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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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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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이씨부인|완산이씨]]가 [[경상감사]]에게 처벌을 요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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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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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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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이씨부인|완산이씨]]가 그의 서손(庶孫)인 [[황석우]]가 문중의 계후(繼後)와 봉사(奉祀) 그리고 재산상속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상언(上言)과 소송으로 문중 운영에 대해 반기를 들자 적조모(嫡祖母)에 대한 능욕죄, 노주(奴主) 배반죄, 명문도매죄(明文盜賣罪) 등의 죄에 대하여 [[경상감사]]에게 그 처벌을 요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와 내용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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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완산이씨]]가 그의 서손(庶孫)인 [[황석우]]가 문중의 계후(繼後)와 봉사(奉祀) 그리고 재산상속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상언(上言)과 소송으로 문중 운영에 대해 반기를 들자 적조모(嫡祖母)에 대한 능욕죄, 노주(奴主) 배반죄, 명문도매죄(明文盜賣罪) 등의 죄에 대하여 [[경상감사]]에게 그 처벌을 요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와 내용이 연결된다.
[[황여일]]의 전처 [[김씨부인]]은 아들 [[황중윤]](黃中允, 1577~?)은 자기 소유의 여자 종 [[분개]]를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 둘을 낳았는데 [[황석우|석우]](石友)와 [[황석심|석심]](石心)이었다. [[이씨부인]] 입장에서는 이들은 서손(庶孫), 더 정확히 얼손(孽孫)이었다. [[황석우|석우]]는 문중에서 예조 입안(立案)까지 해 둔 계후자 [[황석래]]를 인정하지 않고 얼자(孽子)이지만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버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슷한 처지의 [[황중민|중민]](中敏)과 함께 종통을 빼앗고자 도모한다. 즉 [[황중민|중민]]이 [[이씨부인]] 소생의 맏아들이니 [[황여일]]의 적통이자 대종손이 되어야 하며 본인은 아버지 [[황중윤|중윤]]의 봉사권과 재산상속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의 주장이 옳았지만 관행적으로는 서자가 양반의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 관행에 제동이 걸린 [[황석우|석우]]는 ‘관행’의 파괴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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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일]]의 전처 [[의성김씨]]은 아들 [[황중윤]](黃中允, 1577~?)은 자기 소유의 여자 종 [[분개]]를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 둘을 낳았는데 [[황석우|석우]](石友)와 [[황석심|석심]](石心)이었다. [[완산이씨]] 입장에서는 이들은 서손(庶孫), 더 정확히 얼손(孽孫)이었다. [[황석우|석우]]는 문중에서 예조 입안(立案)까지 해 둔 계후자 [[황석래]]를 인정하지 않고 얼자(孽子)이지만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버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슷한 처지의 [[황중민|중민]](中敏)과 함께 종통을 빼앗고자 도모한다. 즉 [[황중민|중민]]이 [[완산이씨]] 소생의 맏아들이니 [[황여일]]의 적통이자 대종손이 되어야 하며 본인은 아버지 [[황중윤|중윤]]의 봉사권과 재산상속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의 주장이 옳았지만 관행적으로는 서자가 양반의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 관행에 제동이 걸린 [[황석우|석우]]는 ‘관행’의 파괴에 도전한다.
[[황석우]]의 어머니는 [[분개]]라는 이름의 여종(婢)이었으며 원래 주인은 이 문서의 주인공 [[이씨부인]]이었다. [[황중윤]]이 아버지의 후취인 [[이씨부인|이씨]]에게 [[분개]]를 상속 해주길 간절히 요청하여 [[이씨부인|이씨]]가 그에게 여종을 상속하였다. 따라서 [[이씨부인]], [[황중윤]]과 [[황석우]]는 조손(祖孫) 혹은 부자 관계와 함께 상전과 노비라는 관계에 있었다. 가족과 신분관계가 묘하게 얽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황석우|석우]]는 아버지 봉사권을 주장하다 [[이씨부인]]과 다툼을 벌여 3년이나 [[백령도]]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적은 노비문서를 남에게 팔아버리고 인연이 없는 [[서울]]로 도피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황석래]]의 양자를 파기하는 상언(上言)을 올려 이씨부인을 비롯한 문중인사들을 큰 충격에 빠트린다. 문서에 적조모 이씨에 대한 능욕죄(凌辱罪),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반주죄(反主罪)를 가장 큰 죄목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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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우]]의 어머니는 [[분개]]라는 이름의 여종(婢)이었으며 원래 주인은 이 문서의 주인공 [[완산이씨]]이었다. [[황중윤]]이 아버지의 후취인 [[완산이씨|이씨]]에게 [[분개]]를 상속 해주길 간절히 요청하여 [[완산이씨|이씨]]가 그에게 여종을 상속하였다. 따라서 [[완산이씨]], [[황중윤]]과 [[황석우]]는 조손(祖孫) 혹은 부자 관계와 함께 상전과 노비라는 관계에 있었다. 가족과 신분관계가 묘하게 얽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황석우|석우]]는 아버지 봉사권을 주장하다 [[완산이씨]]과 다툼을 벌여 3년이나 [[백령도]]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적은 노비문서를 남에게 팔아버리고 인연이 없는 [[서울]]로 도피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황석래]]의 양자를 파기하는 [[상언(上言)]]을 올려 [[완산이씨]]을 비롯한 문중인사들을 큰 충격에 빠트린다. 문서에 적조모 이씨에 대한 능욕죄(凌辱罪),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반주죄(反主罪)를 가장 큰 죄목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씨부인]]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시행되지 않는 미행공(未行公)문서로,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6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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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이씨]]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시행되지 않는 미행공(未行公)문서로,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62쪽.</REF>
  
 
===계속 이어진 재산분쟁 싸움===
 
===계속 이어진 재산분쟁 싸움===
{{PAGENAME}}에 관한 내용은, 앞의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에서 이어진 내용이다.[[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유서]] 내용의 경우 [[황석우]]가 봉사와 재산 상속에관에서 모의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지 얼마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5년 후 {{PAGENAME}}에서는 [[황석우]]가 상언(上言)까지 하여 공개적으로 집안의 분쟁이 외부로 알려졌고, 법적 분쟁인 송사까지 확되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씨부인|완산이씨]]은 직접 소지(소장을 적는 종이)를 갖추어 [[경상감사]]에게 주어 [[황석우]]를 고발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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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ref>
 
<ref>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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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일 (토) 14:31 판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한글팀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01 표지.jpg
영문명칭 Yi of Wansan, a wife of Hwang Yeoil, her petition submitted to the authorities
작자 김상덕
간행시기 1651년
기탁처 평해황씨 해월헌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58.5×78.3㎝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정의

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완산이씨경상감사에게 처벌을 요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참의 황여일의 처 숙부인 완산이씨가 그의 서손(庶孫)인 황석우가 문중의 계후(繼後)와 봉사(奉祀) 그리고 재산상속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상언(上言)과 소송으로 문중 운영에 대해 반기를 들자 적조모(嫡祖母)에 대한 능욕죄, 노주(奴主) 배반죄, 명문도매죄(明文盜賣罪) 등의 죄에 대하여 경상감사에게 그 처벌을 요청하는 민원 문서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와 내용이 연결된다. 황여일의 전처 의성김씨은 아들 황중윤(黃中允, 1577~?)은 자기 소유의 여자 종 분개를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 둘을 낳았는데 석우(石友)와 석심(石心)이었다. 완산이씨 입장에서는 이들은 서손(庶孫), 더 정확히 얼손(孽孫)이었다. 석우는 문중에서 예조 입안(立案)까지 해 둔 계후자 황석래를 인정하지 않고 얼자(孽子)이지만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버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슷한 처지의 중민(中敏)과 함께 종통을 빼앗고자 도모한다. 즉 중민완산이씨 소생의 맏아들이니 황여일의 적통이자 대종손이 되어야 하며 본인은 아버지 중윤의 봉사권과 재산상속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의 주장이 옳았지만 관행적으로는 서자가 양반의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 관행에 제동이 걸린 석우는 ‘관행’의 파괴에 도전한다. 황석우의 어머니는 분개라는 이름의 여종(婢)이었으며 원래 주인은 이 문서의 주인공 완산이씨이었다. 황중윤이 아버지의 후취인 이씨에게 분개를 상속 해주길 간절히 요청하여 이씨가 그에게 여종을 상속하였다. 따라서 완산이씨, 황중윤황석우는 조손(祖孫) 혹은 부자 관계와 함께 상전과 노비라는 관계에 있었다. 가족과 신분관계가 묘하게 얽혔지만 조선시대에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석우는 아버지 봉사권을 주장하다 완산이씨과 다툼을 벌여 3년이나 백령도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적은 노비문서를 남에게 팔아버리고 인연이 없는 서울로 도피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황석래의 양자를 파기하는 상언(上言)을 올려 완산이씨을 비롯한 문중인사들을 큰 충격에 빠트린다. 문서에 적조모 이씨에 대한 능욕죄(凌辱罪),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반주죄(反主罪)를 가장 큰 죄목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완산이씨의 소지(所志)는 그녀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어 원본임이 분명하지만 경상 감사의 결재, 즉 제사(題辭)가 없다. 이 문서는 시행되지 않는 미행공(未行公)문서로, 유서와 함께 후손들에게 보존하게 하여 재발 방지 및 종통의 정당성 확보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

계속 이어진 재산분쟁 싸움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 관한 내용은, 앞의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에서 이어진 내용이다.유서 내용의 경우 황석우가 봉사와 재산 상속에관에서 모의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지 얼마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5년 후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에서는 황석우가 상언(上言)까지 하여 공개적으로 집안의 분쟁이 외부로 알려졌고, 법적 분쟁인 송사까지 확되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완산이씨은 직접 소지(소장을 적는 종이)를 갖추어 경상감사에게 주어 황석우를 고발하려고 한 것이다. [2]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완산이씨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A는 B를 저술했다 1657년
황여일 의성김씨 A는 B의 남편이다
황여일 완산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황중윤 의성김씨 A는 B의 자식이다
황중민 완산이씨 A는 B의 자식이다
황중헌 완산이씨 A는 B의 자식이다
황중순 완산이씨 A는 B의 자식이다
황중원 완산이씨 A는 B의 자식이다
황여일 분개 A는 B의 남편이다
황석래 황중헌 A는 B의 자식이다
황중윤 밀양박씨 A는 B의 남편이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평해황씨 해월헌 A는 B에 보관되었다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 한국진흥원 A는 B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57 완산 이씨이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을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829987 129.439673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는 평해황씨 해월헌에 보관되었다
36.70183 128.810925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소지는 한국국학진흥원에 현재 소장되어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62쪽.
  2. 안승준, 「嫡庶 사이 名分과 利害의 分岐와 아우성」, 『장서각소리 금요강독회』,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6, 5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한상권, 「조선시대 訴寃制度의 발달과정」, 『韓國學報』, Vol-19, 일지사, 1993, 65-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