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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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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朝鮮 太祖)
"조선태조어진",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대표명칭 조선 태조
한자표기 朝鮮 太祖
생몰년 1335년(충숙왕 복위 4) 10월 11일-1408년(태종 8) 5월 24일
본관 전주(全州)
이칭 이성계(李成桂), 이단(李旦)
시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중결(仲潔), 군진(君晉)
출생지 화령부(和寧府: 영흥)
사망지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
시대 조선
배우자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이자춘(李子春)
최한기(崔閑奇)의 딸
자녀 이방우(李芳雨), 조선 정종,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조선 태종, 이방연(李芳衍),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
능묘 건원릉(健元陵)
성격
유형 인물




정의

1335(충숙왕 복위 4)∼1408(태종 8). 조선 제1대 왕.

내용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1]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2]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3]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 우왕을 폐한 뒤 고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고려 창왕을 폐하고 고려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다.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4]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했다.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 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3년 9월에 착공해 4대문, 4소문(小門) 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법제 정비에도 힘써,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해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했다.[5]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이방원(李芳遠: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이방원은 세자인 이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이방석·이방번(李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이방원의 요청에 의해 이방과(李芳果)로 결정했다. 태조는 이방석·이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6]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자춘 조선 태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신의왕후 한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조선 태조 신덕왕후 강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조선 태조 홍건적의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황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이지란 A는 B를 수하로 두었다 A ekc:hasSubject B
조선 태조 위화도회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최영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조선 태조 조준 A는 B를 수하로 두었다 A ekc:hasSubject B
조선 태조 정도전 A는 B를 수하로 두었다 A ekc:hasSubject B
조선 태조 남은 A는 B를 수하로 두었다 A ekc:hasSubject B
조선 태조 자초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조선 태조 이방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조선 정종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이방의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이방간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조선 태종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이방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경신공주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Daughter B
조선 태조 경선공주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Daughter B
조선 태조 이방번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이방석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조선 태조 경순공주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Daughter B
조선 태조 함흥차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태조대왕태실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구리 건원릉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전주 경기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조선 태조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조선 태조 오녀산성 A는 B를 공격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어진 조선 태조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인왕산 국사당 조선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아기발도 조선 태조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태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태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조선태조어진",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태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조선태조어진",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오영교, 『조선 건국과 경국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2004.
  2. 논문
    • 김당택, 「고려말 이성계의 정적」, 『한국중세사연구』 31, 한국중세사학회, 2011, 407-445쪽.
    • 김당택,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과 제도개혁」, 『역사학연구』 24, 호남사학회, 2005, 137-165쪽.
    • 문재윤, 「조선 건국과 이성계 설화의 정치적 함의」, 『동양정치사상사』 10권 1호,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1, 5-28쪽.
    • 박제광, 「태조 이성계의 어궁과 궁술에 대한 소고」, 『고궁문화』 8, 국립고궁박물관, 2015, 42-72쪽.
    • 윤훈표, 「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과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의 결집 양상」, 『한국사학사학보』 33, 한국사학사학회, 2016, 101-149쪽.
    • 이상백, 『李朝建國의 硏究 : 李朝建國과 田制改革問題』,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67.
    • 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국학연구』 20, 한국국학진흥원, 2012, 241-272쪽.
    • 이태문, 「이성계 전설의 인물인식과 그 특징」, 『구비문학연구』 4, 한국구비문학회, 1997, 251-279쪽.
    • 이형우, 「李成桂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한국사학보』 16, 고려사학회, 2004, 79-113쪽.
    • 조민, 「조선 이성계 세력과 명과의 관계」, 『동북아연구』 22권 1호, 조선대학교 동북아연구소, 2007, 75-88쪽.
    • 주경미, 「李成桂 發願 佛舍利莊嚴具의 硏究」, 『미술사학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 31-65쪽.
    • 최재진, 「고려말 동북면의 통치와 이성계 세력 성장 : 쌍성총관부 수복이후를 중심으로」, 『사학지』 26권 1호, 단국사학회, 1993, 167-193쪽.
  3. 웹 자원
    • 김정미, "태조 이성계",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 2010. 0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