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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지눌이 요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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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정보
 
{{승려정보
 
|사진=Portrait_of_Jinul_in_Songgwangs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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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지눌은 1158년([[고려 의종|의종]] 12)에 황해도 서흥군 (당시 경서의 동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정광우(鄭光遇)]]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부처에게 기도하여 스님을 만들기로 하자 이내 병이 나았다.<ref>김보혜, 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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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1158년([[고려 의종|의종]] 12)에 황해도 서흥군 (당시 경서의 동주)에서 태어났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정광우(鄭光遇)]]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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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부처에게 기도하여 스님을 만들기로 하자 이내 병이 나았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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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출처=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58-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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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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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출가수행===
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그는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과|승선(僧選)]]에 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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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그는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과|승선(僧選)]]에 합격한다.<ref>김보혜, 보조국사 지눌의 선교일치, 충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11쪽.</ref>
 
{{blockquote|
 
{{blockquote|
 
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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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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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활동===
1185년 다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학가산) [[예천 보문사|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선종]]의 종지(宗旨)에 따라 수행하면서 [[교종|교학]]을 병행하던 중,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지도 체계를 세웠으며,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하였다. 또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였다. 그 뒤 『[[원돈성불론|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겼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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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다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학가산) [[예천 보문사|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선종]]의 종지(宗旨)에 따라 수행하면서 [[교종|교학]]을 병행하던 중,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지도 체계를 세웠으며,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하였다. 또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였다. 그 뒤 『[[원돈성불론|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겼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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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대정 25년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 항상 마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몽(迷蒙)을 인도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得才)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名利)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대정 25년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 항상 마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몽(迷蒙)을 인도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得才)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名利)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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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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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그는 [[몽선|몽선(夢船)화상]]과 함께 [[영천 거조사|거조사(居祖寺)]]로 가서,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 결사문은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1190년 그는 [[몽선|몽선(夢船)화상]]과 함께 [[영천 거조사|거조사(居祖寺)]]로 가서,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 결사문은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함양 상무주암|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1205년(희종 1) 새로운 결사도량인 [[순천 송광사|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고, 『[[대혜어록]]』과 [[간화선법|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 대중을 지도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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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함양 상무주암|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1205년(희종 1) 새로운 결사도량인 [[순천 송광사|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고, 『[[대혜어록]]』과 [[간화선법|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 대중을 지도하였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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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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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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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입적===
 
10여 년 동안 [[순천 송광사|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한 뒤,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10여 년 동안 [[순천 송광사|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한 뒤,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입적 7일 후 화장을 하여 오색사리 수백 개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국사|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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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7일 후 화장을 하여 오색사리 수백 개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국사|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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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大安) 2년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수순(數旬) 동안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서 설법(說法)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발병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容)히 대답하였다.  
 
대안(大安) 2년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수순(數旬) 동안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서 설법(說法)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발병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容)히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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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門徒)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顆)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이었다.  
 
문도(門徒)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顆)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이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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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8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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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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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그래프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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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E022/E022.htm 지눌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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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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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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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E022/E022.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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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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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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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지눌]]||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2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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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 || [[지눌]]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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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 || [[순천 송광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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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선사]] || [[지눌]]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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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예천 보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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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개성 보제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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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순천 송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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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순천 송광사]]||A는 B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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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영천 거조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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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보조국사비]]||[[지눌]]||A는 B를 위한 비이다|| 12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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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함양 상무주암]]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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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보조국사비]]||[[순천 송광사]]||A는 B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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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휘]] || [[지눌]]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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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예천 보문사]]||A는 B에서 주석하였다||1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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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눌]] || [[혜심]]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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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개성 보제사]]||A는 B에서 주석하였다||11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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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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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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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심재룡, 『지눌연구 : 보조선과 한국불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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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강건기,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 불일 보조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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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기,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 불일 보조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2010.
*정안스님, 이용운,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296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96> 보조지눌(普照知訥)], 불교신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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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혜, 『보조국사 지눌의 선교일치』, 충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58-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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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룡, 『지눌연구 : 보조선과 한국불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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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진, 『普照知訥의 禪思想 硏究 : 中國佛敎와 關聯하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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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108 지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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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58-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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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행욱, 『수선사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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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스님, 이용운,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296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96> 보조지눌(普照知訥)]", 불교신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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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열, 『牧牛子 知訥의 圓頓觀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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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6390000,22&flag=Y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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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6일 (일) 21:59 기준 최신판

Reading.png 특별기고: 지눌이 요세에게


지눌(知訥)
순천 송광사 국사전 내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
대표명칭 지눌
한자 知訥
생몰년 1158년(의종 12)-1210년(희종 6)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
목우자(牧牛子)
탑호 감로(甘露)
성씨 정씨(鄭氏)
출신지 황해도 서흥(瑞興)
승탑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
승탑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지눌은 1158년(의종 12)에 황해도 서흥군 (당시 경서의 동주)에서 태어났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부처에게 기도하여 스님을 만들기로 하자 이내 병이 나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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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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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5쪽.


출가수행

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그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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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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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5-76쪽.


활동

1185년 다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학가산)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선종의 종지(宗旨)에 따라 수행하면서 교학을 병행하던 중,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지도 체계를 세웠으며,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하였다. 또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였다. 그 뒤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겼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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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 25년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 항상 마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몽(迷蒙)을 인도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得才)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名利)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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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77-78쪽.


1190년 그는 몽선(夢船)화상과 함께 거조사(居祖寺)로 가서,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 결사문은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1205년(희종 1) 새로운 결사도량인 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고, 『대혜어록』과 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 대중을 지도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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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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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81쪽.


입적

10여 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한 뒤,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입적 7일 후 화장을 하여 오색사리 수백 개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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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大安) 2년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수순(數旬) 동안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서 설법(說法)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발병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容)히 대답하였다.

...(중략)...

문도(門徒)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顆)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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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81-83쪽.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 지눌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 순천 송광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지눌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순천 송광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수선사 지눌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지눌 예천 보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개성 보제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순천 송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영천 거조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함양 상무주암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종휘 지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지눌 혜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지눌 천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지눌 정혜쌍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간화선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눌 16국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권수정혜결사문 지눌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원돈성불론 지눌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수심결 지눌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지눌 진영(송광사) 지눌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지눌 진영(동화사) 지눌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182년 지눌개성 보제사에서 주석하였다
1185년 지눌예천 보문사에서 주석하였다
1190년 지눌영천 거조사에서 주석하였다
1197년 지눌함양 상무주암에서 주석하였다
1200년 지눌순천 송광사에서 주석하였다
1210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지눌를 위한 비이다
1213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지눌를 위한 승탑이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보혜, 보조국사 지눌의 선교일치, 충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11쪽.
  3.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강건기,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 불일 보조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2010.
    • 김보혜, 『보조국사 지눌의 선교일치』, 충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 심재룡, 『지눌연구 : 보조선과 한국불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 이덕진, 『普照知訥의 禪思想 硏究 : 中國佛敎와 關聯하여』,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58-90쪽.
    • 전행욱, 『수선사 연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정안스님, 이용운,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96> 보조지눌(普照知訥)", 불교신문, 2017.03.13.
    • 최성열, 『牧牛子 知訥의 圓頓觀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