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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음)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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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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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 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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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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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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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월) 13:23 판

휴정(休靜)
BHST Monk1.png
대표명칭 휴정
한자 休靜
생몰년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 37)
청허자(淸虛子), 청허당(淸虛堂), 서산(西山)
법호 연초(演初)
현응(玄應)
성씨 최씨(崔氏)
본관 완산(完山)
속명 여신(汝信)
출신지 평안남도 안주
승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승탑비 청도 운문사 설송대사비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완산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고 법명은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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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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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출가수행

휴정은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 華嚴經』·『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 般若經』·『법화경 法華經』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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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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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활동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음)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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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 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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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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