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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출가 후의 그의 삶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출가하여 개인적으로 수도에 전념하는 입산출가기(入山出家期), 그리고 승선(僧選)에 합격한 이후 선수행과 교학을 병행하며 수행하였던 구도수학기(求道修學期),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생제도와 교화에 힘을 기울인 제도교화기(濟度敎化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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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그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한다. 지눌은 1182년 보제사 담선법회(談禪法會) 직후 동료 10여명과 모여 타락하고 부패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正法佛敎)로 바르게 세우려는 결사의 뜻을 내비친다.
 
 
지눌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한다. 지눌은 1182년 보제사 담선법회(談禪法會) 직후 동료 10여명과 모여 타락하고 부패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正法佛敎)로 바르게 세우려는 결사의 뜻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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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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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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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5일 (화) 13:50 판

지눌(知訥)
순천 송광사 국사전 내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
대표명칭 지눌
한자 知訥
생몰년 1158년(의종 12)-1210년(희종 6)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
목우자(牧牛子)
탑호 감로(甘露)
성씨 정씨(鄭氏)
출신지 황해도 서흥(瑞興)
승탑 송광사보조국사비
승탑비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지눌은 1158년(의종 12)에 황해도 서흥군 (당시 경서의 동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부처에게 기도하여 스님을 만들기로 하자 이내 병이 나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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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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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지눌은 8세의 어린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그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한 스승, 한 종파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직 진리를 따랐고, 지조(志操)는 뛰어나 훤칠하였다”한다. 지눌은 25세(1182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한다. 지눌은 1182년 보제사 담선법회(談禪法會) 직후 동료 10여명과 모여 타락하고 부패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正法佛敎)로 바르게 세우려는 결사의 뜻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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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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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법유학

(귀국 및)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보혜, 10쪽

참고문헌

  • 이종익,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심재룡, 『지눌연구 : 보조선과 한국불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 강건기,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 불일 보조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2010.
  • 정안스님, 이용운, 진영에 깃든 선사의 삶과 사상 <96> 보조지눌(普照知訥), 불교신문, 2017.03.13.
  •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5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