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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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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사
(春川 淸平寺)
대표명칭 춘천 청평사
한자 春川 淸平寺
이칭 백암선원(白岩禪院), 보현원(普賢院), 문수원(文殊院), 청평선사(淸平禪寺)
주소 강원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오봉산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973년
창건자 영현(永賢)
경내문화재 춘천 청평사 회전문(春川 淸平寺 廻轉門), 청평사삼층석탑(淸平寺三層石塔)



정의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에 있는 사찰.

내용

역사

청평사(淸平寺)는 973년(광종 24) 당나라 승려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에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庵)·양신암(養神庵)·칠성암(七星庵)·등운암(騰雲庵)·복희암(福禧庵)·지장암(地藏庵)·식암(息庵)·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1] 김시습(金時習) 또한 이 절에 은둔하여 서향원(瑞香院)을 짓고 살았다. 이황(李滉)은 청평산을 지나면서 절에 들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이자현이 탐욕스러웠다는 역대의 사필(史筆)을 반박하였다.[2]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왕명으로 청평사 주지로 부임한 다음 2년여에 걸쳐 중창하였는데, 능인전(能仁殿)만 본래의 것을 조금 보수하고, 극락전(極樂殿)과 회전문(迴轉門) 등 모든 건물을 새로 지었고, 절 이름을 청평선사(淸平禪寺)로 바꾸었다. 현재 그때의 건물로는 회전문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 고메이지(光明寺)에는 1562년(명종 17년) 보우(조선)명종인순왕후, 문정왕후 등 궁중 일가의 성수를 기원하며 조성한 지장보살탱화가 전해지고 있다.[3] 1711년(숙종 37)에 환성(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禪覺)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6·25전쟁 때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이 소실되었다. 1977년 공철(空徹)이 극락보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고, 1979년 향봉(香峯)이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 서호(西昊)가 요사와 청평루·서향원(瑞香院)을, 1988년 석진(石眞)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4]

고려정원

고려정원은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文殊院) 즉 지금의 청평사를 중건하면서 경내 이곳저곳을 한국 전래의 독특한 방식으로 꾸민 정원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영지(影池)와 청평사 계곡 하류의 정원조성용 암석 및 석축이 남아있으며,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청평식암'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가 전해진다. 구성폭포에서 식암까지 2km에 이르는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키고 그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추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5]

공주와 상사뱀 설화

청평사(淸平寺)에는 공주와 상사뱀 설화[6]가 전해진다. 설화에 등장하는 공주를 청평사를 중건하고 번창시켰던 이자현의 사촌인 장경궁주(長慶宮主)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장경궁주순종의 비였는데, 순종이 일찍 죽어 외궁에 머물면서 궁노와 간통하다가 폐위된 일이 있다. 간통으로 쫓겨난 궁주가 갈 곳은 사람들의 내왕이 드문 궁벽한 산중이었을 것이고, 사촌 오라버니가 머물고 있던 청평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상사뱀설화와 청평사 중창설화가 서로 융합되어 연기설화로 전해지는 듯하다.[7]

Quote-left.png 중국 원나라 순제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궁중을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어 감히 마음을 표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한 말직의 청년 관리는 궁전 뜰을 거니는 공주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공주에게 사랑의 고백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청년은 죽는 그 순간 맹세를 했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내 죽어서라도 그녀와 함께 하리라."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몸이 이상하여 살펴보다가, 난데없이 뱀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뱀은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사실을 안 왕과 왕후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뱀을 쫒으려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공주의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죽고만 싶었던 공주는 마침내 궁중을 뛰쳐나왔고, 죽기 전에 명산대천이나 유람하겠다며 중국 천지를 다 돌아 다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려로 와서 금강산 구경 길에 올랐다가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참배하고자 하였다. 청평천을 건너 회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 상사뱀은 공주가 걸음을 걷지 못하도록 요동을 쳤다. 10여 년 동안을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므로 공주는 이상히 여기며 타일렀다.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번도 너를 거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못하게 하느냐? 만일 들어가기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으라.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너와 함께 가리라."

이 말을 들은 뱀은 곧 몸에서 떨어져 나왔고, 10년 만에 홀몸이 된 공주는 구성폭포를 맞으며 몸을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과 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공주는 가사(袈裟)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비단과 바늘이 널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문득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옷인 가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으로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뱀이 다시 공주의 몸을 감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새까맣게 태워 죽여 버렸다.

마침내 뱀으로부터 해방된 공주는 부왕에게 자초지종을 아뢰었고, 순제는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절에 공주탑을 세웠다고 한다.

Quote-right.png
출처: "청평사 공주와 상사뱀", 문화원형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관련금석문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비문은 김부철(金富轍, 1079-1136)[8]이자현(李資玄)의 문인으로서 당시 문수원(청평사)의 주지이었던 조원(祖遠)의 부탁을 받아 1130년(인종 8)에 지었으며, 이자현에게 수학하였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1070-1159)이 글씨를 썼다. 이자현이 중창한 청평산 문수원(文殊院)의 내력 및 이자현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화엄종 승려로서 의천(義天)의 제자인 혜소(慧素)가 이자현이 죽은 해인 1125(인종 3)년에 지은 제문이 새겨져 있는데, 제문의 글씨도 탄연이 썼다. 비석은 결락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많지만 앞면의 문수원기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9]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비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비문은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 전하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비의 전면과 음기 탁본이 일부 실려있다. 비문은 1327년(충숙왕 14) 이제현(李齊賢)이 지었으며, 전면은 이군해(李君侅)가 글씨를 쓰고, 음기[10]는 승려 성징(性澄)이 썼다. 원나라 황후의 명으로 불서 한 벌을 문수사(청평사)에 보내고 금전을 시주하여 황자들의 탄신일에 반승을 시행하고 경전을 열독하게 하라는 사실을 기록하는 비를 세우게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원의 황실에서 고려 사원에 기복신앙으로 시주하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이다.[11]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 춘천 청평사와 관련 있는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춘천 청평사 이의 A는 B가 중건하였다 A ekc:renovator B
춘천 청평사 이자현 A는 B가 중건하였다 A ekc:renovator B
춘천 청평사 보우(조선) A는 B가 중건하였다 A ekc:renovator B
혜근 춘천 청평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혼수 춘천 청평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시습 춘천 청평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황 춘천 청평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청평사지장보살도 춘천 청평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춘천 청평사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mentions B
문수사장경비 춘천 청평사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mentions B

시각자료

주석

  1. 김위석, "청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신종원, "청평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사찰문화연구원, "청평사", 『전통사찰총서 2 - 강원도의 전통사찰II』, 사찰문화연구원, 2008, 123쪽.
  4. 김위석, "청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사찰문화연구원, "청평사", 『전통사찰총서 2 - 강원도의 전통사찰II』, 사찰문화연구원, 2008, 131-132쪽.
  6. 상사뱀 설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뱀이 되어 연모하던 인물을 괴롭힌다는 설화. 출처: 강진옥, "상사뱀",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9일.
  7. 김용덕, "청평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30일.
  8. 김부식(金富軾)의 아우로, 초명은 김부의(金富儀)이다.
  9. "진락공문수원기(眞樂公文殊院記)",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10. 비갈(碑碣)의 등뒤에 새긴 글
  11.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

  • "진락공문수원기(眞樂公文殊院記)",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김위석, "청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찰문화연구원, "청평사", 『전통사찰총서 2 - 강원도의 전통사찰II』, 사찰문화연구원, 2008, 131-132쪽.
  • 김용덕, "청평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30일.
  • "청평사 공주와 상사뱀", 문화원형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