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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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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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ref group="term">인도 스님.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ref group="term">敲砧이라고도 하니, 점치는 사람.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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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 group="term">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ref>
 
   
 
   
 
===출가수행===
 
===출가수행===
{{Blockquote|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32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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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ref group="term">① 수행자가 친히 스승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감. ② 스승이 수행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그의 수행 상태를 점검함. ③ 제자가 스승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음. 곽철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3909&cid=50292&categoryId=50292 입실]",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ref>을 허락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324쪽.</ref>}}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체징|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체징|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입당유학===
 
===입당유학===
{{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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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ref group="term">대국(大國)에 조공(朝貢)하러 가는 사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634&cid=50293&categoryId=50293 입조사]",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ref>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쪽.</ref>}}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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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ref group="term">① 인정함. 승인함. ②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곽철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3699&cid=50292&categoryId=50292 인가]",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ref>를 받고자 하였고,<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경유|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여엄|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엄|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ref>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ref>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경유|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여엄|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엄|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ref>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ref>
  
 
===귀국 및 활동===
 
===귀국 및 활동===
{{Blockquote|천우(天祐) 2년(905, 효공왕 9) 6월에 무주(武州)의 회진(會津)으로 돌아왔다. 이 때 (무)주의 책임자이던 소판(蘇判) 왕지본(王池本) 공이 대사가 배에서 내려 곧바로 평진(平津)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만히 듣고서 … … … 매번 종종걸음으로 따르며 (스님의) 혜일(慧日)을 배우고자 하고, 4사(四事)의 공양을 멀리 하늘의 부엌을 빌린 것처럼 (훌륭하게) 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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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천우(天祐) 2년(905, 효공왕 9) 6월에 무주(武州)의 회진(會津)으로 돌아왔다. 이 때 (무)주의 책임자이던 소판(蘇判)<ref group="term">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222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왕지본(王池本) 공이 대사가 배에서 내려 곧바로 평진(平津)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만히 듣고서 … … … 매번 종종걸음으로 따르며 (스님의) 혜일(慧日)을 배우고자 하고, 4사(四事)<ref group="term">수행승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네 가지 물건. 음식·옷·탕약·침구 또는 거처하는 집. 곽철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0402&cid=50292&categoryId=50292 사사]",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ref>의 공양을 멀리 하늘의 부엌을 빌린 것처럼 (훌륭하게) 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7쪽.</ref>}}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귀국하여 고향인 무주로 돌아왔으며, 당시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귀국하여 고향인 무주로 돌아왔으며, 당시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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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대왕께서 대사에게 이르기를 "우리 스님은 인간 세상의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고 이 세상을 인도하는 스승이시니, 어찌 나쁜 마음을 품겠습니까. 하지만 편드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에 화(禍)가 곧 미칠 것을 알았지만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답하여 "… … [어찌(?)] 거복(莒僕)의 음모에 가담할 수 있으며, 어진 사람은 은혜를 생각하는데 어찌 상신(商臣)의 나쁜 행위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 을 더하였다. 목숨을 버리실 때에 … …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f>}}
 
{{Blockquote|대왕께서 대사에게 이르기를 "우리 스님은 인간 세상의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고 이 세상을 인도하는 스승이시니, 어찌 나쁜 마음을 품겠습니까. 하지만 편드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에 화(禍)가 곧 미칠 것을 알았지만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답하여 "… … [어찌(?)] 거복(莒僕)의 음모에 가담할 수 있으며, 어진 사람은 은혜를 생각하는데 어찌 상신(商臣)의 나쁜 행위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 을 더하였다. 목숨을 버리실 때에 … …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f>}}
 
비문의 이 대목은 형미가 다른 사람과 결탁한 것을 의심하는 궁예의 말과 자신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형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궁예의 형미 처형이 선승 승려라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역모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6쪽.</ref>
 
비문의 이 대목은 형미가 다른 사람과 결탁한 것을 의심하는 궁예의 말과 자신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형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궁예의 형미 처형이 선승 승려라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역모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6쪽.</ref>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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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다음해(919, 태조 2) 3월에 이르러 드디어 (대사의) 제자 한준(閑俊)과 화백(化白) 등을 불러서 “개주(開州)의 오관산(五冠山)은 참된 사람의 태(胎)를 묻을 곳이다.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답고 지맥(地脈)이 평안하니, 무덤을 두기에 마땅한 곳이다. 반드시 존귀한 분의 명복을 빌 수 있는 곳이다. 스님들은 유사(有司)와 함께 산사(山寺)를 빨리 짓고 이어서 (대사의 유골을 안치하는) 탑[石墳]를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2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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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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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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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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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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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일 (수) 17:25 판


형미(逈微)()
대표명칭 형미(逈微)
영문명칭 Hyeongmi
생몰년 864(경문왕 4)-917(경명왕 1)
시호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탑호 편광(遍光)
성씨 최씨(崔氏)
본관 박릉(博陵)
출신지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
승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term 1]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term 2]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1] Quote-right.png
출처: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term 3]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2]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3]

출가수행

Quote-left.png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term 4]을 허락하였다.[4] Quote-right.png
출처: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입당유학

Quote-left.png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term 5]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5] Quote-right.png
출처: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term 6]를 받고자 하였고,[6]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7]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8]

귀국 및 활동

Quote-left.png 천우(天祐) 2년(905, 효공왕 9) 6월에 무주(武州)의 회진(會津)으로 돌아왔다. 이 때 (무)주의 책임자이던 소판(蘇判)[term 7] 왕지본(王池本) 공이 대사가 배에서 내려 곧바로 평진(平津)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만히 듣고서 … … … 매번 종종걸음으로 따르며 (스님의) 혜일(慧日)을 배우고자 하고, 4사(四事)[term 8]의 공양을 멀리 하늘의 부엌을 빌린 것처럼 (훌륭하게) 하였다.[9] Quote-right.png
출처: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귀국하여 고향인 무주로 돌아왔으며, 당시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Quote-left.png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10] Quote-right.png
출처:


그러던 중 912년 궁예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11][12]

입적

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13] 세속의 나이는 54세, 승랍은 35세였다.

Quote-left.png 대왕께서 대사에게 이르기를 "우리 스님은 인간 세상의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고 이 세상을 인도하는 스승이시니, 어찌 나쁜 마음을 품겠습니까. 하지만 편드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에 화(禍)가 곧 미칠 것을 알았지만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답하여 "… … [어찌(?)] 거복(莒僕)의 음모에 가담할 수 있으며, 어진 사람은 은혜를 생각하는데 어찌 상신(商臣)의 나쁜 행위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 을 더하였다. 목숨을 버리실 때에 … …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14] Quote-right.png
출처:


비문의 이 대목은 형미가 다른 사람과 결탁한 것을 의심하는 궁예의 말과 자신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형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궁예의 형미 처형이 선승 승려라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역모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5]

Quote-left.png 다음해(919, 태조 2) 3월에 이르러 드디어 (대사의) 제자 한준(閑俊)과 화백(化白) 등을 불러서 “개주(開州)의 오관산(五冠山)은 참된 사람의 태(胎)를 묻을 곳이다.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답고 지맥(地脈)이 평안하니, 무덤을 두기에 마땅한 곳이다. 반드시 존귀한 분의 명복을 빌 수 있는 곳이다. 스님들은 유사(有司)와 함께 산사(山寺)를 빨리 짓고 이어서 (대사의 유골을 안치하는) 탑[石墳]를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16] Quote-right.png
출처: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동영상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_#001~004 (방송일: 2002.11.08)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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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를 위한 비이다 형미(逈微)
체징(體澄)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형미(逈微) -에 포함된다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에 포함된다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에 포함된다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에 포함된다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형미(逈微) -에서 주석하였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형미(逈微) -에서 수행하였다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형미(逈微) -에서 계를 받았다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궁예(弓裔)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의 이름을 지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에 있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가 비문을 지었다 최언위(崔彦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가 비문을 썼다 유훈율(柳勳律)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가 비문을 새겼다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10-333쪽.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 "나주 경략 주역은 왕건 아닌 궁예", 한겨레, 2011.07.11. 2017.02.20 확인.

주석

용어해설

  1. 인도 스님.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
  2. 敲砧이라고도 하니, 점치는 사람.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
  3. 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
  4. ① 수행자가 친히 스승의 지도를 받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감. ② 스승이 수행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그의 수행 상태를 점검함. ③ 제자가 스승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음. 곽철환, "입실",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5. 대국(大國)에 조공(朝貢)하러 가는 사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조사",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6. ① 인정함. 승인함. ②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곽철환, "인가",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7.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이다.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8. 수행승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네 가지 물건. 음식·옷·탕약·침구 또는 거처하는 집. 곽철환, "사사",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출처

  1.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
  2.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쪽.
  3.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쪽.
  4.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3-324쪽.
  5.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쪽.
  6.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7.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8. 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
  9.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7쪽.
  10.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11.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2.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3.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
  14.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
  15.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6쪽.
  16.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