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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암(普賢菴)에서 공부를 하던 중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여대남이 써서 올린 당 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보고 범상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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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여대남은 일본 히고(肥後) 지방으로 압송되어 승려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측근 중에는 [[일진|일진(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진]]은 여대남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의 주요 불교강원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ref>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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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신연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일진]]은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의 [[혼묘지|본묘사(本妙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1608년 일요(日繞)에게 주지직을 물려주고 은퇴를 하였으나, 2대 주지가 된 일요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1609년 일요가 3대 주지직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고려상인(高麗上人), 고려요사(高麗謠師)라고 하며 존경을 했다고 한다.<ref>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2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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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는 한 때 신변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혔다.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혼묘지|본묘사]]에 그의 묘가 있다.<ref>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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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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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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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15-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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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0일 (화) 03:46 판

일요(日遙)()
BHST Monk1.png
대표명칭 일요(日遙)
생몰년 1580년-1659년
이칭 일요상인(日遙上人), 고려일요(高麗日遙), 고려상인(高麗上人)
성씨 여씨(余氏)
속명 여대남(余大男)
출신지 하동



정의

조선 출신 일본의 승려.

내용

일요(日遙)는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으로, 본명은 여대남(余大男)이다. 아버지는 여천갑(余天甲)이다.

보현암(普賢菴)에서 공부를 하던 중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여대남이 써서 올린 당 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1]

그 후 여대남은 일본 히고(肥後) 지방으로 압송되어 승려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측근 중에는 일진(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진은 여대남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의 주요 불교강원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이후 신연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일진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의 본묘사(本妙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1608년 일요(日繞)에게 주지직을 물려주고 은퇴를 하였으나, 2대 주지가 된 일요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1609년 일요가 3대 주지직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고려상인(高麗上人), 고려요사(高麗謠師)라고 하며 존경을 했다고 한다.[3]

일요는 한 때 신변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혔다.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본묘사에 그의 묘가 있다.[4]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일요 가토 기요마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일요 일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일요 혼묘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일요 임진왜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각주

  1.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작성일: 2008년 1월 9일.
  2.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작성일: 2008년 1월 9일.
  3.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22쪽.
  4.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작성일: 2008년 1월 9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