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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에 간행된 [[임원준]]이 저술한 산부인과에 관한 의서이다.
 
1472년에 간행된 [[임원준]]이 저술한 산부인과에 관한 의서이다.
 
==내용==
 
==내용==
==={{PAGENAME}}편찬과 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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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유래===
시기적으로 『産書』 다음으로 간행된 산부인과 관련 의서는 1434년(세종 16)에 의관 [[노중례]]에 의해 편찬된 『[[태산요록|태산요록(胎産要錄)]]』이다.12) 이 책은 의관 교육용 교재로 활용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내용이 의사와 같은 전문 인력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산모 당사자나 조산원 같은 보조 인력이 알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産書』를 대신하여 산부인과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 의서가 바로 『{{PAGENAME}}』이다. 『{{PAGENAME}}』는 1472년 성종실록 기사에서 의관 선발시험용 교재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의과시험 과목의 하나로 채택됨으로써, 조선중기까지 의학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다. [[허준]]『[[언해두창집요|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발문」을 보면 [[임진왜란]]을 거치며 망실된 의서 중 하나로 언급되므로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의관의 교재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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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은 [[조선|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세손 시절 자신을 반성할 목적으로 쓰기 시작한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출발하였다. 국가 정무가 늘어나고 규장각의 체제가 정비되자 1781년(정조 5) [[조선 정조]]는 자신이 직접 쓰던 일기를 규장각 신하들에게 대신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국정 운영에 참고하고 국정 전반을 성찰할 수 있는 국가의 일기로 발전시켰다. 시간 순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국가의 공식 문서로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지만, 이것은 편찬 후 사고(史庫)에 비장(秘藏)하기 때문에 국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정조는 가까이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열람이 가능한 국정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써 『[[일성록]]』의 편찬을 명하였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5&levelId=tg_003_2780&ganada=&pageUnit=10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9-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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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편찬과 내용 체제===
『{{PAGENAME}}』은 허준이 저술한 『[[언해태산집요|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로 의료인을 위한 산과 전문의서라는 성격과 지위가 계승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PAGENAME}}』의 원문 자체를 인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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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규장각]] 각신들과 『[[일성록]]』의 체제를 논의하면서 기록의 주체를 ‘여()’라고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일성록]]』이 국왕의 시각으로 정리된 기록임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사건이나 일을 하나의 기사로 구성하였으며, 각 기사는 제목인 강()과 세부 내용인 목()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실제로 찾아서 참고하기 쉽게 하였다. 또한 매일의 기록 끝에는 편찬을 담당한 인물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였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5&levelId=tg_003_2780&ganada=&pageUnit=10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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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가치와 의의===
==={{PAGENAME}}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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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한 『[[일성록]]』은 1910년 일제 강점 이전까지 계속해서 기록되었다. 『[[일성록]]』에는 국왕이 정치에 직접 관여한 일들, 예컨대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왕에게 올린 건의서나 왕의 명령, 왕의 동정, 서적의 편찬, 경연에서 읽은 책의 내용, 군사 훈련, 죄수 심리, 백성에 대한 진휼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 역시 관찬 사서로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쳐지거나 지워질 수도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이 죽은 후 편집되는 『[[조선왕조실록]]』보다 훨씬 생생하면서도 정연한 형식의 당시 기록을 살펴볼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5&levelId=tg_003_2780&ganada=&pageUnit=10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기존 연구에서 『[[태산요록|태산요록(胎産要錄)]]』과 『{{PAGENAME}}(胎産集)』는 같은 책으로 여겨졌고, 당연히 『{{PAGENAME}}』의 저자도 [[노중례|노중례(盧重禮)]]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PAGENAME}}』가 활용되던 당시의 문헌 기록이 [[노중례]] 저작 설을 부정한다. 『[[경국대전주해|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는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의 주해서로 1553년(명종 9)에 완성되고 1554년(명종 10)에 간행되었다. 규장각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가 1971년 일본 동양문고의 소장본 청주판본이 새롭게 알려졌다. 이 청주판본에서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기술직 관청의 관리선발에서 사용된 책들을 설명하는데, 여기에 “『[[창진집|창진집(瘡疹集)]]』과 『{{PAGENAME}}』는 우리나라의 [[임원준]]이 간행했다.”고 하여 『{{PAGENAME}}』의 저자를 [[임원준]]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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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11쪽.</ref>
 
==={{PAGENAME}}의 의의===
 
『{{PAGENAME}}』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저술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문 분과의서이다. {{PAGENAME}}』 외에도 『産書』를 비롯한 산과 전문의서가 관주도로 여러 차례 간행된 것은 세종~중종 시기의 [[구급방]][[창진방]]을 다룬 전문 의서들의 간행과 함께 눈여겨볼 점이다. 이들 의서를 통해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에 축적된 지식을 원천으로 하여 분과의학이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허준이 3종의 언해서를 간행하기이전, 즉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 시기에 이미 '태산(胎産)', '구급(救急)', '창진(瘡疹:두창)'의 세 가지 분과의학이 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의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도 엿볼 있다.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2쪽.</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관계정보===

2017년 9월 21일 (목) 15:28 판

태산집(胎産集)
대표명칭 태산집
한자표기 胎産集
이칭 태산집요
유형 고서
저자 임원준
간행시기 1472년
시대 조선


정의

1472년에 간행된 임원준이 저술한 산부인과에 관한 의서이다.

내용

일성록의 유래

일성록』은 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세손 시절 자신을 반성할 목적으로 쓰기 시작한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출발하였다. 국가 정무가 늘어나고 규장각의 체제가 정비되자 1781년(정조 5) 조선 정조는 자신이 직접 쓰던 일기를 규장각 신하들에게 대신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국정 운영에 참고하고 국정 전반을 성찰할 수 있는 국가의 일기로 발전시켰다. 시간 순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국가의 공식 문서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지만, 이것은 편찬 후 사고(史庫)에 비장(秘藏)하기 때문에 국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정조는 가까이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열람이 가능한 국정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써 『일성록』의 편찬을 명하였다.[1]

일성록의 편찬과 내용 체제

조선 정조규장각 각신들과 『일성록』의 체제를 논의하면서 기록의 주체를 ‘여(予)’라고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일성록』이 국왕의 시각으로 정리된 기록임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사건이나 일을 하나의 기사로 구성하였으며, 각 기사는 제목인 강(綱)과 세부 내용인 목(目)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실제로 찾아서 참고하기 쉽게 하였다. 또한 매일의 기록 끝에는 편찬을 담당한 인물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였다.[2]

일성록의 가치와 의의

조선 정조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한 『일성록』은 1910년 일제 강점 이전까지 계속해서 기록되었다. 『일성록』에는 국왕이 정치에 직접 관여한 일들, 예컨대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왕에게 올린 건의서나 왕의 명령, 왕의 동정, 서적의 편찬, 경연에서 읽은 책의 내용, 군사 훈련, 죄수 심리, 백성에 대한 진휼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 역시 관찬 사서로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쳐지거나 지워질 수도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이 죽은 후 편집되는 『조선왕조실록』보다 훨씬 생생하면서도 정연한 형식의 당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일성록 언해태산집요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원준 일성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1472년
허준 언해태산집요 A는 B를 저술하였다 1608년
의방유취 일성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태산요록 일성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노중례 태산요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일성록 경국대전 A는 B에 언급된다
경국대전주해 경국대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원준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일성록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구급방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창진집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72년 임원준 일성록을 저술하였다
1608년 허준이 『언해태산집요』를 저술하였다

주석

  1.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일성록", 교과서 용어 해설,『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