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화성능행도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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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연향례
 
|주제= 연향례
 
|제작연대= 19세기 후반(후대 모사본)
 
|제작연대= 19세기 후반(후대 모사본)
|구성= 총 8폭<br />1폭 :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br />2폭 :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br />3폭 :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br />4폭 :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br />5폭 :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br />6폭 :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br />7폭 :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br />8폭 :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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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총 8폭
 
|크기= 각 폭 214.5 × 73.5㎝<br /> 각 그림 크기 149.8 ×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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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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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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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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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는데, [[정조]]가 을묘년 화성 행차시 계획하고 진행한 행사들을 8폭에 나누어 그린 병풍이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3쪽.</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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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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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에 천하의 명당지라는 화산(華山) 아래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이후 매년 수원으로 행차하여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그런데 1795년은 2박 3일 정도였던 일정이 7박 8일로 늘어났고,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행차하였으며, 화성행궁에서 [[혜경궁(혜빈)]]의 회갑잔치를 벌였다. 1795년은 [[정조]]가 국왕이 된지 20년이 되는 해이고, 할머니인 정순왕후가 ‘망육(望六)’이라 불리는 51세가 되는 해였으며, 사도세자와 [[혜경궁(혜빈)]]이 함께 회갑을 맞는 해였기 때문이다. 또한 행차가 끝난 후에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편찬하고, 정리자(整理字)란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했으며,<ref>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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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성능행도병]]》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우학문화재단]]에 남아있는데, 내용은 같지만 순서가 같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은 8폭이 각각 따로 족자로 입수되었고, [[국립고궁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은 앞의 4폭의 순서가 달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와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가 앞에 있고, [[삼성미술관 리움]]은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와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가 앞에 있었다. 행사가 진행된 순서와 비교해보면, [[삼성미술관 리움]]의 경우가 맞다. 그러나 행사가 진행된 순서에 맞추면, 5번째 폭이 3번째 폭보다 먼저 배치해야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구성은 [[정조]]가 의도하였던 순서로 구성되지만, 실제 [[화성행궁]]에서는 이틀간의 여정으로 [[혜경궁(혜빈)]]이 피로했고, 둘째 날은 비도 내려서 병풍과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순서가 달라지게 되었다. 실제 행사는 [[혜경궁(혜빈)]]의 건강과 날씨로 인해 조정되었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정조]]가 본래 의도한 순서를 따라 구성하였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4~13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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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 1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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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온 첫날 [[정조]]는 공자 사당에 참배하였다. [[공자]]의 사당은 지방마다 세워져 그 마을의 중심지이자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였다. 그림에서 가장 위에 있는 건물이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이다. [[대성전]] 중심의 옆쪽으로 [[정조]]의 자리가 있는데, 공자를 높이는 [[정조]]의 행위가 중심이다. [[대성전]] 아래에는 [[정조]]와 함께 의식에 참여할 특권을 얻은 향교의 유생들이 그려져 있고, 그림 하단에는 [[정조]]를 따라온 백관들이 대기하고 있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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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 2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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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화성을 비롯한 인근 도시의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를 관리로 등용하였다. 과거시험은 3년에 한번 서울에서 행해졌는데, [[공자]] 사당 참배 후 행해졌기 때문에 화성과 인근 지역을 우대하는 행사였다. 그림은 합격자를 발표하는 의식으로, [[낙남헌]] 안에 [[정조]]와 의식 집행자들이 위치하고 마당에는 급제한 자들이 관에 어사화를 꽂고 문반은 동쪽에, 무반은 서쪽에 늘어서있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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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 3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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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혜빈)]]의 회갑잔치는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였으나 [[혜경궁(혜빈)]]의 건강을 고려해 넷째 날로 미루어졌다. 행사가 열린 건물인 [[봉수당]]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잔치를 위해 [[정조]]가 이름을 바꾸어지었다. 행사의 주된 손님은 [[혜경궁(혜빈)]]의 친인척으로 [[정조]]는 중앙의 상석도 [[혜경궁(혜빈)]]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림은 행사 주인공인 [[혜경궁(혜빈)]]과 왕실 여성들의 광간인 봉수당 내부는 붉은 발이 쳐져있어 그림의 초점은 [[정조]]에 맞춰져 있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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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 4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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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혜빈)]]의 회갑연 다음날, [[정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원로대신 15명과 화성에 거주하는 80세 이상 노인 384명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행사가 벌어진 [[낙남헌]]에 [[정조]]를 중심으로 좌우 원로대신들이 앉아있고, 뜰에는 화성의 노인들이 직급과 나이의 서열에 따라 줄지어 동서로 나누어 섰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동서로 나누어 서지 않고 상하로 나누어져 있다. 상단의 인물들은 지팡이에 [[정조]]가 하사한 노란 비단 수건을 매달았기 때문에 잔치에 초대된 노인들이고, 하단은 지팡이가 없어 노인을 모시고 온 자손으로 추정한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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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 5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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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화성 성곽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최신 군사 설비를 갖춘 성곽으로 계획된 화성은 1793년 신설한 왕의 친위 부대 [[장용영]]을 비롯한 5,000명의 병사들을 주둔하고 있었다. 이 군사훈련은 그동안 키운 친위부대의 실력을 점검하는 한편, 최신식 무기와 실력으로 무장한 군사를 [[왕]]이 직접 지휘함으로 한양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왕]]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었다. 화성의 성곽은 실제로는 다음해에 완성되었는데, 그림에는 이미 모두 완공된 상태로 그려졌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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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 6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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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의식을 거행하였다. [[득중정]]은 ‘명중하였다’는 뜻으로 [[정조]]가 5년 전 이곳에서 활쏘기를 모두 명중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 군신이 함께 활쏘기하는 의식은 군주와 신하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를 다하고 있는 화합을 상징한다. 활쏘기 이후 불꽃놀이를 해 화합과 단결로 마무리하였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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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 7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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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화성까지 2일이 걸렸는데,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가기도 했지만 행차하면서 마을마다 은혜를 베풀었다. 이 부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혜빈)]]에게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멈춰선 시점을 그렸다. 화면 상단이 [[혜경궁(혜빈)]]의 가마로, 푸른 장막이 둘러져 있고 옆으로 음식을 실은 수레가 대기해 있다. 왕실 인원의 모습은 그리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화성행행 자체가 [[혜경궁(혜빈)]]의 회갑을 기념하는 행사로 [[정조]]는 행렬 중간에 [[혜경궁(혜빈)]]을 위해 미음을 올리고, 숙소를 먼저 살폈다고 한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2~14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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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 8폭<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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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화성을 오가려면 한강을 건너야한다. [[정조]]는 직접 배를 타고 건넜지만, 이번 행차를 위해 배의 규격을 같게 하고 배의 소유주들은 ‘주교사’라는 조직에 명단을 올리게 하며, 한강 조세 운송권의 특혜를 주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그림은 배다리의 행렬을 세로로 길게 배치하고 원근감을 살려 표현하였다.<ref>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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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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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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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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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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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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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효순, 「정조의 현륭원 행차시의 궁중의례복식고 - 「정리의궤」를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Vol.5, 한국복식학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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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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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3012 의궤, 8일간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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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naver.com/ydl1/220835148399 8일간의 행차]
 
===유용한 정보===
 
===유용한 정보===
  
 
[[분류:궁중기록화]]
 
[[분류:궁중기록화]]
 
[[분류: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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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6일 (수) 23:45 판


화성능행도병
(華城陵幸圖屛)
국립고궁박물관
대표명칭 화성능행도병
한자표기 華城陵幸圖屛
이칭별칭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수원능행도병(水原陵行圖屛), 화성행행도병(華城行幸圖屛)
주제 연향례
제작연대 19세기 후반(후대 모사본)
구성 총 8폭
크기 각 폭 214.5 × 73.5㎝
각 그림 크기 149.8 × 64.5㎝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정의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는데, 정조가 을묘년 화성 행차시 계획하고 진행한 행사들을 8폭에 나누어 그린 병풍이다.[1]

내용

해제

1789년(정조 13)에 천하의 명당지라는 화산(華山) 아래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이후 매년 수원으로 행차하여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그런데 1795년은 2박 3일 정도였던 일정이 7박 8일로 늘어났고,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행차하였으며, 화성행궁에서 혜경궁(혜빈)의 회갑잔치를 벌였다. 1795년은 정조가 국왕이 된지 20년이 되는 해이고, 할머니인 정순왕후가 ‘망육(望六)’이라 불리는 51세가 되는 해였으며, 사도세자와 혜경궁(혜빈)이 함께 회갑을 맞는 해였기 때문이다. 또한 행차가 끝난 후에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편찬하고, 정리자(整理字)란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했으며,[2]
현재 《화성능행도병》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우학문화재단에 남아있는데, 내용은 같지만 순서가 같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은 8폭이 각각 따로 족자로 입수되었고, 국립고궁박물관삼성미술관 리움은 앞의 4폭의 순서가 달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와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가 앞에 있고, 삼성미술관 리움은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와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가 앞에 있었다. 행사가 진행된 순서와 비교해보면, 삼성미술관 리움의 경우가 맞다. 그러나 행사가 진행된 순서에 맞추면, 5번째 폭이 3번째 폭보다 먼저 배치해야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구성은 정조가 의도하였던 순서로 구성되지만, 실제 화성행궁에서는 이틀간의 여정으로 혜경궁(혜빈)이 피로했고, 둘째 날은 비도 내려서 병풍과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순서가 달라지게 되었다. 실제 행사는 혜경궁(혜빈)의 건강과 날씨로 인해 조정되었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정조가 본래 의도한 순서를 따라 구성하였다.[3]

구성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 1폭
화성에 온 첫날 정조는 공자 사당에 참배하였다. 공자의 사당은 지방마다 세워져 그 마을의 중심지이자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였다. 그림에서 가장 위에 있는 건물이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이다. 대성전 중심의 옆쪽으로 정조의 자리가 있는데, 공자를 높이는 정조의 행위가 중심이다. 대성전 아래에는 정조와 함께 의식에 참여할 특권을 얻은 향교의 유생들이 그려져 있고, 그림 하단에는 정조를 따라온 백관들이 대기하고 있다.[4]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 2폭
정조는 화성을 비롯한 인근 도시의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를 관리로 등용하였다. 과거시험은 3년에 한번 서울에서 행해졌는데, 공자 사당 참배 후 행해졌기 때문에 화성과 인근 지역을 우대하는 행사였다. 그림은 합격자를 발표하는 의식으로, 낙남헌 안에 정조와 의식 집행자들이 위치하고 마당에는 급제한 자들이 관에 어사화를 꽂고 문반은 동쪽에, 무반은 서쪽에 늘어서있다.[5]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 3폭
혜경궁(혜빈)의 회갑잔치는 사도세자현륭원 참배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였으나 혜경궁(혜빈)의 건강을 고려해 넷째 날로 미루어졌다. 행사가 열린 건물인 봉수당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잔치를 위해 정조가 이름을 바꾸어지었다. 행사의 주된 손님은 혜경궁(혜빈)의 친인척으로 정조는 중앙의 상석도 혜경궁(혜빈)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림은 행사 주인공인 혜경궁(혜빈)과 왕실 여성들의 광간인 봉수당 내부는 붉은 발이 쳐져있어 그림의 초점은 정조에 맞춰져 있다.[6]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 4폭
혜경궁(혜빈)의 회갑연 다음날, 정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원로대신 15명과 화성에 거주하는 80세 이상 노인 384명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행사가 벌어진 낙남헌정조를 중심으로 좌우 원로대신들이 앉아있고, 뜰에는 화성의 노인들이 직급과 나이의 서열에 따라 줄지어 동서로 나누어 섰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동서로 나누어 서지 않고 상하로 나누어져 있다. 상단의 인물들은 지팡이에 정조가 하사한 노란 비단 수건을 매달았기 때문에 잔치에 초대된 노인들이고, 하단은 지팡이가 없어 노인을 모시고 온 자손으로 추정한다.[7]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 5폭
정조는 화성 성곽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최신 군사 설비를 갖춘 성곽으로 계획된 화성은 1793년 신설한 왕의 친위 부대 장용영을 비롯한 5,000명의 병사들을 주둔하고 있었다. 이 군사훈련은 그동안 키운 친위부대의 실력을 점검하는 한편, 최신식 무기와 실력으로 무장한 군사를 이 직접 지휘함으로 한양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었다. 화성의 성곽은 실제로는 다음해에 완성되었는데, 그림에는 이미 모두 완공된 상태로 그려졌다.[8]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 6폭
정조득중정에서 활쏘기 의식을 거행하였다. 득중정은 ‘명중하였다’는 뜻으로 정조가 5년 전 이곳에서 활쏘기를 모두 명중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 군신이 함께 활쏘기하는 의식은 군주와 신하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를 다하고 있는 화합을 상징한다. 활쏘기 이후 불꽃놀이를 해 화합과 단결로 마무리하였다.[9]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 7폭
서울에서 화성까지 2일이 걸렸는데, 혜경궁(혜빈)을 모시고 가기도 했지만 행차하면서 마을마다 은혜를 베풀었다. 이 부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혜빈)에게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멈춰선 시점을 그렸다. 화면 상단이 혜경궁(혜빈)의 가마로, 푸른 장막이 둘러져 있고 옆으로 음식을 실은 수레가 대기해 있다. 왕실 인원의 모습은 그리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화성행행 자체가 혜경궁(혜빈)의 회갑을 기념하는 행사로 정조는 행렬 중간에 혜경궁(혜빈)을 위해 미음을 올리고, 숙소를 먼저 살폈다고 한다.[10]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 8폭
서울에서 화성을 오가려면 한강을 건너야한다. 정조는 직접 배를 타고 건넜지만, 이번 행차를 위해 배의 규격을 같게 하고 배의 소유주들은 ‘주교사’라는 조직에 명단을 올리게 하며, 한강 조세 운송권의 특혜를 주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그림은 배다리의 행렬을 세로로 길게 배치하고 원근감을 살려 표현하였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조 화성능행도병 A는 B에 행차하였다
회갑연 화성능행도병 A는 B에서 거행하였다
혜경궁(혜빈) 화성능행도병 A는 B에 행차하였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95년 윤2월 12일 정조혜경궁(혜빈)헌륭원에 참배하였다
1795년 윤2월 13일 혜경궁(혜빈)의 회갑연이 치러졌다
1743년 원행을묘정리의궤』가 편찬되었다

공간정보

시각자료

주석

  1.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3쪽.
  2. 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
  3.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4~135쪽.
  4.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8쪽.
  5.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9쪽.
  6.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6쪽.
  7.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37쪽.
  8.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0쪽.
  9.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1쪽.
  10.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2~146쪽.
  11.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143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유재빈, 「기록화의 백미! 을묘년 수원행차 8폭 그림」,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 김문식, 「조선 최대의 축제, 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 『정조의 8일간의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2015, 9쪽.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2006.
  • 조효순, 「정조의 현륭원 행차시의 궁중의례복식고 - 「정리의궤」를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Vol.5, 한국복식학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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