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Encyves Wiki
Wlghkw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8일 (목) 01:24 판 (억불에 맞서 선을 추구하다)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특별기고 목록
글: 이재형 기자(법보신문)

인도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Quote-left.png 방장실에 앉아 다과를 드니 이것은 변함없는 좋은 약이로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눈 밝은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 Quote-right.png


스승 지공의 법을 고려에 펴리라

1367년 겨울, 청평사에 머물던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원나라에서 온 보암(普菴) 장로에게 비통한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스승 지공(指空, Sunyadiya, 1300?-1361)이 열반에 들었다는 것이다. 나옹은 보암으로부터 지공이 직접 쓴 편지 한 통과 가사(袈裟) 한 벌도 전해 받았다. 일생 구도와 전법의 길을 걸어온 스승이 자신에게 법을 유촉하고 있었다.

나옹지공과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1358년 3월, 지공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를 묻는 나옹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을 찾아 머무른다면 불법이 자연히 일어나리라”라고 말했다. 순간 나옹은 스승이 일컫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았다. 지공이 직접 고려를 다녀갔을 때 인상적으로 남았다던 곳, 인도 나란다사원의 기운을 빼닮았다는 바로 회암사(檜巖寺)였다. 그곳은 나옹이 처음 견성한 곳이기도 했다.

나옹지공에게 삼배를 올리고 곧바로 귀국했다. 그때 나옹은 이제 더 이상 스승을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정이 아닌 법을 따라야 하는 출가자였다. 아쉬움 대신 천축국의 고승 지공의 법을 고려에 펴겠다는 서원을 깊이 새겼었다.

그런데 스승이 적멸에 든 것이다. 생과 사가 구름 한 조각이 나고 멸하는 이치와 다르지 않음을 잘 알았지만 인간적인 그리움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나옹지공을 위해 향을 피우고 차를 올렸다.

지공의 선지식을 만난 나옹

계율과 교학, 선정에도 두루 밝았던 지공. 그는 인도 마가다국의 왕자 출신이었다. 부왕의 병이 낫기를 발원하며 8살 때 출가한 그는 나란다사원의 율현(律賢)에게서 경율론 삼장을 배우고, 남인도 능가국(楞伽國, 스리랑카)의 보명존자로부터 선의 이치를 깨달은 고승이었다.

지공은 “이제 중생교화에 힘쓰라”는 스승의 당부에 따라 멀고 먼 교화의 여정에 올랐다.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를 오갔고 다시 남인도에서 북인도를 거쳐 인도불교 전통이 이어지는 티베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밀교를 접한 그는 다시 원의 수도인 연도(燕都, 大都)에 도착했다. 지공이 연도에 머무른 지 오래지 않아 주위에서는 지공을 서역에서 온 선지식으로 크게 떠받들었다. 황제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이 그를 초청해 법을 들었고, 그들은 지공의 심오한 경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공은 얼마 후 발걸음을 고려로 옮겼다. 고려인들은 “석존께서 다시 태어나 이곳에 오셨으니 어찌 찾아뵙지 않겠는가!”라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지공은 고려들에게 법을 설하고 무생계를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려 불교의 마지막 수호자가 될 8살의 어린 나옹도 포함돼 있었다. 지공은 법기보살이 상주한다는 금강산을 참배했고 다시 회암사를 거쳐 통도사도 방문했다. 그렇게 지공은 2년 7개월간 고려를 유람한 뒤 연도로 돌아갔다. 비록 지공은 떠났지만 고려인들에게 그는 활불로 깊이 각인됐고, 숱한 구도자들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됐다.

나옹지공을 다시 만난 것은 1348년 연도 법원사(法源寺)에서였다. 둘 사이에 곧바로 문답이 오고갔다.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육지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나타내보라.”

나옹은 곧장 지공에게 다가가 합장하고 섰다.

“무엇하러 왔는가?”

“후세 사람들을 위해 왔습니다.”

지공나옹의 법기를 알아봤으며, 자신의 법을 이을 제자를 만났음을 직감했다. 나옹지공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함을 새삼 알았다.

지공으로부터 오후인가를 받다

나옹은 그동안 ‘삼세 부처님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고, 역대 조사님네도 어찌할 수 없으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궁극의 답을 찾기 위해 곁눈질 한 번 않고 달려왔다. 개성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살 때 친구가 세상을 떠나자 자책감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 몰두했다. 그는 고민 끝에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고 발원하고 산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뒤 회암사로 옮겨 가부좌를 틀었다. 그렇게 4년이 흘렀을 때 나옹의 의심덩이가 갑자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노래했다.

‘허공을 쳐부수어 뼈를 꺼내고/ 번쩍이는 번갯불 속에 토굴 짓나니/ 누가 내 집 가풍 묻는다면/ 이밖에 다른 물건 없다고 하리라’

그렇지만 나옹은 자신이 구경각을 체득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중국의 고승들에게 ‘오후인가(悟後認可)’를 받기 위해 험난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석가의 현신’ ‘제2의 달마’라는 지공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지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나옹은 다시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불꽃 튀는 법거량을 주고받았다. 임제의 법을 이은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도 나옹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가사와 불자(拂子)를 건넸다.

나옹은 3년간의 구법여행을 마치고 스승 지공이 있는 연도 법원사로 돌아왔다. 지공나옹의 깨달음이 더욱 단단히 여물었음을 알았다. 지공나옹을 방장실로 맞아들여 법의(法衣) 한 벌과 불자(拂子) 하나, 그리고 산스크리트로 쓴 편지를 건넸다. ‘종지를 밝힌 법왕에게 천검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옹은 자신을 인가한 스승에게 감사의 절을 세 번 올렸다.

한 달 뒤 나옹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그의 명성은 원나라 곳곳에 퍼져 있었다. 황제인 순제(順帝)가 나옹의 법을 칭송했고 1356년 10월 나옹이 연도의 광제선사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허나 얼마 뒤 나옹은 주지를 그만 두고 스승 지공을 찾아왔다. 그때 지공나옹에게 본국의 삼산양수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나옹지공을 떠나 고려로 향했다.

억불에 맞서 선을 추구하다

나옹의 명성은 고려에도 자자했다. 특히 지공과 평산의 법을 이었다는 사실에 그에 거는 기대는 더욱 컸다. 나옹은 왕의 권유로 개성 북쪽의 신광사 주지를 맡았다. 그때 홍건적의 대대적인 침략에도 의연히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옹은 더욱 유명해졌고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더불어 고려 최고의 고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옹은 불교가 점점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음을 잘 알았다. 성리학의 도전과 비판은 갈수록 거세졌다. 나옹이 강력한 선을 추구했던 것도 불교계를 일신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가 법을 설하면 물 밑에서 불이 일어 허공을 사르고 초목과 총림들이 사자후를 토하는 듯했다. 나옹을 향한 세간의 존경과 질시가 점점 극단으로 나뉘었다.

나옹은 스승 지공의 가르침에 따라 회암사 중창에 착수했다. 나옹은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회암사 중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폭넓은 후원을 약속받았다. 1370년 나옹은 불교계를 대표해 승과인 공부선(工夫禪)을 주관하고 다음 해에는 왕사(王師)로 책봉됐다. 나옹회암사지공의 사리탑을 세우는 등 중창불사에 힘을 쏟았다. 그런 나옹의 열정에 백성들은 물론 공민왕도 적극 호응했다. 1376년 4월, 마침내 회암사 낙성식이 열렸다. 비록 중창 과정에서 공민왕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날 낙성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놀란 것은 식자들이었다. 불교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다시 높아진다면 성리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왕에게 거듭 상소를 올렸고 마침내 나옹에게 멀리 밀양의 영원사로 옮기라는 조처가 떨어졌다. 나옹은 알았다. 자신의 삶이 끝자락에 이르렀음을. 5월 3일 나옹이 뱃길을 따라 내려가는 도중 병이 심해져 신륵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나옹에게 여흥군수는 떠나기를 거듭 독촉했다. 나옹이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네. 나는 곧 간다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 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그 말과 함께 나옹은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57, 법랍 37이었다.

그 때 고을사람들은 오색구름이 산꼭대기를 덮는 것을 보았다. 나옹이 타던 흰말은 3일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그의 입적과 더불어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기 시작했다. 다비를 마친 그의 몸에서는 수많은 영롱한 사리들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의 곁에 온 생불이라 여겼고, 그에 대한 수많은 전설도 생겨났다.

나옹이 밝힌 법의 등불은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에게 이어졌으며 기나긴 억불의 시대에도 끝내 꺼지지 않았다. 천축국의 고승 지공이 고려 왕사 나옹에게 보낸 편지는 『나옹화상집(懶翁和尙集)』에 전한다.

같이보기

참고문헌

  • 『나옹화상집』, 동국역경원.
  • 허흥식,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일조각, 1997.
  • 김효탄,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연구』, 민족사, 1999.
  • 박재금, 「나옹 선시의 상징과 역설」, 『한국의 민속과 문화』 12집,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7.
  • 이철헌, 「나옹 혜근의 미타정토관」, 『한국불교학』 18집, 한국불교학회, 1993.
  • 황인규, 「나옹혜근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 『대각사상』 11집, 대각사상연구원, 2008.
  • 조동일, 「전설의 형성과 의미, 나옹전설의 경우」, 『관악어문연구』 제3집,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