동시장 구조와 관련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자본투입의 한계 등을 상쇄할 만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처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급감까지 우려되는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료, 복지 등)에 대한 서술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에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면, 이에 대한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저출산 고령화의 내용은 인구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저성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고민되었다. 내용도 저출산 고령화에 맞추어 서술하였고, 경제저성장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 문단에만 나오므로 제목에서 빼는 것을 제안함&amp;lt;br/&amp;gt;&lt;br /&gt;
- 산아제한 표어 내용도 인구변동 주제와도 연관되는데.&amp;lt;br/&amp;gt;-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현재 정책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중요한 정책 2-3가지라도 설명하면 좋겠다. &amp;lt;br/&amp;gt;&lt;br /&gt;
- 고령화사회가 된 배경을 설명하고 고령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려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서술할 것. 본 원고에서는 노인 자살율만 문제로 제시하였고, 그 해결책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만을 설명하고 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558</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558"/>
				<updated>2017-07-31T16:08: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 /  백성 중심의 서울 성곽&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고, 역사가 2000년이 넘은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서기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하지만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자금의 서울로 천도했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 두 곳을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인데,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이곳에서 독창적인 제사방법과 제례음악 등으로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한바탕 이벤트를 벌인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계획도시로 만들고,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근본 교리인 인의예지에서 한 글자씩 인용해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lt;br /&gt;
&lt;br /&gt;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개조했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즐겨 한 바퀴를 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자리잡았다. 또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박물관과 같은 구내에 있다.&lt;br /&gt;
&lt;br /&gt;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서울의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는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이태원,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다. 이 부근에는 러시아인 거리, 중국인 거리, 몽골촌 등이 생겨날 정도로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lt;br /&gt;
&lt;br /&gt;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 전통음악과 난타 k-pop 등을 공연하는 한류 전용공연장은 대학로, 신촌, 홍대입구 등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충무아트홀 등의 공연장과 서울올림픽 경기장,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에서 열리는 대규모 한류공연에는 전 세계에서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룬다. 유명한 한류스타들이나 그룹들의 공연은 표를 판매한 지 10분 만에 매진돼, 한국에서 표를 사는 것보다 외국에서 그 나라 팬들을 위해 할당된 표를 사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또 KBS 등 각종 방송국과 조선일보 등 주요언론사들의 본사가 몰려있다. 방송국의 공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이 3~4일 전부터 방송국 앞에서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서울에는 한국의 주요기업 본사가 다 몰려 있다. 삼성전자, 현대 자동차, LG, 한화, 두산, 효성 등이 서울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다. 서울은 또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무역진흥공사,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각종 경제단체가 몰려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 중심이다.&lt;br /&gt;
&lt;br /&gt;
국제회의와 전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지하철 삼성역 부근의 한국종합무역센터의 코엑스와 학여울역의 SETEC 등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코엑스에서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OECD 국제워크숍 등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매년 주요전시회도 열린다. 코엑스 부근에 현대자동차 회사가 대규모 사옥을 건설하고, 한국 정부와 서울시가 이곳을 교통과 무역 등을 총망라하는 대표지역으로 개발을 마치면 서울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lt;br /&gt;
&lt;br /&gt;
한국과학기술원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교육 및 연구기관도 몰려 있어 한국 기술개발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 &lt;br /&gt;
&lt;br /&gt;
2017년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곧바로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이나믹한 도시 생활에도 매료된다. 모든 상품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배달제도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기에 가능했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범죄율은 세계 어느 나라 도시보다 낮아 안전하게 살 수 있다.&lt;br /&gt;
&lt;br /&gt;
제24회 서울올림픽과 2002년의 월드컵 개최로 서울은 세계 속의 서울로 거듭났다. 2002년 시작된 ‘거리응원’이라는 독특한 문화는 한류와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lt;br /&gt;
&lt;br /&gt;
미래학자들은 조만간 한반도가 통일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 후 서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로 및 철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또 해양으로 뻗어나갈 인천과 평택 부산 등으로 고속철도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극동지역의 문화와 정치 경제의 중개역할을 조화롭게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http://www.english.seoul.go.kr 서울]&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변정옹 누리집]&lt;br /&gt;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7</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7"/>
				<updated>2017-07-31T16:05: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 급증하는 1인 가구 /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으며,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갈 전망이다.&lt;br /&gt;
&lt;br /&gt;
표1) 인구 성장률 단위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성장율 || 0.52 || 0.50 || 0.77 || 0.53 || 046 || 0.63 || 0.53 || 0.45 || 0.39&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인구는 1955~1960년 사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세계적인 베이비붐 현상과 맞물려 이 기간 3.0%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1950년 시작된 전쟁으로 총체적인 혼란과 불확실, 경제 파탄에도 불구, 인구는 1960년까지 급격히 증가하였다.&lt;br /&gt;
&lt;br /&gt;
이는 8·15광복 이후 증가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혹은 강압에 의해 만주와 일본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국내로 돌아왔고, 전쟁 기간에 북한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전쟁으로 사망한 자연 감소분을 넘어섰다. 즉 사회적 증가였다. 둘째는 한국전쟁 후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베이비붐을 이어갔고, 가족의 출산력도 크게 늘어나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 자연적 증가였다.&lt;br /&gt;
&lt;br /&gt;
그 이후 10년을 주기로 한국의 인구성장률을 보면 1970년 2.18%, 1980년 1.56%, 1990년 0.99%로 서서히 낮아졌다. 이러한 하락세는 출산력 감소 때문이다. 같은 시기 합계출산율은 4.53, 2.82, 1.57로 낮아졌는데, 이는 여성들이 평생 동안 낳은 아이의 수가 20년 사이에 3명가량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 조사사망률(인구 1,000명당)은 1970년 8.0, 1980년 7.3, 1990년 5.6로 감소하였다. 이처럼 출산율과 조사사망률이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자 사람들은 인구 감소를 실제로 느끼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서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 2010년 1.23, 2016년 1.17로 낮아졌으며, 그에 따라 인구성장률은 1996년 이후 꾸준히 1%를 밑돌았다. 최근에는 0.5% 내외로 심각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인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는 않아 총인구는 8·15이후 계속 증가했다. 1949년 2,00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총인구는 2017년 5,10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분석에 따르면  총인구는 2031년 5,296만 명을 기록한 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표2) 총인구 단위 10,000명&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인구 || 4,906 || 4,931 || 4,955 || 4,994 || 5.020 || 5,043 || 5,075 || 5,102 || 5,125 || 5,145&lt;br /&gt;
|}&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전국의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달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한편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집중은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도시쏠림현상은 현재는 거의 정체 상태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지역&amp;lt;ref&amp;gt;도시지역기준 : 주거·상업·공업·녹지 지역&amp;lt;/ref&amp;gt;에 몰려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표3) 도시지역 인구 단위 10,000명, 비율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 || 4593 || 4623 || 4638 || 4684 || 4705 || 4730&lt;br /&gt;
|-&lt;br /&gt;
| 비도시지역인구 || 458 || 450 || 457 || 430 || 428 || 423&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비율 || 90.9 || 91.1 || 91.0 || 91.6 || 91.7 || 91.8&lt;br /&gt;
|}&lt;br /&gt;
&lt;br /&gt;
첫째,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 수보다 많지만 도시지역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고, 신도시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신도시지역으로 서울 주위의 김포, 고양, 구리, 하남, 분당, 동탄, 용인, 판교 등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amp;lt;ref&amp;gt;일정금액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다가 이사 갈 때는 그 금액을 모두 돌려받는다. &amp;lt;/ref&amp;gt;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lt;br /&gt;
&lt;br /&gt;
다음은 교통문제다. 자가용 차량을 이용하는 이동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 주변을 거미줄처럼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건설했으나 자동차 증가율을 따르지 못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여 해결하고 있다.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또 서울 주변에 5개 순환도로를 완성했으며 새 지하철 노선, 지하도로, 직행지하철 노선 등을 건설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육아시설 증설, 상하수도 개선, 더 많은 노인복지 시설의 신축과 개선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a&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주제인 ‘인구변동과 도시화’인데 글의 주요 내용은 주택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주택공급 불균형 등 주택문제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특징, 문제점, 정부의 해결방안 등 현재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현상과 극복을 위한 성공사례 제시를 희망한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인구변동과 도시화에 대해 통계자료를 본 원고에 적합한 표로 작성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lt;br /&gt;
- 인구변동에 대한 내용에는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각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서술하였으면 합니다. 각 문단마다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어, 집필자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으로 해방 이후 또는 남북 분단 이후 현재의 남한의 인구 증가율, 각 연령별, 성별 비율의 변동, 도시와 농어촌 인구 구성 추이를 각 사회 변동과 연계하여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시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할 때, 도시에 대한 개념 설명을 간단하게 했으면 한다.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 및 시기를 제시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도시화의 문제는 주택문제 뿐 아니라 교통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가져왔다. 너무 주택문제에만 집중되어 서술하였다. 또한 각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노력과 개선된 점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6</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6"/>
				<updated>2017-07-31T16:05: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 급증하는 1인 가구 /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으며,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갈 전망이다.&lt;br /&gt;
&lt;br /&gt;
표1) 인구 성장률 단위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성장율 || 0.52 || 0.50 || 0.77 || 0.53 || 046 || 0.63 || 0.53 || 0.45 || 0.39&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인구는 1955~1960년 사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세계적인 베이비붐 현상과 맞물려 이 기간 3.0%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1950년 시작된 전쟁으로 총체적인 혼란과 불확실, 경제 파탄에도 불구, 인구는 1960년까지 급격히 증가하였다.&lt;br /&gt;
&lt;br /&gt;
이는 8·15광복 이후 증가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혹은 강압에 의해 만주와 일본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국내로 돌아왔고, 전쟁 기간에 북한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전쟁으로 사망한 자연 감소분을 넘어섰다. 즉 사회적 증가였다. 둘째는 한국전쟁 후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베이비붐을 이어갔고, 가족의 출산력도 크게 늘어나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 자연적 증가였다.&lt;br /&gt;
&lt;br /&gt;
그 이후 10년을 주기로 한국의 인구성장률을 보면 1970년 2.18%, 1980년 1.56%, 1990년 0.99%로 서서히 낮아졌다. 이러한 하락세는 출산력 감소 때문이다. 같은 시기 합계출산율은 4.53, 2.82, 1.57로 낮아졌는데, 이는 여성들이 평생 동안 낳은 아이의 수가 20년 사이에 3명가량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 조사사망률(인구 1,000명당)은 1970년 8.0, 1980년 7.3, 1990년 5.6로 감소하였다. 이처럼 출산율과 조사사망률이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자 사람들은 인구 감소를 실제로 느끼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서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 2010년 1.23, 2016년 1.17로 낮아졌으며, 그에 따라 인구성장률은 1996년 이후 꾸준히 1%를 밑돌았다. 최근에는 0.5% 내외로 심각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인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는 않아 총인구는 8·15이후 계속 증가했다. 1949년 2,00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총인구는 2017년 5,10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분석에 따르면  총인구는 2031년 5,296만 명을 기록한 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표2) 총인구 단위 10,000명&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인구 || 4,906 || 4,931 || 4,955 || 4,994 || 5.020 || 5,043 || 5,075 || 5,102 || 5,125 || 5,145&lt;br /&gt;
|}&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전국의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달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한편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집중은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도시쏠림현상은 현재는 거의 정체 상태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지역&amp;lt;ref&amp;gt;도시지역기준 : 주거·상업·공업·녹지 지역&amp;lt;/ref&amp;gt;에 몰려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표3) 도시지역 인구 단위 10,000명, 비율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lt;br /&gt;
| 도시지역인구 || 4593 || 4623 || 4638 || 4684 || 4705 || 4730&lt;br /&gt;
|-&lt;br /&gt;
| 비도시지역인구 || 458 || 450 || 457 || 430 || 428 || 423&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비율 || 90.9 || 91.1 || 91.0 || 91.6 || 91.7 || 91.8&lt;br /&gt;
|}&lt;br /&gt;
&lt;br /&gt;
첫째,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 수보다 많지만 도시지역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고, 신도시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신도시지역으로 서울 주위의 김포, 고양, 구리, 하남, 분당, 동탄, 용인, 판교 등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amp;lt;ref&amp;gt;일정금액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다가 이사 갈 때는 그 금액을 모두 돌려받는다. &amp;lt;/ref&amp;gt;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lt;br /&gt;
&lt;br /&gt;
다음은 교통문제다. 자가용 차량을 이용하는 이동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 주변을 거미줄처럼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건설했으나 자동차 증가율을 따르지 못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여 해결하고 있다.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또 서울 주변에 5개 순환도로를 완성했으며 새 지하철 노선, 지하도로, 직행지하철 노선 등을 건설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육아시설 증설, 상하수도 개선, 더 많은 노인복지 시설의 신축과 개선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a&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주제인 ‘인구변동과 도시화’인데 글의 주요 내용은 주택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주택공급 불균형 등 주택문제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특징, 문제점, 정부의 해결방안 등 현재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현상과 극복을 위한 성공사례 제시를 희망한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인구변동과 도시화에 대해 통계자료를 본 원고에 적합한 표로 작성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lt;br /&gt;
- 인구변동에 대한 내용에는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각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서술하였으면 합니다. 각 문단마다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어, 집필자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으로 해방 이후 또는 남북 분단 이후 현재의 남한의 인구 증가율, 각 연령별, 성별 비율의 변동, 도시와 농어촌 인구 구성 추이를 각 사회 변동과 연계하여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시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할 때, 도시에 대한 개념 설명을 간단하게 했으면 한다.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 및 시기를 제시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도시화의 문제는 주택문제 뿐 아니라 교통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가져왔다. 너무 주택문제에만 집중되어 서술하였다. 또한 각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노력과 개선된 점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5</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555"/>
				<updated>2017-07-31T16:04: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 급증하는 1인 가구 /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으며,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갈 전망이다.&lt;br /&gt;
&lt;br /&gt;
표1) 인구 성장률 단위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성장율 || 0.52 || 0.50 || 0.77 || 0.53 || 046 || 0.63 || 0.53 || 0.45 || 0.39&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인구는 1955~1960년 사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세계적인 베이비붐 현상과 맞물려 이 기간 3.0%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1950년 시작된 전쟁으로 총체적인 혼란과 불확실, 경제 파탄에도 불구, 인구는 1960년까지 급격히 증가하였다.&lt;br /&gt;
&lt;br /&gt;
이는 8·15광복 이후 증가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혹은 강압에 의해 만주와 일본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국내로 돌아왔고, 전쟁 기간에 북한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전쟁으로 사망한 자연 감소분을 넘어섰다. 즉 사회적 증가였다. 둘째는 한국전쟁 후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베이비붐을 이어갔고, 가족의 출산력도 크게 늘어나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 자연적 증가였다.&lt;br /&gt;
&lt;br /&gt;
그 이후 10년을 주기로 한국의 인구성장률을 보면 1970년 2.18%, 1980년 1.56%, 1990년 0.99%로 서서히 낮아졌다. 이러한 하락세는 출산력 감소 때문이다. 같은 시기 합계출산율은 4.53, 2.82, 1.57로 낮아졌는데, 이는 여성들이 평생 동안 낳은 아이의 수가 20년 사이에 3명가량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 조사사망률(인구 1,000명당)은 1970년 8.0, 1980년 7.3, 1990년 5.6로 감소하였다. 이처럼 출산율과 조사사망률이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자 사람들은 인구 감소를 실제로 느끼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서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 2010년 1.23, 2016년 1.17로 낮아졌으며, 그에 따라 인구성장률은 1996년 이후 꾸준히 1%를 밑돌았다. 최근에는 0.5% 내외로 심각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인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는 않아 총인구는 8·15이후 계속 증가했다. 1949년 2,00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총인구는 2017년 5,10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분석에 따르면  총인구는 2031년 5,296만 명을 기록한 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표2) 총인구 단위 10,000명&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년도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lt;br /&gt;
|-&lt;br /&gt;
|인구 || 4,906 || 4,931 || 4,955 || 4,994 || 5.020 || 5,043 || 5,075 || 5,102 || 5,125 || 5,145&lt;br /&gt;
|}&lt;br /&gt;
&lt;br /&gt;
2017년 현재 전국의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달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한편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집중은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도시쏠림현상은 현재는 거의 정체 상태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지역&amp;lt;ref&amp;gt;도시지역기준 : 주거·상업·공업·녹지 지역&amp;lt;/ref&amp;gt;에 몰려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표3) 도시지역 인구 단위 10,000명, 비율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lt;br /&gt;
| 도시지역인구 || 4593 || 4623 || 4638 || 4684 || 4705 || 4730&lt;br /&gt;
|-&lt;br /&gt;
| 비도시지역인구 || 458 || 450 || 457 || 430 || 428 || 423&lt;br /&gt;
|-&lt;br /&gt;
| 도시지역인구비율 || 90.9 || 91.1 || 91.0 || 91.6 || 91.7 || 91.8&lt;br /&gt;
|}&lt;br /&gt;
&lt;br /&gt;
첫째,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 수보다 많지만 도시지역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정부는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고, 신도시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신도시지역으로 서울 주위의 김포, 고양, 구리, 하남, 분당, 동탄, 용인, 판교 등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amp;lt;ref&amp;gt;일정금액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다가 이사 갈 때는 그 금액을 모두 돌려받는다. &amp;lt;/ref&amp;gt;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lt;br /&gt;
&lt;br /&gt;
다음은 교통문제다. 자가용 차량을 이용하는 이동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 주변을 거미줄처럼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건설했으나 자동차 증가율을 따르지 못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여 해결하고 있다.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또 서울 주변에 5개 순환도로를 완성했으며 새 지하철 노선, 지하도로, 직행지하철 노선 등을 건설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육아시설 증설, 상하수도 개선, 더 많은 노인복지 시설의 신축과 개선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a&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주제인 ‘인구변동과 도시화’인데 글의 주요 내용은 주택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주택공급 불균형 등 주택문제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특징, 문제점, 정부의 해결방안 등 현재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현상과 극복을 위한 성공사례 제시를 희망한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인구변동과 도시화에 대해 통계자료를 본 원고에 적합한 표로 작성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lt;br /&gt;
- 인구변동에 대한 내용에는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각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서술하였으면 합니다. 각 문단마다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어, 집필자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으로 해방 이후 또는 남북 분단 이후 현재의 남한의 인구 증가율, 각 연령별, 성별 비율의 변동, 도시와 농어촌 인구 구성 추이를 각 사회 변동과 연계하여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시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할 때, 도시에 대한 개념 설명을 간단하게 했으면 한다.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 및 시기를 제시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도시화의 문제는 주택문제 뿐 아니라 교통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가져왔다. 너무 주택문제에만 집중되어 서술하였다. 또한 각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노력과 개선된 점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97</id>
		<title>Draft 민간신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AF%BC%EA%B0%84%EC%8B%A0%EC%95%99&amp;diff=297"/>
				<updated>2017-07-27T17:1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민중과 함께 해온 민간신앙&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단군]], [[처용]]&lt;br /&gt;
|장소/공간=마을, 북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토정비결&lt;br /&gt;
|개념용어= 기우제, 산신제, 부적,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동제&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민간신앙은 아직까지 용어조차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혈연 조직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행해지는 의식을 두루뭉술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훌륭하게 종교로 체계화 되었고, 신도 또한 적지 않다. 이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여러 가지 신앙이라는 정의에 따른다. 또 “민간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민족적 특성이 강한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규정한다.&lt;br /&gt;
학자들은 지금까지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通過儀禮)·장제(葬祭)·점복·금기·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숭배(祖上崇拜)·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을 민간신앙으로 연구했다. 이중 무속신앙은 전문적인 민간 신앙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민간신앙은 기존의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그 연원이 결코 짧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민간신앙은 함께 공존했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비롯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인의 아들로 되어 있다.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lt;/ref&amp;gt;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녀 비·바람·구름을 마음대로 거느렸으며, 죽어서 아사달의 신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의 대리자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로 탄생했다.&lt;br /&gt;
&lt;br /&gt;
단군 때에 이어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민간신앙은 유지됐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기우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1,450회가 넘는다. 자연 현상에 따라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심해지면 왕은 자신의 부덕으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왕은 목욕재계하고 직접 나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관리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효험이 있다는 산천을 찾아가 역시 기우제를 지냈다. 심한 경우는 모든 관료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대대적으로 빌었다,&lt;br /&gt;
&lt;br /&gt;
기우제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 의미도 있었으며,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통치를 위한 목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초기에 종교가 하던 역할을 기우제가 담당케 했던 것이다. 기우제는 기상예보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동네 어른들이 주관하여 가끔 마을에서 지내기도 한다.&lt;br /&gt;
왕실 주도의 행사 중 산신제도 중요한 민간신앙이었다. 산신제는 서울의 북악산,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경기도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자체로 거행했다.&lt;br /&gt;
&lt;br /&gt;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가신신앙, 범위를 넓힌 마을신앙, 전문 무속인이 등장하여 행하는 무속신앙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신앙으로 보다는 민속행사와 놀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토정비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늘었다. 점을 치고 귀신을 쫒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집 안에 뿌리며 악귀를 쫓는 등 민간신앙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옛 것에 대한 추억일 것이다.&lt;br /&gt;
장승과 솟대가 전국 곳곳에 다시 세워지고 있으며, 이를 축제로 즐기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승은 나쁜 기운을 막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 솟대는 마을의 액을 막으며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마을에 경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웠었다.&lt;br /&gt;
&lt;br /&gt;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 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적도 민간신앙이다. 사악한 것이나 액운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이에 부적을 어느 장소에 붙이거나 몸에 지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부적은 신라 이전부터 부적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마을신앙의 사회사&lt;br /&gt;
====관련자료====&lt;br /&gt;
*왕조실록&lt;br /&gt;
*삼국유사&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민간신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 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왕실주도의 기우제, 산신제보다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간 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의 형태, 사상, 역사, 다른 종교로의 수용 등 한국적 민간신앙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관련 시각자료도 함께 제시한다는 글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의견2=- 민간신앙의 종류가 많고 방대하여 짧은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능한 한 많은 분야와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기준을 마련하여 몇 가지라도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합니다. 원고 검토를 위해 찾아보니,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 보유 국가 3위입니다. 무형문화유산 14개 중 민간신앙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릉단오제,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있네요. &amp;lt;br/&amp;gt;&lt;br /&gt;
- 가정신앙, 마을신앙, 국가신앙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가정신앙은 가신 또는 점, 굿으로, 마을신앙은 위의 강릉단오제 또는 영등굿으로, 국가신앙은 단군신 또는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기우제로. 글을 쓸 때 하나의 기준으로 대표적인 민간신앙을 서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amp;lt;br/&amp;gt; &lt;br /&gt;
- 원고에 쓰인 단군신화 관련 민간신앙은 대종교를 말하는 것인가요?&amp;lt;br/&amp;gt;&lt;br /&gt;
- 민간신앙이 20세기에는 사라져 가다가 21세기 다시 부활하는 경향이다. →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 풍수지리에 따라 배가 가는 모양을 한 마을의 안녕을 빌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친절히 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7</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7"/>
				<updated>2017-07-27T17:04: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6</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6"/>
				<updated>2017-07-27T17:03: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ron color=&amp;quot;red&amp;quot;&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5</id>
		<title>Draft 궁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6%81%EA%B6%90&amp;diff=285"/>
				<updated>2017-07-27T17:03: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조선의 왕조사가 고스란히 담긴 5대 궁궐&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조]],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문묘]], [[성균관]],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성종]], 대비&lt;br /&gt;
|장소/공간= [[한양]], 러시아 공사관, [[낙선재]], [[환구단]]&lt;br /&gt;
|사건=[[임진왜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일제강점기]]&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조선]], [[왕릉]], [[종묘와 사직]], [[대한제국]]&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궐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이다. 궁궐은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구역,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성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궁궐은 조선 왕조사는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6대 임금 세조 때부터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지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궁궐들을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폐허로 남은 채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lt;br /&gt;
&lt;br /&gt;
경복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건의로 다시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어렵게 다시 지어진 경복궁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발생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이때 이후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 생긴 대로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lt;br /&gt;
&lt;br /&gt;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lt;br /&gt;
&lt;br /&gt;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전 왕이나 전전 왕의 왕비로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에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는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억울함을 다른 나라에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lt;br /&gt;
&lt;br /&gt;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황인희,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 기파랑, 2014  &lt;br /&gt;
====관련자료====&lt;br /&gt;
*『태조실록』&lt;br /&gt;
*『태종실록』&lt;br /&gt;
*『고종실록』&lt;br /&gt;
*『궁궐지(宮闕志)』&lt;br /&gt;
*『왕궁사』(이철원, 동국문화사, 1954)&lt;br /&gt;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3)&lt;br /&gt;
*『한국건축사』(윤장섭, 동명사, 1980)&lt;br /&gt;
*『한국의 미』 14-궁실.민가-(신영훈 감수,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4)&lt;br /&gt;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lt;br /&gt;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4)  &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궁궐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amp;lt;궁궐, 그날의 역사&amp;gt;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amp;lt;fron color&amp;gt;검토 추후수정&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98%EA%B6%A4&amp;diff=274</id>
		<title>Draft 의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98%EA%B6%A4&amp;diff=274"/>
				<updated>2017-07-27T16:51: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의궤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도감, 실록청, 찬수청, 의궤청, 세종, 의인왕후, 강화부, 의정부, [[예조]...&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의궤&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도감]], [[실록청]], 찬수청, 의궤청, [[세종]], 의인왕후, 강화부, [[의정부]], [[예조]], [[춘추관]]&lt;br /&gt;
|장소/공간=[[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외규장각&lt;br /&gt;
|사건=[[임진왜란]], [[병인양요]]&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왕, 세자, 세자빈, 왕비, [[책례]], [[국장]], 빈전, 혼전, 부묘, 산릉, 존호, 능원, [[실록]], 선원보, [[어진]], [[영정]], 반차도, 복제, 장구, 의물, [[이두]], 차자, [[&amp;lt;국조오례의&amp;gt;]], [[오례]], &amp;lt;빈전혼전도감의궤&amp;gt;, &amp;lt;산릉도감의궤&amp;gt;, &amp;lt;을묘원행정리의궤&amp;gt;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lt;br /&gt;
&lt;br /&gt;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amp;lt;국조오례의&amp;gt;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amp;lt;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amp;gt;와 &amp;lt;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amp;gt;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 예조 · 춘추관 · 강화부(江華府)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lt;br /&gt;
&lt;br /&gt;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 ·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amp;lt;을묘원행정리의궤&amp;gt;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 중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 소장본과 같은 것도 있지만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lt;br /&gt;
====관련자료====&lt;br /&gt;
*『조선조의 의궤(儀軌)』(박병선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lt;br /&gt;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박병선, 태학사, 2008)&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병인양요 때 프랑스로부터 약탈당했던 의궤 중 일부가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내용도 추가해야 한다. 또한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국립중앙박물관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의궤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황인희 원고를 기본으로 삼고, 황정욱의 글 중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되어 있는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5년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amp;lt;br/&amp;gt;&lt;br /&gt;
-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나? 청계천변에 타일로 제작해 놓은 &amp;lt;원행을묘정리의궤&amp;gt;의 반차도?&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267</id>
		<title>Draft 종묘제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2%85%EB%AC%98%EC%A0%9C%EB%A1%80&amp;diff=267"/>
				<updated>2017-07-27T16:43: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 |집필자=황인희 |인물/기관/단체=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 제례&lt;br /&gt;
|집필자=황인희&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목조, 익조, 탁조, 환조, [[순종]], 이왕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세자]], 문무백관, 종친, [[영의정]],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종]]&lt;br /&gt;
|장소/공간=[[종묘]], 정전, [[영녕전]] &lt;br /&gt;
|사건=[[일제강점기]], 광복&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신실, 신위, 협실, 신주, 납일, 취위, 영신, 전폐, 신관례, 진찬,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 망료, [[종묘 제례악]], 정대업 · 보태평,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 구장면복, 중요무형문화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세계무형유산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종묘 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기울기가 가팔라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amp;lt;br/&amp;gt;&lt;br /&gt;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amp;lt;&amp;gt;br/&amp;gt;&lt;br /&gt;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 동지 뒤의 셋째 말일)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 ·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amp;lt;br/&amp;gt;&lt;br /&gt;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 · 아헌관 · 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amp;lt;br/&amp;gt;&lt;br /&gt;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amp;lt;br/&amp;gt;&lt;br /&gt;
종묘 제례는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과 춤에 맞추어 진행된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 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축 · 편종 · 장고 · 젓대 ·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amp;lt;br/&amp;gt;&lt;br /&gt;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꿩) · 종이(宗彛 :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 조(藻 : 수초) · 화(火) · 분미(粉米 : 쌀알) · 보(黼 : 도끼) · 불(黻 :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amp;lt;br/&amp;gt;&lt;br /&gt;
 종묘 제례는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종묘 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lt;br /&gt;
*위키백과&lt;br /&gt;
====관련자료====&lt;br /&gt;
*홀기해설(宗廟大祭笏記解說)』(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75)  &lt;br /&gt;
*[http://www.jongmyo.net/ 종묘제례 홈페이지]&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밑 줄 친 부분은 종묘 제례를 설명할 때 필요한 내용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개설]부분의 내용과 일치한다. 게다가 집필된 원고의 전체 내용은 종묘제례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종묘제례를 설명하는 세부 내용과 글의 전개 방식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종묘제례의 설명과 차별성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일부 내용을 발췌 또는 인용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출처 표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종묘제례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lt;br /&gt;
|의견2=-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탁조가 아니고 도조입니다. &lt;br /&gt;
-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 서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amp;lt;br/&amp;gt;&lt;br /&gt;
- 기울기가 가팔라 → 다른 표현 없을까요? 기울기가 심해서?&amp;lt;br/&amp;gt;&lt;br /&gt;
- 조선의 왕은 총 27명인데, 정전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 영녕전에는 16명의 왕과 17명의 왕비가 모셔졌는데, 각각 다른 전에 구별하여 모신 기준을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4대 선조는 어디에 모셨는지?&amp;lt;br/&amp;gt;&lt;br /&gt;
- 종묘 건축의 특징은 계속 증축되었다는 것, 그럼 언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도 간략히 적어주었으면. &lt;br /&gt;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amp;lt;br/&amp;gt;&lt;br /&gt;
① 황인희의 글은 영녕전에 33명의 신주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황정욱 글에는 34명의 신주가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서 수정해주세요.&amp;lt;br/&amp;gt;&lt;br /&gt;
②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서거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amp;lt;br/&amp;gt;&lt;br /&gt;
③ 종묘의 위치 :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왼편에 두었다. &amp;lt;br/&amp;gt;&lt;br /&gt;
④ 황인희는 종묘제례의 순서를 자세히 썼는데, 황정욱은 이를 간략하게 3절차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서 정리하였으면 한다. &lt;br /&gt;
⑤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이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253</id>
		<title>Draf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253"/>
				<updated>2017-07-27T16:33: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여성지위향상과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여성가족부, 여성경제인연합회&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공무원집단항명&lt;br /&gt;
|기록물=공공부문 여성대표성제고계획&lt;br /&gt;
|개념용어=[[유리천장]], 가족 내 의사결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lt;br /&gt;
&lt;br /&gt;
2017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여생도 3명이 1,2,3등으로 졸업했다. 여생도가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최우수 졸업생이 된 것은 몇 년 전부터이지만 1,2,3등을 나란히 차지한 것은 처음이다. 국가의 간성 앞줄에 여성 3명이 나란히 서며 여성들의 군내 위상(여군 간부 5.6%)에도 변화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육군 사관학교 뿐만이 아니다. 해군, 공군 사관학교에서도 여성생도의 약진은 두르러진다.&lt;br /&gt;
&lt;br /&gt;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군은 남성만의 세계였다. 여성은 국민의 4대 의무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에서도 남성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특수병과인 간호 등 극히 일부 병과에서 자원하여 복무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전투병과에도 여성 장교가 지휘하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여성들의 지위는 2000년대 들어 크게 달라졌다. 물론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각종제도를 이전부터 시행했으며, 효과가 나타나는데 오래 걸렸다. 1990년 정부에서 여성 국장이 최초로 남성 동료를 앞질러 승진하자 한 개 부처 공무원들이 연대 서명하여 부당함에 항의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능력보다는 정책적으로 여성 사무관을 부이사관으로 승진시키자 벌어진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오늘날처럼 여성의 사회진출에서 눈에 보이던 제약이 제거되는데 30년이 더 걸렸다.&lt;br /&gt;
&lt;br /&gt;
이제 교육계는 여성이 대세이다. 초등학교 교사 중 전체의 77%인 141,248명이 여교사이다. 중학교는 68%, 고등학교는 50.8%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남학생수가 더 많은데 여교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교육에서 남학생이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한다.&lt;br /&gt;
&lt;br /&gt;
이런 일이 일어 벌어진 것은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가장 안정적이며, 비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교육계에 여성 지원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1960년대만 해도 상황은 이와 정반대였다. 오죽 하면 친정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눈이 멀어서 삼년, 귀를 먹어서 3년, 벙어리 되어서 3년”을 살아야 겨우 시집살이를 끝낸다고 교육을 시켰을까. 친정어머니는 같은 여성이면서도 시집가는 딸에게 인권을 주장하기보다는 포기하는 법을 가르쳐야만 했다. 이처럼 갓 결혼한 여성들에게 시집살이는 인권은 아예 접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친정에서 받았던 예우는 사라지고 새로 구성원으로 합류한 시집에서의 서열에 맞춰서 자기의 위상을 찾아야만 했다. 시집 쪽에서 며느리를 구성원으로 흔쾌하게 받아들이기가 오죽 어려웠으면 며느리의 고운 자태도 오히려 흉을 보았을까? 속담에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고 했다.&lt;br /&gt;
&lt;br /&gt;
최근에는 여성의 가정 내 지위가 향상되면서 모든 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화됐다. 통계에 따르면 가정에서 육아와 교육은 여성이 절대권인 권한을 갖고 결정하고 이끌어 간다. 40대 가정의 자녀 교육 결정권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 남성만의 결정이 2.6%인데 반해 여성만의 결정은 21.7%이다. 자녀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할 무렵의 연배에서 나타난 수치는 한국의 교육계 전반에 대한 가정에서의 의사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생활비지출 결정은 여성의 의사에 좌우되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40대 부부의 경우 생활비 지출 결정권을 가진 남성이 4.5%인 반면 여성은 17.9%이다. 이는 30대의 여성이 결정하는 비율 19.1%와 50대의 여성이 결정하는 비율 20%보다는 작다. 한국 가정에서 남편의 소득 수준이 가장 높아지는 40대에서는 남편의 발언권이 약간 강해지나, 그 이전과 이후에는 다시 여성이 주도권을 잡는 것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특히 젊은 부부일수록 여러 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하다. 이는 결혼 연령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최근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5년간 연상여성과 결혼한 신혼은 전체의 15.6%에 달한다. 이를 두고 여성이 가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아직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받는 제약은 많다. 고쳐져야 할 부분이다.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초중고교의 여성 교감·교장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전체 여교원이 차지하는 비율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아직도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민간부문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수준이 더 낮다. 한국의 10대 재벌 그룹 여성임원 비율은 2.4%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lt;br /&gt;
*여성가족부&lt;br /&gt;
====관련자료====&lt;br /&gt;
*7개 공공부문별 여성비율 개선현황&lt;br /&gt;
*국립국어원 표준말대사전&lt;br /&gt;
*육군사관학교 보도자료&lt;br /&gt;
*전경련&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게 된 사회적 배경, 정부 정책, 가치관의 변화 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제시된 사례가 한정적이거나 적절치 않다. 글의 주제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변화’를 주제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은 과거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일부의 사례(교육계에서의 여성, 생활비 지출권 결정,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만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으로 볼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높은 성적을 받은 것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기 때문인가? 생활비 지출을 결정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과 교육계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높은 것을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로 보긴 어렵다. &lt;br /&gt;
|의견2=- 본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이 상당수 있을텐데.... 본 주제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보완했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 과거 여성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서술하고, 차별적 지위를 고치고 양성평등을 위해 과거 여성계와 정부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서술할 것. 법적 지위 변화-재산상속권, 호주제, 취직조건, 승진, 업무의 내용 등등&amp;lt;br/&amp;gt;&lt;br /&gt;
- 여성 고등교육의 비율과 사회진출의 모습, 다양한 분야의 진출,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251</id>
		<title>Draft 여성지위향상과 사회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7%AC%EC%84%B1%EC%A7%80%EC%9C%84%ED%96%A5%EC%83%81%EA%B3%BC_%EC%82%AC%ED%9A%8C%EB%B3%80%ED%99%94&amp;diff=251"/>
				<updated>2017-07-27T16:32: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여성지위향상과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여성가족부, 여성경제인연합회 |장소/공간= |사건=공무원집단항명 |기...&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여성지위향상과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여성가족부, 여성경제인연합회&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공무원집단항명&lt;br /&gt;
|기록물=공공부문 여성대표성제고계획&lt;br /&gt;
|개념용어=[[유리천장]], 가족 내 의사결정권&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lt;br /&gt;
*여성가족부&lt;br /&gt;
====관련자료====&lt;br /&gt;
*7개 공공부문별 여성비율 개선현황&lt;br /&gt;
*국립국어원 표준말대사전&lt;br /&gt;
*육군사관학교 보도자료&lt;br /&gt;
*전경련&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게 된 사회적 배경, 정부 정책, 가치관의 변화 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제시된 사례가 한정적이거나 적절치 않다. 글의 주제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변화’를 주제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은 과거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일부의 사례(교육계에서의 여성, 생활비 지출권 결정,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만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의 상위 우수 졸업생이 모두 여성인 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으로 볼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높은 성적을 받은 것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기 때문인가? 생활비 지출을 결정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과 교육계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높은 것을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로 보긴 어렵다. &lt;br /&gt;
|의견2=- 본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이 상당수 있을텐데.... 본 주제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보완했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한국 과거 여성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서술하고, 차별적 지위를 고치고 양성평등을 위해 과거 여성계와 정부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서술할 것. 법적 지위 변화-재산상속권, 호주제, 취직조건, 승진, 업무의 내용 등등&amp;lt;br/&amp;gt;&lt;br /&gt;
- 여성 고등교육의 비율과 사회진출의 모습, 다양한 분야의 진출,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247</id>
		<title>Draft 다문화사회 외국인 거주자 2백만 시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B%8B%A4%EB%AC%B8%ED%99%94%EC%82%AC%ED%9A%8C_%EC%99%B8%EA%B5%AD%EC%9D%B8_%EA%B1%B0%EC%A3%BC%EC%9E%90_2%EB%B0%B1%EB%A7%8C_%EC%8B%9C%EB%8C%80&amp;diff=247"/>
				<updated>2017-07-27T16:28: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같이 갑시다”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 |장소/공간= |사건= |기록물= |개념용어= 혼혈아 향가 색목인 단일민족...&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같이 갑시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lt;br /&gt;
|개념용어= 혼혈아 향가 색목인 [[단일민족]] [[쇄국정책]] 세계화&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다문화 사회 외국인 거주자 200만 시대&lt;br /&gt;
“같이 갑시다&amp;lt;ref&amp;gt;한국은 이제 다문화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다문화 가족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한국인은 그들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들은 이 말을 순수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썼고, 때에 따라서는 남을 배척하는 때 이용했다. 한국에서 다문화가족은 혼혈아 국제결혼 등으로 부르며 차별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간 다문화가족 출신은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에서 조차 제외되었었다.&lt;br /&gt;
&lt;br /&gt;
그러다가 20세기말 한국이 세계화에 나서며 국내로 이주하는 근로자와 국제결혼 등이 늘어나면서 다문화 가족을 국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동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정책은 조선 말기에 외국인을 배척했던 쇄국정책을 연상시켰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 아시아가 무너질 때 조선은 국가를 지키는 방안으로 문호를 닫아걸고 외국의 접근을 차단했다. 조선은 국가를 개방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안보정책이라고 생각, 서구의 앞선 문물 수용을 꺼렸고, 차단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중국을 제외한 서구 국가를 외세라 여겼고, 그들과 교류는 덕이 될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은 서구열강의 문물을 중국을 통해 중국인의 눈으로 검증한 것을 주로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그 결과 조선은 나라를 열어 통상을 하자는 프랑스 미국 등과 전쟁을 했고, 앞선 서구의 과학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주변국가보다 뒤졌다.&lt;br /&gt;
&lt;br /&gt;
하지만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외국과 교류했다는 기록은 많다. 신라의 향가 ‘처용가’에 등장하는 남자도 외국인이며, 고려 시대 ‘쌍화점’에는 아예 색목인이 등장한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외국인을 받아들여 성(姓)도 내려 주고 그들에게 벼슬도 주었다. 개국공신에도 중국의 한족이 들어있다. 이뿐 아니다. 만주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여진 말갈 몽골 등등의 다른 종족의 피가 일부에서 흐르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곧바로 한민족으로 동화되었다.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16개 나라가 파병해 한국 국토와 자유와 인권을 지켰다. 그 후 남북분단으로 대한민국은 섬나라처럼 외국과 단철되었다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저절로 문호가 열렸다. 한국은 1980년대 문호를 활짝 열었고, 근로자, 무역상, 유학생, 서비스 산업 종사자 등이 해외로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이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쫓겨 나가 살던 동포들이 돌아왔고, 뒤이어 그 나라 사람들이 묻어 왔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 정착했고, 국적까지 취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외국에서 온 이주 근로자들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 한국인들이 꺼리던 육체노동분야로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분야의 대세를 이루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정부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근로자의 입국을 허용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연수시키는 동시에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시작된 이주 외국인이 2015년 현재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200만 명을 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2006년 39525명이던 것이 2015년에는 158,064명으로 대폭 늘었으며, 결혼으로 인한 경우가 가장 많다. 이는 급격한 도시화로 젊은 여성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며 일어난 2차문제이다. 농촌에 남은 미혼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지역의 혼인율이 떨어졌고, 혼인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출산력의 저하를 가져와 많은 농촌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1990년대 들어 일부 농촌 총각들이 만혼 혹은 미혼의 문제를 국제결혼을 통해 해결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주하던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다문화가정이 2015년 278,036 가구로 크게 늘었다. 이들 가정에서 태어난, 특히 농촌지역에서만도 2020년이 되면 다문화 자녀가 13만 명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19세 미만 농가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다문화 가정 내에서는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향후 농촌의 가족, 학교, 지역 등에 장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lt;br /&gt;
전통적인 단일혈통에 의한 민족주의 이념을 뛰어 넘는 민족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통계청&lt;br /&gt;
*표준국어대사전 &lt;br /&gt;
*조선왕조실록&lt;br /&gt;
*산업연수생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대상 독자는 외국인임을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혈통주의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국제결혼 등으로 급속하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한 것은 불과 2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갖추어 나가고 있으므로 이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기사 제목으로 제시한 “같이 갑시다”는 다문화가 시작되던 초기에는 의미있게 통용될 수 있으나, 한국 사회는 오늘날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으므로 다른 기사 제목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단일민족 및 다문화가정에 대한 과거의 생각, 현재 생각의 변화 및 정책에 대해서도 서술&amp;lt;br/&amp;gt;&lt;br /&gt;
- 현재 다문화사회가 되게 된 상황을 시대 순서별 그리고 상황별로 나누어 설명했으면. 외국인 유입에 대해 표를 만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lt;br /&gt;
- 농촌 총각들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이 2000년대에 들어와 확산되었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비율은?&amp;lt;br/&amp;gt; &lt;br /&gt;
- 본 원고는 다문화사회에 대해 농촌 총각들의 결혼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는데, 그 외 시기별로 변화하는 다른 요소들도 정리하였으면 좋겠다. &lt;br /&gt;
- 다문화가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익광고 등을 현재 한국의 노력과 앞으로의 전망도 적어주었으면.&amp;lt;br/&amp;gt;&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243</id>
		<title>Draft 스마트폰과 인터넷</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243"/>
				<updated>2017-07-27T16:23: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원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lt;br /&gt;
|장소/공간=가정&lt;br /&gt;
|사건= 은행 감소, 전화로 가정생활&lt;br /&gt;
|기록물= 한국통계연감, 전전자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탄생&lt;br /&gt;
|개념용어= 스몸비, 홈오토매틱,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중독&lt;br /&gt;
|물품/도구/유물= 스마트폰, 유선전화,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진 휴대전화기가 6천만대를 넘어서 한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넘어섰다. 휴대전화기수는 2010년 5천만대를 넘어선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특히 스마트 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금융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은 지점수를 80% 줄이고 인력을 전화 상담과 온라인 업무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30대 이하 젊은 층은 은행에 가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으로 금융결제를 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욱 급속하게 확장돼 20년 이내에 모든 결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lt;br /&gt;
&lt;br /&gt;
국가의 행정전산망을 이용한 국민생활 변화도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하다. 각종 정부 서류를 집에서 발급받고, 각종 통계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은 시장에 가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생필품을 주문하고 집에서 받는다. 홈오토메틱이 가능해진 것도 큰 변화다. 집안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조정하고 통제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여가와 오락을 즐길 수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의 보급 증가에 따른 부작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몸비(Smombie)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대와 20대는 45%, 30대와 40대는 41%가 스마트폰을 보며 걸었다. 이를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한국인의 1/4이 스몸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보험회사 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총인구의 1/3 이상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스몸비와 몸을 부딪쳤다는 통계도 있다.&lt;br /&gt;
&lt;br /&gt;
‘어깨빵’이라는 말도 새로 생겼다. 스마트 폰을 보며 걷느라 다른 이가 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경우를 말한다. 외국인들은 이 말을 ‘코리안 범프’라고 설명한다. 한국인(korean)과 범프(bump)를 합친 말이다. 또 폰딧불(스마트폰+반딧불이)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한다. 공연장 등 어두운 곳에서 스마트폰 불빛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lt;br /&gt;
&lt;br /&gt;
나이든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양보할 줄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한국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에 타면 짐을 들어주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이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과거의 좋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들고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문간에 서 있는 젊은 스몸비 때문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차량 안쪽이 텅텅 비어 있어도 문간에 기대서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중독도 심각하다. 스마트폰 중독은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병적으로 길어 정신·육체·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을 말한다.&lt;br /&gt;
&lt;br /&gt;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스마트폰을 점점 더 많은 시간 이용해야만 만족하고, 중단하면 불안감을 느껴 공격적이 되는 등 가정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이상 한국인의 5%가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울 만큼 스마트폰 사용이 많다. 특히 18세에서 29세 사이에서는 18.2%가 이에 해당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선전화 보유수는 상대적으로 매년 감소, 2010년 2천만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제 1,634만대로 줄었다. 1986년 한국형 전전자교환기가 생산되어 유선전화 적체가 해소된 지 30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다.&lt;br /&gt;
&lt;br /&gt;
한 때 기업이 재무제표를 공개하면 유선 전화기가 당당하게 독립계정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고, 전화기를 보유한 가정은 부잣집으로 상징되었다. 이제 각 가정의 유선전화는 통화용으로보다는 인터넷 등 부가서비스를 위한 선로로 이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1960년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다.&lt;br /&gt;
&lt;br /&gt;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최고다. 경제개발협력기구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유·무선을 포함해 98%에 이른다. 하지만 데스크 탑, 노트북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가구 비율은 80%에 달한다. 컴퓨터 보급률은 스마트기기 보급률 증가와 반비례하여 점차 감소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lt;br /&gt;
&lt;br /&gt;
가구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비된 가구비율은 85%이다. 이 분야 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반도체 산업 발전이 컴퓨터 산업을 뒷받침 했고, 도시 밀집도가 높아 인터넷 선로 구축비용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오랫동안 지속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보건복지부 통계&lt;br /&gt;
*통계청 통계연감&lt;br /&gt;
*조선일보&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주제는 세계에서 IT 강국으로의 면모와 정보기기로 인한 한국인의 생활의 변화이다.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모습을 서술해야하는데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만을 한 페이지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과 관련한 내용을 줄이고, 가상현실 도입, 사물 인터넷(IOT), 로봇, 웨어러블 기기 등 한국인의 생활변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인터넷 기능을 핸드폰에 넣어 스마트폰이 된 것이니까.&lt;br /&gt;
-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인터넷 기능이 핸드폰에 포함되어 특정 장소가 아닌 어느 장소에서나 인터넷으로 업무, 정보수집, 가정의 전자제품 작동 등이 가능해진 내용 등을 서술하여 과거의 생활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본 원고의 글이 몇 년 후에도 읽힐 것을 대비하여,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년도를 밝혀주었으면 한다. 휴대전화기 6천만대를 넘어선 시점, 외국계 은행의 발표 시기, 금융경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시점 등등&amp;lt;br/&amp;gt;&lt;br /&gt;
- 글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의 폐해도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이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변화한 장점도 서술해주었으면 한다. 스몸비, 어깨빵, 폰딧불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좋겠다. 본 주제에서 구지 3문단씩 할애할 필요가 없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241</id>
		<title>Draft 스마트폰과 인터넷</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8A%A4%EB%A7%88%ED%8A%B8%ED%8F%B0%EA%B3%BC_%EC%9D%B8%ED%84%B0%EB%84%B7&amp;diff=241"/>
				<updated>2017-07-27T16:22: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 |장소/공간=가정 |사건= 은행 감소...&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세계 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미래창조과학부&lt;br /&gt;
|장소/공간=가정&lt;br /&gt;
|사건= 은행 감소, 전화로 가정생활&lt;br /&gt;
|기록물= 한국통계연감, 전전자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탄생&lt;br /&gt;
|개념용어= 스몸비, 홈오토매틱,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중독&lt;br /&gt;
|물품/도구/유물= 스마트폰, 유선전화, &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인이 가진 휴대전화기가 6천만대를 넘어서 한국의 총인구수를 훌쩍 넘어섰다. 휴대전화기수는 2010년 5천만대를 넘어선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특히 스마트 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금융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은 지점수를 80% 줄이고 인력을 전화 상담과 온라인 업무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30대 이하 젊은 층은 은행에 가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으로 금융결제를 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욱 급속하게 확장돼 20년 이내에 모든 결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lt;br /&gt;
&lt;br /&gt;
국가의 행정전산망을 이용한 국민생활 변화도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하다. 각종 정부 서류를 집에서 발급받고, 각종 통계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이 가능하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은 시장에 가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생필품을 주문하고 집에서 받는다. 홈오토메틱이 가능해진 것도 큰 변화다. 집안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조정하고 통제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여가와 오락을 즐길 수 있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의 보급 증가에 따른 부작용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몸비(Smombie)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대와 20대는 45%, 30대와 40대는 41%가 스마트폰을 보며 걸었다. 이를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한국인의 1/4이 스몸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보험회사 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총인구의 1/3 이상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스몸비와 몸을 부딪쳤다는 통계도 있다.&lt;br /&gt;
&lt;br /&gt;
‘어깨빵’이라는 말도 새로 생겼다. 스마트 폰을 보며 걷느라 다른 이가 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경우를 말한다. 외국인들은 이 말을 ‘코리안 범프’라고 설명한다. 한국인(korean)과 범프(bump)를 합친 말이다. 또 폰딧불(스마트폰+반딧불이)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한다. 공연장 등 어두운 곳에서 스마트폰 불빛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lt;br /&gt;
&lt;br /&gt;
나이든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양보할 줄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한국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에 타면 짐을 들어주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lt;br /&gt;
&lt;br /&gt;
스마트폰이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과거의 좋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들고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문간에 서 있는 젊은 스몸비 때문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차량 안쪽이 텅텅 비어 있어도 문간에 기대서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lt;br /&gt;
&lt;br /&gt;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중독도 심각하다. 스마트폰 중독은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병적으로 길어 정신·육체·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을 말한다.&lt;br /&gt;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스마트폰을 점점 더 많은 시간 이용해야만 만족하고, 중단하면 불안감을 느껴 공격적이 되는 등 가정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이상 한국인의 5%가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울 만큼 스마트폰 사용이 많다. 특히 18세에서 29세 사이에서는 18.2%가 이에 해당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선전화 보유수는 상대적으로 매년 감소, 2010년 2천만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제 1,634만대로 줄었다. 1986년 한국형 전전자교환기가 생산되어 유선전화 적체가 해소된 지 30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다.&lt;br /&gt;
&lt;br /&gt;
한 때 기업이 재무제표를 공개하면 유선 전화기가 당당하게 독립계정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고, 전화기를 보유한 가정은 부잣집으로 상징되었다. 이제 각 가정의 유선전화는 통화용으로보다는 인터넷 등 부가서비스를 위한 선로로 이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1960년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다.&lt;br /&gt;
&lt;br /&gt;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최고다. 경제개발협력기구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유·무선을 포함해 98%에 이른다. 하지만 데스크 탑, 노트북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가구 비율은 80%에 달한다. 컴퓨터 보급률은 스마트기기 보급률 증가와 반비례하여 점차 감소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lt;br /&gt;
&lt;br /&gt;
가구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비된 가구비율은 85%이다. 이 분야 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반도체 산업 발전이 컴퓨터 산업을 뒷받침 했고, 도시 밀집도가 높아 인터넷 선로 구축비용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오랫동안 지속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관련자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보건복지부 통계&lt;br /&gt;
*통계청 통계연감&lt;br /&gt;
*조선일보&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주제는 세계에서 IT 강국으로의 면모와 정보기기로 인한 한국인의 생활의 변화이다. 세계최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국 모습을 서술해야하는데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만을 한 페이지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측면과 관련한 내용을 줄이고, 가상현실 도입, 사물 인터넷(IOT), 로봇, 웨어러블 기기 등 한국인의 생활변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제시할 필요가 있다. &lt;br /&gt;
|의견2=-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인터넷 기능을 핸드폰에 넣어 스마트폰이 된 것이니까.&lt;br /&gt;
-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배경과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인터넷 기능이 핸드폰에 포함되어 특정 장소가 아닌 어느 장소에서나 인터넷으로 업무, 정보수집, 가정의 전자제품 작동 등이 가능해진 내용 등을 서술하여 과거의 생활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면 좋겠다.&amp;lt;br/&amp;gt;&lt;br /&gt;
- 본 원고의 글이 몇 년 후에도 읽힐 것을 대비하여,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년도를 밝혀주었으면 한다. 휴대전화기 6천만대를 넘어선 시점, 외국계 은행의 발표 시기, 금융경제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시점 등등&amp;lt;br/&amp;gt;&lt;br /&gt;
- 글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를 다루고 있다. 물론 스마트폰의 폐해도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 강국인 한국이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변화한 장점도 서술해주었으면 한다. 스몸비, 어깨빵, 폰딧불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좋겠다. 본 주제에서 구지 3문단씩 할애할 필요가 없을 듯.&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32</id>
		<title>Draf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32"/>
				<updated>2017-07-27T16:15: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lt;br /&gt;
|개념용어=평균기대수명, 경제성장률, 산아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lt;br /&gt;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lt;br /&gt;
2030년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다. 덩달아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한다. 이에 따라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데, 이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노후를 보장받기 시작했고,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영국 BBC 2017. 2. 22) &lt;br /&gt;
&lt;br /&gt;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 정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국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국민들도 이에 동참, 1차 산아제한 정책은 성공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도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역효과가 21세기에는 한국 발전의 커다란 장애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한다.&lt;br /&gt;
&lt;br /&gt;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쉬운 방안으로 채택한 산아제한의 결과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라는 재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초기의 인구감소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었다. 최근에는 육아문제가 인구성장을 저해한다. 핵가족화 하면서 육아문제가 오롯이 젊은이들에게 맡겨지자 젊은이들이 출산을 기피한다. 출산율의 감소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의 가구가 된다. 이중 혼자 사는 가구가 36.3%로 한국의 대표 가구가 된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 보다는 문제를 떠않게 되었다. 이는 자식 없이 사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홀로된 사람이 재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OECD 국가 중 ‘자살률’(10만 명당 25.8명)이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서고 있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가 되고,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는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 문제가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자 2012년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정부가 이렇게 팔 걷고 나선 것은 인구 증가가 내수시장의 소비를 진작하고,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인력을 공급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 지역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률은 2%대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참고문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BBC&lt;br /&gt;
*OECD&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lt;br /&gt;
*국무총리실&lt;br /&gt;
*통계청&lt;br /&gt;
*한국고용정보원&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주제는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성장인데 산아제한 정책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핵가족화, 개인주의 생활방식, 노동시장 구조와 관련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자본투입의 한계 등을 상쇄할 만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처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급감까지 우려되는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료, 복지 등)에 대한 서술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에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면, 이에 대한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저출산 고령화의 내용은 인구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저성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고민되었다. 내용도 저출산 고령화에 맞추어 서술하였고, 경제저성장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 문단에만 나오므로 제목에서 빼는 것을 제안함&amp;lt;br/&amp;gt;&lt;br /&gt;
- 산아제한 표어 내용도 인구변동 주제와도 연관되는데.&amp;lt;br/&amp;gt;-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현재 정책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중요한 정책 2-3가지라도 설명하면 좋겠다. &amp;lt;br/&amp;gt;&lt;br /&gt;
- 고령화사회가 된 배경을 설명하고 고령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려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서술할 것. 본 원고에서는 노인 자살율만 문제로 제시하였고, 그 해결책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만을 설명하고 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30</id>
		<title>Draf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30"/>
				<updated>2017-07-27T16:15: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lt;br /&gt;
|개념용어=평균기대수명, 경제성장률, 산아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lt;br /&gt;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lt;br /&gt;
2030년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다. 덩달아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한다. 이에 따라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데, 이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노후를 보장받기 시작했고,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영국 BBC 2017. 2. 22) &lt;br /&gt;
&lt;br /&gt;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 정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국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국민들도 이에 동참, 1차 산아제한 정책은 성공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도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역효과가 21세기에는 한국 발전의 커다란 장애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한다.&lt;br /&gt;
&lt;br /&gt;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쉬운 방안으로 채택한 산아제한의 결과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라는 재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초기의 인구감소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었다. 최근에는 육아문제가 인구성장을 저해한다. 핵가족화 하면서 육아문제가 오롯이 젊은이들에게 맡겨지자 젊은이들이 출산을 기피한다. 출산율의 감소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의 가구가 된다. 이중 혼자 사는 가구가 36.3%로 한국의 대표 가구가 된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 보다는 문제를 떠않게 되었다. 이는 자식 없이 사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홀로된 사람이 재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OECD 국가 중 ‘자살률’(10만 명당 25.8명)이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서고 있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가 되고,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는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 문제가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자 2012년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정부가 이렇게 팔 걷고 나선 것은 인구 증가가 내수시장의 소비를 진작하고,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인력을 공급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 지역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률은 2%대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참고문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BBC&lt;br /&gt;
*OECD&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lt;br /&gt;
*국무총리실&lt;br /&gt;
*통계청&lt;br /&gt;
*한국고용정보원&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이 글의 주제는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성장인데 산아제한 정책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핵가족화, 개인주의 생활방식, 노동시장 구조와 관련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자본투입의 한계 등을 상쇄할 만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처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급감까지 우려되는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료, 복지 등)에 대한 서술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에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면, 이에 대한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저출산 고령화의 내용은 인구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저성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고민되었다. 내용도 저출산 고령화에 맞추어 서술하였고, 경제저성장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 문단에만 나오므로 제목에서 빼는 것을 제안함&lt;br /&gt;
&amp;lt;br/&amp;gt;- 산아제한 표어 내용도 인구변동 주제와도 연관되는데.&lt;br /&gt;
&amp;lt;br/.-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현재 정책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중요한 정책 2-3가지라도 설명하면 좋겠다. &lt;br /&gt;
&amp;lt;br/&amp;gt;- 고령화사회가 된 배경을 설명하고 고령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려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서술할 것. 본 원고에서는 노인 자살율만 문제로 제시하였고, 그 해결책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만을 설명하고 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26</id>
		<title>Draf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A0%80%EC%B6%9C%EC%82%B0_%EA%B3%A0%EB%A0%B9%ED%99%94_%EA%B2%BD%EC%A0%9C%EC%A0%80%EC%84%B1%EC%9E%A5&amp;diff=226"/>
				<updated>2017-07-27T16:13: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 |장소/공간= |사건=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 |개념...&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감소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lt;br /&gt;
|장소/공간=&lt;br /&gt;
|사건=&lt;br /&gt;
|기록물=산아제한 포스터&lt;br /&gt;
|개념용어=평균기대수명, 경제성장률, 산아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저출산 고령화 경제저성장&lt;br /&gt;
세계 최초로 평균 여명이 90세를 넘는 나라&lt;br /&gt;
&lt;br /&gt;
2030년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중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을 것이다. 덩달아 남성도 80대 후반에 도달한다. 이에 따라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데, 이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노후를 보장받기 시작했고,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영국 BBC 2017. 2. 22) &lt;br /&gt;
&lt;br /&gt;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인구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정책목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 정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소라 여겼다. 교육, 주택, 도시기반 시설 확충 등에 투자하는 것을 비용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당시 국가는 “아들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국민들도 이에 동참, 1차 산아제한 정책은 성공했다. 그 이후에도 장기적인 인구 계획보다는 당장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산아제한 정책을 계속 유도했다. 1980년 국가는 경제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역효과가 21세기에는 한국 발전의 커다란 장애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인구성장률은 1970년대만 해도 2.18%였던 것이 1980년대 말 1%로 급격하게 내려갔고, 2000년대에는 급기야 0.5%이하가 되었다. 정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증가가 2040년에는 –0.32%, 2060년에는 –0.97%로 예상된다며 우려한다.&lt;br /&gt;
&lt;br /&gt;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쉬운 방안으로 채택한 산아제한의 결과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라는 재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초기의 인구감소는 급격한 산업화의 부작용이었다. 최근에는 육아문제가 인구성장을 저해한다. 핵가족화 하면서 육아문제가 오롯이 젊은이들에게 맡겨지자 젊은이들이 출산을 기피한다. 출산율의 감소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가임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들어 1.25명 이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비도시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충북 보은군의 경우, 18세 이하의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41.1%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84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통계청의 장래가구추계에 의하면 2045년 한국 가구의 71.3%가 2인 이하의 가구가 된다. 이중 혼자 사는 가구가 36.3%로 한국의 대표 가구가 된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속담이 실현되기는 했으나 행복함 보다는 문제를 떠않게 되었다. 이는 자식 없이 사는 미혼 가구가 늘어나고, 홀로된 사람이 재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OECD 국가 중 ‘자살률’(10만 명당 25.8명)이 가장 높으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10만 명당 64.9명)과 노인(65세 이상)인구 13.8%도 우울한 지표다.&lt;br /&gt;
&lt;br /&gt;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0년에 총인구의 7.2%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로 들어서고 있으며,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가 되고,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했다. 정부는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예측하고 국민의 삶의 질 개선 및 지속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5개년 기본계획, 연도별 시행계획)의 수립과 평가를 심위하기 위해 2005년 6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으며 이에 따라 기구가 설립됐다.&lt;br /&gt;
&lt;br /&gt;
정부는 이 문제가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자 2012년 이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했다. 여기에는 출산분야, 고령사회분야, 경제분야 등 3개 분야에 걸쳐 인구경쟁력유지 분과, 일과 가정양립지원 분과, 모자보건증진 분과 등 모두 10개의 분과위원회가 있다. 위원회는 2020년까지 합계출산율을 현재 1.19명에서 1.4명으로 올리기 위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16∼2020)」을 마련, 시행중이다.&lt;br /&gt;
&lt;br /&gt;
또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장단기 고령화 및 고령사회 마스터플랜, 고령사회조례 등을 만들어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정부가 이렇게 팔 걷고 나선 것은 인구 증가가 내수시장의 소비를 진작하고,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인력을 공급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한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5.5%~11.7%까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 지역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을 넘나들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률은 2%대를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출처 및 참고문헌===&lt;br /&gt;
====출처====&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BBC&lt;br /&gt;
*OECD&lt;br /&gt;
====참고문헌====&lt;br /&gt;
*저출산·고령사회 종합대책&lt;br /&gt;
*국무총리실&lt;br /&gt;
*통계청&lt;br /&gt;
*한국고용정보원&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lt;br /&gt;
|의견2=&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18</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18"/>
				<updated>2017-07-27T16:08: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lt;br /&gt;
2000년의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으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흥미진진한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 문화 경제 관광의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서울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를 두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다른 나라 수도와 달리 조상의 역사를 이어받으며 조상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독창적인 제례음악과 제사 제도를 갖춰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제사를 올린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서울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종묘와 거의 동시에 지어진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들어섰다. 경복궁은 조선 임금이 통치하며 머물던 법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됐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건축한 뒤,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안 출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4개의 큰 대문과 8개의 작은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지었다. 성벽에는 옥개석을 얹었고, 여장마다 화살을 멀리 쏘는 곳 2곳, 가까이 쏘는 곳 1곳을 갖췄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lt;br /&gt;
&lt;br /&gt;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길 즐겨한다.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 그리고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환하는 길이다. 세종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가 가장 돈돈한 중국이었지만,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그리고 최고로 완벽한 방어 시설을 지었다. 이 성은 다른 나라 성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살며 통치하며 방어하는 복합 목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쟁박물관,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물론 한글의 우수함을 눈으로 보고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한류의 근본이 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창제하던 당시대로 사용한다면 399억 음절을 적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을 찾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으며,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전용공연장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이태원도 가볼만 하다.&lt;br /&gt;
&lt;br /&gt;
서울은 4개의 큰 산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동시에 큰 강이 동서로 흐르는 자연친화적 도시다. 또 많은 건축물이 현대에 지어진 현대 도시다.&lt;br /&gt;
&lt;br /&gt;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연결된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 주경기장과 한강 수상 시설, 전시장 코엑스와 각종 회의장은 세계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있다. 서울 거리에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라는 표어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lt;br /&gt;
&lt;br /&gt;
서울 속에서 보라.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사람들의 활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역동적이며 늘 변화하고, 24시간 어디에서나 ‘배달’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갖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서울을 밤이 없는 도시”라고도 말한다. 치맥(치킨+맥주)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의 간편한 주류 문화이며, 폭탄주는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밤 문화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http://www.english.seoul.go.kr 서울]&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변정옹 누리집]&lt;br /&gt;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6</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6"/>
				<updated>2017-07-27T16:02: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lt;br /&gt;
2000년의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으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흥미진진한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 문화 경제 관광의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서울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를 두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다른 나라 수도와 달리 조상의 역사를 이어받으며 조상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독창적인 제례음악과 제사 제도를 갖춰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제사를 올린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서울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종묘와 거의 동시에 지어진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들어섰다. 경복궁은 조선 임금이 통치하며 머물던 법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됐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건축한 뒤,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안 출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4개의 큰 대문과 8개의 작은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지었다. 성벽에는 옥개석을 얹었고, 여장마다 화살을 멀리 쏘는 곳 2곳, 가까이 쏘는 곳 1곳을 갖췄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lt;br /&gt;
&lt;br /&gt;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길 즐겨한다.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 그리고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환하는 길이다. 세종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가 가장 돈돈한 중국이었지만,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그리고 최고로 완벽한 방어 시설을 지었다. 이 성은 다른 나라 성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살며 통치하며 방어하는 복합 목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쟁박물관,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물론 한글의 우수함을 눈으로 보고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한류의 근본이 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창제하던 당시대로 사용한다면 399억 음절을 적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을 찾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으며,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전용공연장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이태원도 가볼만 하다.&lt;br /&gt;
&lt;br /&gt;
서울은 4개의 큰 산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동시에 큰 강이 동서로 흐르는 자연친화적 도시다. 또 많은 건축물이 현대에 지어진 현대 도시다.&lt;br /&gt;
&lt;br /&gt;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연결된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 주경기장과 한강 수상 시설, 전시장 코엑스와 각종 회의장은 세계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있다. 서울 거리에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라는 표어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lt;br /&gt;
&lt;br /&gt;
서울 속에서 보라.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사람들의 활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역동적이며 늘 변화하고, 24시간 어디에서나 ‘배달’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갖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서울을 밤이 없는 도시”라고도 말한다. 치맥(치킨+맥주)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의 간편한 주류 문화이며, 폭탄주는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밤 문화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http://www.english.seoul.go.kr 서울]&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변정옹 누리집]&lt;br /&gt;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5</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5"/>
				<updated>2017-07-27T16:01: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연구원 검토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lt;br /&gt;
2000년의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으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흥미진진한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 문화 경제 관광의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서울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를 두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다른 나라 수도와 달리 조상의 역사를 이어받으며 조상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독창적인 제례음악과 제사 제도를 갖춰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제사를 올린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서울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종묘와 거의 동시에 지어진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들어섰다. 경복궁은 조선 임금이 통치하며 머물던 법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됐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건축한 뒤,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안 출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4개의 큰 대문과 8개의 작은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지었다. 성벽에는 옥개석을 얹었고, 여장마다 화살을 멀리 쏘는 곳 2곳, 가까이 쏘는 곳 1곳을 갖췄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lt;br /&gt;
&lt;br /&gt;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길 즐겨한다.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 그리고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환하는 길이다. 세종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가 가장 돈돈한 중국이었지만,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그리고 최고로 완벽한 방어 시설을 지었다. 이 성은 다른 나라 성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살며 통치하며 방어하는 복합 목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쟁박물관,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물론 한글의 우수함을 눈으로 보고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한류의 근본이 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창제하던 당시대로 사용한다면 399억 음절을 적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을 찾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으며,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전용공연장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이태원도 가볼만 하다.&lt;br /&gt;
&lt;br /&gt;
서울은 4개의 큰 산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동시에 큰 강이 동서로 흐르는 자연친화적 도시다. 또 많은 건축물이 현대에 지어진 현대 도시다.&lt;br /&gt;
&lt;br /&gt;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연결된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 주경기장과 한강 수상 시설, 전시장 코엑스와 각종 회의장은 세계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있다. 서울 거리에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라는 표어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lt;br /&gt;
&lt;br /&gt;
서울 속에서 보라.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사람들의 활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역동적이며 늘 변화하고, 24시간 어디에서나 ‘배달’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갖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서울을 밤이 없는 도시”라고도 말한다. 치맥(치킨+맥주)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의 간편한 주류 문화이며, 폭탄주는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밤 문화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www.english.seoul.go.kr 서울]&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변정옹 누리집]&lt;br /&gt;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3</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203"/>
				<updated>2017-07-27T16:00: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 관련자료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lt;br /&gt;
2000년의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으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흥미진진한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 문화 경제 관광의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서울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를 두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다른 나라 수도와 달리 조상의 역사를 이어받으며 조상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독창적인 제례음악과 제사 제도를 갖춰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제사를 올린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서울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종묘와 거의 동시에 지어진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들어섰다. 경복궁은 조선 임금이 통치하며 머물던 법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됐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건축한 뒤,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안 출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4개의 큰 대문과 8개의 작은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지었다. 성벽에는 옥개석을 얹었고, 여장마다 화살을 멀리 쏘는 곳 2곳, 가까이 쏘는 곳 1곳을 갖췄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lt;br /&gt;
&lt;br /&gt;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길 즐겨한다.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 그리고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환하는 길이다. 세종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가 가장 돈돈한 중국이었지만,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그리고 최고로 완벽한 방어 시설을 지었다. 이 성은 다른 나라 성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살며 통치하며 방어하는 복합 목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쟁박물관,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물론 한글의 우수함을 눈으로 보고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한류의 근본이 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창제하던 당시대로 사용한다면 399억 음절을 적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을 찾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으며,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전용공연장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이태원도 가볼만 하다.&lt;br /&gt;
&lt;br /&gt;
서울은 4개의 큰 산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동시에 큰 강이 동서로 흐르는 자연친화적 도시다. 또 많은 건축물이 현대에 지어진 현대 도시다.&lt;br /&gt;
&lt;br /&gt;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연결된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 주경기장과 한강 수상 시설, 전시장 코엑스와 각종 회의장은 세계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있다. 서울 거리에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라는 표어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lt;br /&gt;
&lt;br /&gt;
서울 속에서 보라.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사람들의 활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역동적이며 늘 변화하고, 24시간 어디에서나 ‘배달’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갖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서울을 밤이 없는 도시”라고도 말한다. 치맥(치킨+맥주)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의 간편한 주류 문화이며, 폭탄주는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밤 문화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www.english.seoul.go.kr 서울]&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변정옹 누리집]&lt;br /&gt;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198</id>
		<title>Draf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A%B3%BC%EA%B1%B0%EC%99%80_%EB%AF%B8%EB%9E%98%EC%9D%98_%EB%8F%84%EC%8B%9C_%EC%84%9C%EC%9A%B8:_%EC%95%84%EC%8B%9C%EC%95%84%EC%9D%98_%EC%8B%AC%EC%9E%A5&amp;diff=198"/>
				<updated>2017-07-27T15:56: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 2000년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태조]], [[세종]], [[박정희]], [[서울시]],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lt;br /&gt;
|장소/공간=[[서울]], [[한강]],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성곽]], [[남대문시장]] 등&lt;br /&gt;
|사건=[[6.25한국전쟁]]&lt;br /&gt;
|기록물=[[서울성곽]], [[훈민정음]] &lt;br /&gt;
|개념용어=[[조선]], [[서울성곽]], [[신·구도심]], [[천도]], [[종묘]], [[제례악]] &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lt;br /&gt;
2000년의 서울, 잠들지 않는 도시&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다양한 문화 자산을 가졌으며, 역사가 2000년이 넘은 흥미진진한 도시다. 현재 1천만 명이 모여 살며, 수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 문화 자산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역사 문화 경제 관광의 중심지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이 처음 수도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에 3국이 정립했던 때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현재의 서울 동쪽에 수도를 정하고 475년까지(약 500년) 통치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로운 한강변을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쟁탈전을 벌이는 전장이었다. 통일 신라 이후는 한적한 곳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 태조 임금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 서울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당시 서울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경복궁과 종묘를 두 기점으로 삼았고, 기본 설계는 유교와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다.&lt;br /&gt;
&lt;br /&gt;
서울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였다.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다른 나라 수도와 달리 조상의 역사를 이어받으며 조상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독창적인 제례음악과 제사 제도를 갖춰 매년 2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종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써 화려하게 제사를 올린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서울에 5개의 궁궐을 지었다. 종묘와 거의 동시에 지어진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들어섰다. 경복궁은 조선 임금이 통치하며 머물던 법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됐다.&lt;br /&gt;
&lt;br /&gt;
태조는 기반시설이 전혀 없었던 서울을 건축한 뒤, 방어하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6㎞의 성을 쌓았다. 그의 손자 세종은 이 성을 완벽한 방어용으로 개축했다. 성안 출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4개의 큰 대문과 8개의 작은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성을 적병이 공격하기에 참 어렵게 지었다. 성벽에는 옥개석을 얹었고, 여장마다 화살을 멀리 쏘는 곳 2곳, 가까이 쏘는 곳 1곳을 갖췄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게 지어 성 안에서 다른 성벽을 감시하고, 방어가 어려운 동대문 부근에는 감시탑인 ‘치’를 세웠다. 동대문에는 다른 성문에는 없는 작은 방어시설인 옹성을 쌓아 성문을 방어하게 설계했다.&lt;br /&gt;
&lt;br /&gt;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곽을 따라 개설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길 즐겨한다.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 그리고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환하는 길이다. 세종은 외교적으로 우호관계가 가장 돈돈한 중국이었지만, 국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그리고 최고로 완벽한 방어 시설을 지었다. 이 성은 다른 나라 성들과 달리, 백성들과 함께 살며 통치하며 방어하는 복합 목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성은 전쟁에서 한 번도 싸움의 무대가 되질 못했다.&lt;br /&gt;
&lt;br /&gt;
서울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이후 성 안 중심에서 급격하게 외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무허가로 조성된 구도심을 정비했다. 동시에 새로운 시가지 조성에 나섰으나 역사 유물 파괴와 강제 이주, 경제의 소수 독점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종로와 세종로가 중심축 역할을 했던 반면, 이제는 강남, 잠실, 신촌, 영등포 등으로 도심지가 확장됐다.&lt;br /&gt;
&lt;br /&gt;
서울에는 대한민국과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쟁박물관,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박물관인 한글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물론 한글의 우수함을 눈으로 보고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한류의 근본이 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창제하던 당시대로 사용한다면 399억 음절을 적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lt;br /&gt;
&lt;br /&gt;
서울을 찾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쇼핑과 볼거리 명소로 남대문 시장, 광장 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동대문 두타를 들 수 있으며, 전통음악과 무용 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전용공연장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이태원도 가볼만 하다.&lt;br /&gt;
&lt;br /&gt;
서울은 4개의 큰 산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동시에 큰 강이 동서로 흐르는 자연친화적 도시다. 또 많은 건축물이 현대에 지어진 현대 도시다.&lt;br /&gt;
&lt;br /&gt;
서울은 김포와 인천 공항을 통하여 세계 54개국 186개 도시와 연결된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잠실 주경기장과 한강 수상 시설, 전시장 코엑스와 각종 회의장은 세계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있다. 서울 거리에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라는 표어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lt;br /&gt;
&lt;br /&gt;
서울 속에서 보라.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사람들의 활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서울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역동적이며 늘 변화하고, 24시간 어디에서나 ‘배달’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갖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에 온 관광객들은 “서울을 밤이 없는 도시”라고도 말한다. 치맥(치킨+맥주)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의 간편한 주류 문화이며, 폭탄주는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밤 문화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출처/근거자료===&lt;br /&gt;
*삼국사기&lt;br /&gt;
*태조실록&lt;br /&gt;
*세종실록&lt;br /&gt;
*한국통계연감&lt;br /&gt;
===관련자료===&lt;br /&gt;
*[www.english.seoul.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http://wwwcs.dongguk.ac.kr/~byunjy/ 한국공항공사]&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서울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도시 서울: 아시아의 심장’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원고에서는 특히 미래의 도시, 아시아의 심장(세계 또는 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도시 역할을 하는 서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서울과 서울의 지리적 특징만이 부각되어 있다. 원고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글의 내용이 일관성 있게 집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속에서 보라 …(중략)…표현했다” 은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의 내용을 통해서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서울의 활기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치맥문화, 폭탄주, 밤문화를 꼭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lt;br /&gt;
|의견2=- 과거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알겠는데,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lt;br /&gt;
- 현재 서울이 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때, 각각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 및 국민, 시민들의 활동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면 한다. 청와대, 국회,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의 모임-촛불시위, 태극기 집회, 각종 집회, 월드컵 응원 등&lt;br /&gt;
- 아시아의 심장이면 국제적인 내용, 적어도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lt;br /&gt;
- 서울 한강에 강북과 강남을 잇는 수 많은 다리와 야경, 한강유원지 &lt;br /&gt;
- 박물관 중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 2개를 특히 소개한 이유가 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이 더 크고 한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 아닌가? 전쟁박물관과 문자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나쁘지는 않지만 집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크고 작은 박물관이 모두 몇 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lt;br /&gt;
- 치맥 문화, 특히 폭탄주는 꼭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lt;br /&gt;
|의견3=&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83</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83"/>
				<updated>2017-07-27T15:43: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간다. 국가가 인구증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인구구성비도 크게 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라 남자가 여성보다 많았던 사회구조가 거의 동등한 구조를 이루더니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을 앞지른다. 현재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 &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다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인구의 도시 편중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amp;lt;ref&amp;gt;도시계획 지역으로 제한 받는 지역을 의미한다.&amp;lt;/ref&amp;gt; 이의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lt;br /&gt;
&lt;br /&gt;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자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보다 많지만 지역별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 반면 시골에서는 빈집 관리와 처리가 지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lt;br /&gt;
&lt;br /&gt;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거나 개량하지만 도시주택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63.4%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몰려 사는 가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이의 관리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인구 도시집중으로 파생된 문제도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집을 건축하면서 신고하지 않고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이들을 일정 지역으로 몰아 한 지역에 거주케 하는 이주정책까지도 강제로 시행했다. 그러나 도시기반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경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인구 감소에 직면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lt;br /&gt;
최근에는 도시지역에 문화 및 보건·복지 시설이 집중 되면서 또 다른 인구의 도시집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은 공공의 교통기관인 철도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되면 이곳으로 인구 집중이 또 한 차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타 지역 주민과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런 시설의 혜택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이와 대조적으로 농어촌 지역 면단위의 생활 인프라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낮다. 예로 면단위의 상하수도 보급률은 70%대에 불과하며, 병원과 의원 조산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전체 기관 중 약 8%만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보육시설도 약 17%만 산재해 있어 주민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lt;br /&gt;
&lt;br /&gt;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통계상 1가구당 1주택을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주택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lt;br /&gt;
&lt;br /&gt;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면서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월세를 살던 일반 가구들이 매월 집세를 지불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었다. 이에 따라 내수시장이 위축되었고,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연구원 검토'''==&lt;br /&gt;
{{검토의견&lt;br /&gt;
|의견1=주제인 ‘인구변동과 도시화’인데 글의 주요 내용은 주택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주택공급 불균형 등 주택문제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특징, 문제점, 정부의 해결방안 등 현재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현상과 극복을 위한 성공사례 제시를 희망한다. 출처 및 근거자료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lt;br /&gt;
|의견2=- 인구변동과 도시화에 대해 통계자료를 본 원고에 적합한 표로 작성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lt;br /&gt;
- 인구변동에 대한 내용에는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각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서술하였으면 합니다. 각 문단마다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어, 집필자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으로 해방 이후 또는 남북 분단 이후 현재의 남한의 인구 증가율, 각 연령별, 성별 비율의 변동, 도시와 농어촌 인구 구성 추이를 각 사회 변동과 연계하여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인구변동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도시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할 때, 도시에 대한 개념 설명을 간단하게 했으면 한다.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 및 시기를 제시하였으면 한다. &amp;lt;br/&amp;gt;&lt;br /&gt;
- 도시화의 문제는 주택문제 뿐 아니라 교통문제, 교육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가져왔다. 너무 주택문제에만 집중되어 서술하였다. 또한 각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노력과 개선된 점도 서술했으면 한다. &lt;br /&gt;
|의견3=&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80</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80"/>
				<updated>2017-07-27T15:39: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간다. 국가가 인구증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인구구성비도 크게 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라 남자가 여성보다 많았던 사회구조가 거의 동등한 구조를 이루더니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을 앞지른다. 현재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 &lt;br /&gt;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다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lt;br /&gt;
인구의 도시 편중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amp;lt;ref&amp;gt;도시계획 지역으로 제한 받는 지역을 의미한다.&amp;lt;/ref&amp;gt; 이의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lt;br /&gt;
&lt;br /&gt;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자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보다 많지만 지역별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 반면 시골에서는 빈집 관리와 처리가 지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lt;br /&gt;
&lt;br /&gt;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거나 개량하지만 도시주택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63.4%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몰려 사는 가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이의 관리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인구 도시집중으로 파생된 문제도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집을 건축하면서 신고하지 않고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이들을 일정 지역으로 몰아 한 지역에 거주케 하는 이주정책까지도 강제로 시행했다. 그러나 도시기반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lt;br /&gt;
&lt;br /&gt;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경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인구 감소에 직면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lt;br /&gt;
최근에는 도시지역에 문화 및 보건·복지 시설이 집중 되면서 또 다른 인구의 도시집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은 공공의 교통기관인 철도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되면 이곳으로 인구 집중이 또 한 차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타 지역 주민과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런 시설의 혜택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lt;br /&gt;
&lt;br /&gt;
이와 대조적으로 농어촌 지역 면단위의 생활 인프라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낮다. 예로 면단위의 상하수도 보급률은 70%대에 불과하며, 병원과 의원 조산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전체 기관 중 약 8%만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보육시설도 약 17%만 산재해 있어 주민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lt;br /&gt;
&lt;br /&gt;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통계상 1가구당 1주택을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주택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lt;br /&gt;
&lt;br /&gt;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면서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월세를 살던 일반 가구들이 매월 집세를 지불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었다. 이에 따라 내수시장이 위축되었고,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7</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7"/>
				<updated>2017-07-27T15:38: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간다. 국가가 인구증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인구구성비도 크게 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라 남자가 여성보다 많았던 사회구조가 거의 동등한 구조를 이루더니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을 앞지른다. 현재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다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인구의 도시 편중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amp;lt;ref&amp;gt;도시계획 지역으로 제한 받는 지역을 의미한다.&amp;lt;/ref&amp;gt; 이의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lt;br /&gt;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자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보다 많지만 지역별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 반면 시골에서는 빈집 관리와 처리가 지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lt;br /&gt;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거나 개량하지만 도시주택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63.4%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몰려 사는 가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이의 관리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lt;br /&gt;
인구 도시집중으로 파생된 문제도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집을 건축하면서 신고하지 않고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이들을 일정 지역으로 몰아 한 지역에 거주케 하는 이주정책까지도 강제로 시행했다. 그러나 도시기반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lt;br /&gt;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경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인구 감소에 직면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lt;br /&gt;
최근에는 도시지역에 문화 및 보건·복지 시설이 집중 되면서 또 다른 인구의 도시집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은 공공의 교통기관인 철도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lt;br /&gt;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되면 이곳으로 인구 집중이 또 한 차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타 지역 주민과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런 시설의 혜택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lt;br /&gt;
이와 대조적으로 농어촌 지역 면단위의 생활 인프라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낮다. 예로 면단위의 상하수도 보급률은 70%대에 불과하며, 병원과 의원 조산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전체 기관 중 약 8%만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보육시설도 약 17%만 산재해 있어 주민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lt;br /&gt;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통계상 1가구당 1주택을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주택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lt;br /&gt;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면서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월세를 살던 일반 가구들이 매월 집세를 지불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었다. 이에 따라 내수시장이 위축되었고,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br /&gt;
&lt;br /&gt;
[[분류 : 문화로 이해하는 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6</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6"/>
				<updated>2017-07-27T15:36: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간다. 국가가 인구증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인구구성비도 크게 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라 남자가 여성보다 많았던 사회구조가 거의 동등한 구조를 이루더니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을 앞지른다. 현재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다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인구의 도시 편중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amp;lt;ref&amp;gt;도시계획 지역으로 제한 받는 지역을 의미한다.&amp;lt;/ref&amp;gt; 이의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자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보다 많지만 지역별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 반면 시골에서는 빈집 관리와 처리가 지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거나 개량하지만 도시주택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63.4%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몰려 사는 가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이의 관리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인구 도시집중으로 파생된 문제도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집을 건축하면서 신고하지 않고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이들을 일정 지역으로 몰아 한 지역에 거주케 하는 이주정책까지도 강제로 시행했다. 그러나 도시기반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경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인구 감소에 직면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근에는 도시지역에 문화 및 보건·복지 시설이 집중 되면서 또 다른 인구의 도시집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은 공공의 교통기관인 철도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되면 이곳으로 인구 집중이 또 한 차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타 지역 주민과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런 시설의 혜택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와 대조적으로 농어촌 지역 면단위의 생활 인프라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낮다. 예로 면단위의 상하수도 보급률은 70%대에 불과하며, 병원과 의원 조산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전체 기관 중 약 8%만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보육시설도 약 17%만 산재해 있어 주민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통계상 1가구당 1주택을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주택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면서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월세를 살던 일반 가구들이 매월 집세를 지불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었다. 이에 따라 내수시장이 위축되었고,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4</id>
		<title>Draft 인구변동과 도시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Korea100/wiki/index.php?title=Draft_%EC%9D%B8%EA%B5%AC%EB%B3%80%EB%8F%99%EA%B3%BC_%EB%8F%84%EC%8B%9C%ED%99%94&amp;diff=174"/>
				<updated>2017-07-27T15:35: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김선미: 새 문서: {{기본정보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 |집필자=신현덕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 |사건=...&lt;/p&gt;
&lt;hr /&gt;
&lt;div&gt;{{기본정보&lt;br /&gt;
|제목=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집필자=신현덕&lt;br /&gt;
|인물/기관/단체=[[통계청]], [[행정자치부]] &lt;br /&gt;
|장소/공간=[[서울]], [[기호지방]]&lt;br /&gt;
|사건=[[강제이주]]&lt;br /&gt;
|기록물=[[한국통계연감]], [[한국토지주택공사 통계연보]]&lt;br /&gt;
|개념용어=[[전세]], [[월세]], [[1인 가구]], [[강제 이주]], [[총인구]]&lt;br /&gt;
|물품/도구/유물=&lt;br /&gt;
}}&lt;br /&gt;
&lt;br /&gt;
=='''원고'''==&lt;br /&gt;
인구변동과 도시화&lt;br /&gt;
인구 증가 정책이 시급하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2012년 5천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인구 증가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 2060년에는 총인구가 4525만 명으로 줄고, 생산가능인구가 전체인구의 반 이하로 내려간다. 국가가 인구증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인구구성비도 크게 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에 따라 남자가 여성보다 많았던 사회구조가 거의 동등한 구조를 이루더니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을 앞지른다. 현재 남녀 구성비는 50.1대 49.9로 남성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서울은 49.1대 50.9로 여성이 더 많으며 젊은 여성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다. &lt;br /&gt;
인구의 이동은 가족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에 다하던 대가족제도&amp;lt;ref&amp;gt;할아버지 부부,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다.&amp;lt;/ref&amp;gt;가 무너졌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시작된 대가족 해체로 대가족 비율이 해마다 줄어들더니 2015년에는 4.2%가 되었다. 최근 들어 주택구입과  육아가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결혼한 자녀가 늘고는 있지만 통계에 반영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반면 나이든 부부 둘만 사는 가구는 매년 늘어 1970년 5.4%이던 것이 2015년에는 21.9%로 늘었다. 장성한 자녀가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lt;br /&gt;
인구의 도시 편중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amp;lt;ref&amp;gt;도시계획 지역으로 제한 받는 지역을 의미한다.&amp;lt;/ref&amp;gt; 이의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따라 농촌 인구를 값싼 산업현장 근로자로 불러들인 결과이다. 1960년대 말 ‘탈농촌 도시집중’이 이를 부추겼다.&lt;br /&gt;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자 주택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늘어나는 인구가 주택 공급을 넘었고, 덩달아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국가 전체로는 주택보급률이 102.3에 달해 주택이 가구보다 많지만 지역별 편중이 심하다. 전국의 7대 도시&amp;lt;ref&amp;gt;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을 말한다.&amp;lt;/ref&amp;gt;에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의 수는 겨우 50%를 넘는다. 전국으로는 자기 집 보유비율이 55.6%인데 반해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44.6%에 불과하다. 반면 시골에서는 빈집 관리와 처리가 지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했다.&lt;br /&gt;
도시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많은 공동주택 특히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거나 개량하지만 도시주택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63.4%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몰려 사는 가구가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이의 관리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lt;br /&gt;
인구 도시집중으로 파생된 문제도 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집을 건축하면서 신고하지 않고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시를 정비하면서 이들을 일정 지역으로 몰아 한 지역에 거주케 하는 이주정책까지도 강제로 시행했다. 그러나 도시기반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lt;br /&gt;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경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인구 감소에 직면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인구 증가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lt;br /&gt;
최근에는 도시지역에 문화 및 보건·복지 시설이 집중 되면서 또 다른 인구의 도시집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 인천 등 기호지방에 한국 인구의 50% 이상이 모여 산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은 공공의 교통기관인 철도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lt;br /&gt;
국가와 서울, 경기도 및 인천시는 지하 깊은 곳을 활용하는 대심도 교통망 계획을 수립,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되면 이곳으로 인구 집중이 또 한 차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타 지역 주민과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런 시설의 혜택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lt;br /&gt;
이와 대조적으로 농어촌 지역 면단위의 생활 인프라 보급률은 도시에 비해 낮다. 예로 면단위의 상하수도 보급률은 70%대에 불과하며, 병원과 의원 조산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전체 기관 중 약 8%만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보육시설도 약 17%만 산재해 있어 주민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lt;br /&gt;
미래 주택문제도 만만찮다. 통계상 1가구당 1주택을 넘어서자 각 지자체는 주택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새로운 주택문제가 발생했다. 소형 주택의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전국의 1인 가구가 이미 500만을 넘어섰고, 1인용 작은 주택으로 공급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이다.&lt;br /&gt;
한국에만 있는 유일한 전세 제도가 집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월세로 전환되면서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월세를 살던 일반 가구들이 매월 집세를 지불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었다. 이에 따라 내수시장이 위축되었고,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관련자료===&lt;br /&gt;
*한국학중앙연구원&lt;br /&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통계청 인구통계&lt;br /&gt;
*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계획현황&lt;/div&gt;</summary>
		<author><name>김선미</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