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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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26일,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서일청산리전투의 주역인 대한군정서 총재였으며, 자유시사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호흡으로 자결했다. [1]

목차

내용

1920년 10월 20∼26일,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으로 청산리대첩이라 한다.

배경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1919년 8월에 서일, 김좌진, 이장녕(李章寧), 김규식(金奎植), 최해(崔海), 정훈(鄭勳),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가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2]

전개

10월 20일

이와 같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중 동지대(東支隊)는 1920년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3백명이 전멸하였다.
이 시각에 일본군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3]

10월 22일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 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 알렸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 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 북로군정서 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독립군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으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4]

10월 24일-25일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 중이었다. 독립군은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5]

결과 및 평가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6]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같이 보기

  •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이강훈, "청산리 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이강훈, "청산리 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