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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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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
(榮州 毘盧寺)
대표명칭 영주 비로사
한자 榮州 毘盧寺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381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신라시대
창건자 진정(眞定)
경내문화재 영주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영주 비로사 아미타후불탱화,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영주 비로사 삼가동석조당간지주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1]

내용

통일신라시대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절로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리었다.[2] 진정의상(義湘)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3]

그가 937년(태조 2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眞空大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普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4]

1126년(인종 4)에는 왕이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에는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5]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 경희가 중건하였다. 이어 1684년(숙종 10) 월하(月河)가 법당과 산신각 등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泛船)이 요사(寮舍)를 증축하였는데,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6]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뿐이지만, 진공대사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석조당간지주(石造幢竿支柱),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등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7]

지식 관계망

  •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와 진공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주 비로사 진정 A는 B가 창건하였다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영주 비로사 A는 B에 있다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진정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주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영주 비로사 A는 B에 있다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영주 비로사 A는 B에 있다
영주 비로사 아미타후불탱화 영주 비로사 A는 B에 있다
영주 비로사 삼가동석조당간지주 영주 비로사 A는 B에 있다
의상 진공 A는 B의 스승이다
영주 비로사 의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진정비로사를 창건하였다
937년 진정이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가 '진공대사(眞空大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普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 인종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385년 환암(幻庵)이 이 절을 중창하였다
1592년 이 절에서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1609년 경희가 이 절을 중건하였다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다
1927년 범선이 요사를 중수하였다
1932년 범선이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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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주석

  1. 김상현, "비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신문왕 때 승려 진정(眞定)이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로사(영주시)", 『위키백과』online.
  3. 김상현, "비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상현, "비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상현, "비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비로사", 『두산백과』online.
  7. "비로사",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