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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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청(崔惟淸)
대표명칭 최유청
한자표기 崔惟淸
생몰년 1093년(선종 10)-1174년(명종 4)
본관 창원(昌原)
시호 문숙(文淑)
직재(直哉)
시대 고려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최유청(崔惟淸)의 6세조 최준옹(崔俊邕)은 태조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아버지 최석(崔奭, 崔錫)은 문종·순종·선종 3조(三朝)를 섬긴 중신이다.[1]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자겸 몰락 후 다시 출사(出仕)했다. 좌사간(左司諫)·시어사(侍御使) 등을 역임하고,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때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冊命)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고, 이어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승선(承宣)이 되었다. 1149년(의종 3)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등을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2]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했으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 대령후 왕경이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수되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3]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유청 이자겸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최유청 정서 A는 B의 친척이다 A ekc:isLineageKinOf B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최유청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주석

  1. 박성봉, "최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8월 30일.
  2. "최유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박성봉, "최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8월 30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