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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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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24일 (금) 23: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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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심(慧諶)
송광사 국사전 혜심 진영
대표명칭 혜심
한자 慧諶
생몰년 1178년(명종 8)-1234년(고종 21)
시호 진각(眞覺)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
탑호 원소(圓炤)
영을(永乙)
성씨 최씨(崔氏)
속명 식(寔)
출신지 전라남도 화순
승탑비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혜심(慧諶)은 1178년(명종 8) 전남 나주 화순현(羅州和順縣)에서 태어났다. 혜심은 그의 휘(諱)이고, 속성(俗姓)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寔), 자(字)는 영을(永乙)이며, 진각국사(眞覺國師)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자신을 무의자(無衣子)라 하여 걸림 없는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휘(諱)는 완(琬)이고, 어머니 배씨(裴氏)이다. 혜심의 아버지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1]

혜심의 태몽은 일종의 예지몽으로서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가 ‘태어났을 때 탯줄을 여러 겹으로 감아 마치 가사를 메고 있는 것과 같았다’는 점은 ‘가사’가 출가한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임을 참작했을 때 탯줄을 가사처럼 두르고 있었다는 점 또한 혜심이 승려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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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휘는 혜심(惠諶), 자는 영을(永乙)이고, 자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으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寔)으로 나주(羅州) 화순현인(和順縣人)이다. 부친은 휘가 완(琬)인데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지냈다. 모친 배씨(裵氏)가 천문(天門)이 활짝 열려 보이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여 열두 달 만에 낳았는데, 그 태의(胎衣)가 거듭 감겨서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형상과 같았다. 분만되자 두 눈이 모두 감겼더니 7일이 지나서야 떴다. 그는 매양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려 모친을 등지고 누우매 부모는 그를 괴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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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출가수행

일찍이 출가를 원했던 혜심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유학에 힘을 썼다. 비록 지방 향리 출신의 부친이었지만 일찍 돌아가심으로 인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사람은 외아들 혜심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에 승안(承安) 6년 신유년, 그의 나이 24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3]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은 혜심의 재능을 아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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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일찍 죽자, 모친에게 출가(出家)하기를 빌었더니, 모친이 허락하지 않고 유업(儒業)을 힘쓰게 하였으나, 항상 경(經)을 외고 주문(呪文)을 읽더니 오랜 후에 득력하였다. 음란한 무당과 요사스러운 신사(神祠)를 배척하고 헐어 버리기를 좋아하였고, 이따금 사람의 병을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6년인 신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이해에 태학(太學)에 들어갔다가 모친의 병보(病報)를 듣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와 족형(族兄)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모친의 병을 간호하였다. 정신을 집중하여 관불삼매(觀佛三昧)의 지경에 들어갔더니, 모친의 꿈에 제불(諸佛)ㆍ보살(菩薩)이 두루 사방에 나타나 보이고, 꿈이 깨자 병이 나았다. 배광한의 부부도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 이듬해에 모친이 작고하였다. 이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 있어 수선사(修禪社)를 새로 개설하여 도화(道化)가 한창 왕성하였는데, 국사는 급히 가서 참례(參禮)하고 재(齋)를 올려 모친의 명복을 빌기를 청하고 나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니, 보조국사는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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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활동

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관찰하고 시험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인정될 때 인가(印可)를 통하여 법을 전한다. 지눌이 혜심에게 부채를 전하므로 그의 깨달음을 인정한 것이 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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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에게 참례할 때 이와 같이 이야기하니, 보조국사는 그를 인가(印可)하였다. 그리고 손에 쥐었던 부채를 주니, 국사는 또 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옛날엔 스승의 손에 있더니 / 昔在師翁手裏

이제는 나의 수중에 있구나 / 今來弟子掌中

만약 들끓는 번뇌 있으면 / 若遇熱忙狂走

맑은 바람 일으켜도 무방하리 / 不妨打起淸風

보조국사는 더욱 큰 인재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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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210년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혜심이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수선사를 증축시키고 불법을 구하므로 그가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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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大安) 경오년에 보조국사가 입적(入寂)하자, 그 문인들이 임금에게 알려서 칙명을 받들어 그를 계승하게 하매, 국사는 부득이 사원에 들어가 법당을 여니, 이에 사방의 학자 및 도인(道人)ㆍ속인(俗人) 중의 높은 사람과 은일의 노숙한 사람들이 마치 구름이 달리듯, 그림자가 따르듯 마구 모여들었다. 그래서 법당이 매우 좁게 되었는데,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사를 독려, 드디어 넓힌 다음, 또 사자를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한 벌과 다(茶)ㆍ향(香)ㆍ보병(寶甁) 등을 내리고 따라서 법요(法要)를 구하매, 조사는 《심요(心要)》를 찬(撰)하여 바쳤으니, 그 책이 지금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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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고종(高宗)은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를 제수하였으며, 1220년(고종 7) 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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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양(晉陽) 최공(崔公 우(崔瑀))이 국사의 풍운(風韻)을 듣고 성의를 기울여 마지않아, 여러 번 서울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국사는 끝내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리의 거리에서 서로 마음의 합함이 마치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공은 다시 두 아들을 보내어 국사를 모시게 하였고, 무릇 국사의 생활 도구를 힘을 다해서 마련해 주었으며, 심지어 다(茶)ㆍ향(香)ㆍ약이(藥餌)ㆍ진수(珍羞)ㆍ명과(名菓)와 도구(道具)나 법복(法服)까지를 항상 제때에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또 대선사(大禪師)를 더 내렸으니, 그 선발하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 승관(僧官)에 오른 일은 국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중략)...

정우(貞祐) 기묘년에 조서를 내려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게 하였다. 국사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그 이듬해에 원(院)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사(本社)를 상주하는 처소로 삼았다. 본사에 있으면서 병이 나니, 진양공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임금에게 알리매, 어의(御醫) 모(某)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다. 봄에 월등사(月登寺)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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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입적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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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서 뒷일을 부탁하고, 마곡에게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자, 마곡이 대답하기를,

“무엇을 가리키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국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몹시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으니, 국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부좌(跏趺坐)하고 죽었다. 이튿날 월등사의 북쪽 산봉우리에서 화장하고 그 유골을 주워서 본산(本山)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진각국사(眞覺國師)하는 시호를 내렸다. 을미년 여름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를 세우니, 임금이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향년은 57세이고, 승랍(僧臘)은 3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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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지식관계망

  • 진각국사 혜심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혜심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월남사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지눌 혜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혜심 순천 송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혜심 산청 단속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혜심 최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혜심 고려 강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혜심 고려 고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심요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선문염송집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조계진각구사어록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구자무불성화간병론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무의자시집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금강경찬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선문강요 혜심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혜심 몽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혜심 진훈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혜심 각훈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혜심 마곡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42쪽.
  2.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43쪽.
  3.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44쪽.
  4. 김위석, "혜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54쪽.
  6. 김위석, "혜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방룡, 「진각 혜심의 선사상 체계와 불교사적 의의」, 『한국선학』 40, 2015, 199-234쪽.
  • 김위석, "혜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재현, 혜심의 선사상과 간화, 철학 78, 2004, 29-49쪽.
  • 이규보,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의 비명", 「비명(碑銘)ㆍ묘지(墓誌)」, 『동국이상국집』 35. 온라인 참조: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동국이상국집,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 전행욱, 『수선사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정성본, 진각국사 혜심의 간화선 연구, 보조사상 23, 2005, 71-136쪽.
  • 진성규, 「진각국사 혜심의 수선사활동」, 중앙사론 5, 1987, 1-60쪽.
  • 진성규, 『고려후기 진각국사 혜심 연구』, 중앙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6.
  •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동아시아불교문화』 17, 2014, 237-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