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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문헌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 제가야산독서당 |한자표기= 題伽倻山讀書堂 |영문명칭= |이칭= 제가야산 |유형= 한시 |저자=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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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동문선|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자연을 통하여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려는 심정을 나타낸 작품으로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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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로, 칠언절구로 『[[동문선|동문선(東文選)]]』 권19에 전한다. ‘농산정(籠山亭)’,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고도 불린다.<ref>민병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220 제가야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칠언절구 4수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는 자연을 통하여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려는 심정을 나타낸 작품으로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읊고 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7317 제가야산독서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칠언절구 4수로 구성되어 있다. 제1수에서는 중첩된 바위 사이에서 흐르는 물의 모습과 소리를 묘사한다. 이는 인간세상과 단절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제2수에서는 그 물소리가 사람소리를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비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제3수에서는 서정적 자아의 심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제4수에서는 물로 하여금 온통 산을 감싸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세상의 시비를 막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드러낸다.
 
세속에 대해 고뇌하는 작자의 모습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제1·4수에서는 자연의 물소리를, 제2·3수에서는 세상의 사람소리를 서로 대조시키는데, 이때 물소리는 작자의 내면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다. 시비의 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벗어나고자, 결국에는 물소리를 통해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현실을 대하는 작자의 의식이 간결한 형식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제1수의 묘사와 제4수의 마무리가 탁월한 작품이다.
 
작자가 가야산의 해인사에 은거할 때 지은 작품이다. 현재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농산정(籠山亭)과 독서당 유적과 함께 암벽에 초서로 음각되어 있다.
 
<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7317 제가야산독서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로 ≪동문선≫ 권19에 전한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또는 ‘농산정(籠山亭)’·‘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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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수에서는 중첩된 바위 사이에서 흐르는 물의 모습과 소리를 묘사한다. 이는 인간세상과 단절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제2수에서는 그 물소리가 사람소리를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비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제3수에서는 서정적 자아의 심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제4수에서는 물로 하여금 온통 산을 감싸게 하였다고 말한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7317 제가야산독서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제가야산>은 자연의 물소리에 의탁하여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를 멀리하고자 하는 은둔의 결의를 노래한 작품이다. 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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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朴趾源)이 <함양군학사루기 咸陽郡學士樓記>에서 “고운(孤雲)이 일찍이 십사(十事)를 올려 임금에게 간하였으나 임금이 쓰지 않았다. 가야가 천령(天嶺)에서 백 리가 못 되는 가까운 곳이니 그 초연히 떠나간 것이 어찌 군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시무십여조’를 올렸을 때에 천령군수를 지냈고 거기서 곧 가야산으로 은거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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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합천 해인사|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ref>민병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220 제가야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최치원이 <제가야산>을 짓게 된 연기(緣起)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파한집≫ 권 중에, “고려태조가 등극할 줄 알고 글을 바쳐 주달(奏達)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가야산에 숨었다가 하루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간 뒤에는 그의 간곳을 알지 못하였는데……진상(眞像)을 그려 독서당(讀書堂)에 두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사진이 독서당에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작품이 가야산 은거시절에 지어진 것은 틀림없다.
 
<제가야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사람들이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하여/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결구의 盡籠山(진롱산)이 ‘盡聾山(진롱산)’으로 유전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ref>민병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220 제가야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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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9일 (목) 00:11 판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대표명칭 제가야산독서당
한자표기 題伽倻山讀書堂
이칭 농산정(籠山亭),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
유형 한시
저자 최치원(崔致遠)
시대 신라시대



정의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내용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로, 칠언절구로 『동문선(東文選)』 권19에 전한다. ‘농산정(籠山亭)’,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고도 불린다.[1] 칠언절구 4수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는 자연을 통하여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려는 심정을 나타낸 작품으로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읊고 있다.[2]

제1수에서는 중첩된 바위 사이에서 흐르는 물의 모습과 소리를 묘사한다. 이는 인간세상과 단절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제2수에서는 그 물소리가 사람소리를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비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제3수에서는 서정적 자아의 심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제4수에서는 물로 하여금 온통 산을 감싸게 하였다고 말한다.[3]

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4]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제가야산독서당 최치원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동문선 제가야산독서당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주석

  1. 민병수, "제가야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제가야산독서당", 『두산백과』online.
  3. "제가야산독서당", 『두산백과』online.
  4. 민병수, "제가야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