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이씨 고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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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7일 (금) 23: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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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고행록
한자명칭 韓山李氏苦行錄
영문명칭 An autobiography of Madame Yi of Hansan
작자 한산이씨
간행시기 1718년(숙종44)
소장처 진주유씨 모산종택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4.0×584.2㎝
판본 필사본
수량 1축
표기문자 한글


정의

1718년(숙종44)에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1659~1727)가 60세에 쓴 회고록이다.


내용

1718년(숙종44)에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1659~1727)가 60세에 쓴 회고록이다.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기문에 따르면 한산이씨가 자신의 행적을 자손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손수 한글로 쓴 것 이라고 한다.『고행록』에는 한산이씨의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남인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18세에 정3품 숙부인, 22세에 정2품 정부인, 33세에 정1품 정경부인에 이르렀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을 따라 각지의 유배소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아이를 잃었으나 종통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던 일, 시어머니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47세의 미망인으로 집안을 굳건하게 지켜냈던 일 등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였다. 며느리 둘을 잃고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얻은 뒤 69세에 생을 마쳤다.『고행록』은 한산이씨가 유배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집안일만 서술했으나, 숙종남인 사대부가의 운명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고행록』은 진주유씨 가문의 가보로서 남다른 방법으로 전승되어왔다. 1925년에 6대손 유원성(柳遠聲, 1851~1945)이 읽고 손부 권태임(權泰妊, 1908~1967)이 받아쓰는 방식으로 전사본을 제작했고, 2012년에는 권태임의 딸 유미형(柳美馨)이 또 다른 전사본을 만들었다. 자손 대대로 읽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1]

부연설명

한산이씨는 이산해의 현손녀(玄孫女:증손자의 딸)이다. 남인 명문가집안의 유명천의 세번째 부인으로 시집간다(1676년). 유명천은 1672년(현종 13)에 벼슬길에 오르나 1680년(숙종 6)에 경신환국을 맞아 음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유명천은 48세, 한산이씨는 22세로 시집온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장녀(1678년 낳았으나 5개월 만에 잃음)와 차녀(1679년 낳았으나 그 다음해 5월에 잃음)에 이어 귀양가서 낳은 아들도 한달만에 잃는다. 기사환국(1689년)으로 남인이 대거 정계로 복귀되는데 남편 유명천도 이때 복귀된다. 1697년에는 유명천의 동생 유명천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다. 1699년 갑술환국로 다시 유배된다. 그리고 2년 후 1701년 희빈 장씨의 복위를 꾀했다는 서인들의 무고(誣告:거짓으로 일을 꾸며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로 일가가 유배되고, 그 유배지에서 유명천은 죽음(1705년)을 맞이한다. 1710년에는 첫째 며느리가 죽고, 두번째 며느리도 죽는다. 한산이씨가 『한산이씨 고행록』을 쓰던 당시에는 세번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외동 손자 유경용에 의지해 여생을 버티던 중이었다. 『한산이씨 고행록』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죄로 인해 자녀들을 본인보다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회환과 노년의 고독이 주를 이룬다. 또한 '무슨 죄벌로 육십지연(六十之年)이 되도록 있어 서러우며 괴로운가 한하며 탄하노라'라고 글을 끝내고 있다. 즉 이 고행록의 저술동기는 정치적 고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회환과 고독한 노년의 삶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한산이씨 고행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출생과 가문, 유배의 고충, 3명의 자녀를 잃은 일, 남편 유명천의 죽음, 연이은 며느리들의 죽음, 전부인 소생의 장녀와 사위의 죽음, 박복한 노년의 고독과 회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산이씨 고행록』은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절제된 정서의 표현과 한 여인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수사적 표현의 다양성, 숱한 분노와 격정을 승화시킨 관용의 독백 등을 볼때 문학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3]

관련항목

중심 연결정보 대상
한산이씨 고행록 인물 유명천
한산이씨 고행록 인물 한산이씨
한산이씨 고행록 인물 유경종
한산이씨 고행록 인물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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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고행록 인물 유미형
한산이씨 고행록 그룹 남인
한산이씨 고행록 소장처 진주유씨 모산종택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한산이씨 고행록 간행년 1718년
한산이씨 고행록 간행년 숙종44년
한산이씨 고행록 전사본 1925년
한산이씨 고행록 전사본 2012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한산이씨 고행록 소장처 진주유씨 모산종택 37.342468 126.872910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34쪽.
  2. 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41-46쪽.
  3. 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