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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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풍(峻豊) 2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스님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불교를 그 곳에 전하고자 건의하는 편지를 왕에게 올리고 허락을 빌었다.
 
준풍(峻豊) 2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스님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불교를 그 곳에 전하고자 건의하는 편지를 왕에게 올리고 허락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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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보(開寶) 원년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량(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영(贊寧) 스님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스님의 정미롭게 연마한 지혜의 칼날이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개보(開寶) 원년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량(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영(贊寧) 스님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스님의 정미롭게 연마한 지혜의 칼날이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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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2017년 8월 21일 (월) 16:21 판

지종(智宗)
BHST Monk1.png
대표명칭 지종
한자 智宗
생몰년 930년(태조 13)-1018년(현종 9)
시호 원공(圓空)
혜월(慧月)
법호 적연(寂然)
탑호 승묘(勝妙)
신칙(神則)
성씨 이씨(李氏)
본관 전주(全州)
승탑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승탑비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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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諱)는 지종(智宗)이고, 자(字)는 신측(神則)이며, 속성(俗姓)은 이씨(李氏)로 전주(全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행순(行順)이니, 항상 의리를 품고 어진 마음을 가지며 겸손하고 욕심이 없었으니 마치 개제(愷悌)한 군자(君子)가 항상 복을 구하되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며, 마음이 영화(榮華)에 유혹되지 않는 구루장인(痀僂丈人)이 스스로 정신을 응집(凝集)하여 도덕이 높았으니 그 사람과 같았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그 칭송 받음이 양홍(梁鴻)의 처(妻)와 같고, 그 명망은 노래자(老萊子)의 부인과 같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그 아름다움이 봉점(鳳占)에 나타났고, 자손의 번연(蕃衍)함은 그 경사스러움이 초영(椒詠)을 표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밤 금찰(金刹)의 한 간주(竿柱)의 끝 아득히 높은 하늘 구름 속에 백설(白雪)과 같은 흰 눈썹을 가진 스님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이는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이니 너는 이를 몸에 잘 모시라.”고 하는 꿈을 꾸고서 그로 말미암아 곧 임신하였다. 그 후 해산할 때까지 불전에 부지런히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오신채(五辛菜)와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면서 태교(胎敎)를 하였으며, 산기(産期)가 되어 탄생하였으니 그 자태(姿態)는 기의(岐嶷)함을 드러냈고 성품 또한 영특함을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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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937년(태조 20) 개경의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홍범삼장이 그 해에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의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였고, 946년(정종 1)영통사(靈通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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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여덟살 때 타고 놀던 죽마(竹馬)를 훌쩍 던져버리고 진승(眞乘)을 탐구하려는 마음만이 있었으니, 홀연히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세상에서 살 생각을 단념하고 불교를 탐구할 생각을 굳혔다. 그 때 마침 인도의 홍범삼장(弘梵三藏)이 사나사(舍那寺)에 와서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가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 삭발하고 득도(得度)하였다. 그 때부터 스님을 시봉(侍奉)하면서 바야흐로 경(經)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나 홍범(弘梵)이 바다를 건너 중인도(中印度)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따라가지 못하고 처소를 옮겨 황화사(廣化寺) 경철화상(景哲和尙)을 모시면서 부지런히 수업하였다. 그 배우는 바가 남들보다 뛰어나 공부의 진취가 배나 되어 다른 사람이 십분(十分)을 하면 스님은 천분(千分)을 넘었으니, 마치 푸른색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그 빛이 쪽보다 더 푸르며, 돌을 물에 던지면 쉽게 그 깊은 밑바닥에 이르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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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953년(광종 4) 희양산(熙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를 만나 환대를 받았고, 954년 승과(僧科)에 합격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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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顯德) 초년(初年)에 광종대왕(光宗大王)이 왕위에 올라 크게 불교를 숭앙하였으며, 설영(雪嶺)의 선(禪)을 밝혀 하여금 신통묘용(神通妙用)을 펴되 단하(丹霞)의 진불(眞佛)을 찾아내기 위하여 승과(僧科)를 명시하였다. 스님은 당당하게 의논의 광장에 들어가 중론(衆論)을 꺾고 앞장서 진리의 세계를 탐색하였으며, 또한 여러 가지의 뛰어난 예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높은 도덕으로 그 이름이 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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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법유학

959년 오월(吳越)에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하여 연수로부터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961-968년까지의 7년 동안 국청사(國淸寺)의 정광(淨光)으로부터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다. 귀국 직전의 2년 동안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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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오월국(吳越國)에 도착하여 먼저 영명사(永明寺) 연수선사(延壽禪師)를 친견하니, 연수선사가 묻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는가, 일을 보러 왔는가?”하고 물었다.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법(法)을 구하러 왔습니다.”하니 연수스님이 말하기를, “법(法)은 본래 둘이 없어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거늘 어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스님이 대답하기를, “이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이 때 연수스님은 반가워하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치 황두(黃頭)를 만난 것과 같이 우대하였다. 연수는 계주(髻珠)를 풀어 신인(心印)과 함께 전해 주었다. 친근함을 허락받은 후 부지런히 번뇌를 대치함에 때때로 닦아 제호(醍醐)를 배불리 마신 다음에는 다시 다른 음식은 먹지 않았고, 날마다 오직 담복향(薝蔔香)만 맡을 뿐 다른 잡된 향내는 맡지 아니하였으며, 묵묵히 현동(玄同)한 이치를 알아 그 깊은 진리를 일조(一朝)에 확찰대오(廓徹大悟)하였다. 준풍(峻豊) 2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지성으로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친견하였는데, 정광스님 역시 연탑(連榻)에 내려와 반가이 맞이하였다. 정광은 자주 법회를 주도하므로 매우 바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불교를 그 곳에 전하고자 건의하는 편지를 왕에게 올리고 허락을 빌었다.

...(중략)...

개보(開寶) 원년 연말에 승통(僧統)이며 내도량(內道場)의 공덕사(功德事)를 맡은 찬영(贊寧) 스님과 천태현재(天台縣宰)인 임식(任埴) 등은 스님의 정미롭게 연마한 지혜의 칼날이 예리하여 족히 용(龍)을 도살할 만하며 민첩하게 현기(玄機)를 발명하여 이미 중곡(中鵠)의 이치를 감당할 수 있음을 알아 모두가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높은 산처럼 숭앙하여 의적(義寂)이 그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을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초청하여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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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꿈을 꾸었는데, 본국(本國)에 보탑(寶塔)이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밧줄에 매달려 당기는 대로 부앙(俯仰)하였다. 또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능히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였거늘 어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고 부도덕하게 생활하여 냄새나는 오명(惡名)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만약 식미(式微)의 경계를 깨달았으면 곧 불계(不係)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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