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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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해남 윤씨(海南尹氏))
대표명칭 해남 윤씨
한자표기 해남 윤씨(海南尹氏)
유형 종가
창립자 윤존부(尹存富)
창립시대 고려


정의

해남윤씨(海南尹氏)는 해남의 종가이다.

내용

해남 입향과 부흥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가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윤효정(尹孝貞)대로 이 시기 이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해남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윤선도와 윤두서

윤효정이 바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조부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로,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예송논쟁을 비롯한 각종 사화에 얽혀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뤘는데,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 정도이며 대부분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