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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 5대 동주===
 
===백운동 별서정원 5대 동주===
이시헌은 [[백운동 별서정원]]의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아우 [[이석휘]]의 아들로, 아들이 없었던 [[이덕휘]]의 양아들이 되어 대를 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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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은 [[백운동 별서정원]]의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아우 [[이석휘]]의 아들로, 딸만 넷을 두어 아들이 없었던 [[이덕휘]]의 양아들이 되어 대를 이었다.<br/>
 
그는 [[백운동 별서정원]]의 중흥조라 할 만한 인물로, 선대의 문집과 행록을 펴내고, 집안에 전해오던 필묵들을 묶어 책자로 만듦으로써 [[백운동 별서정원]]의 역사를 오늘날 전하게 해주었다. 특히, 이시헌이 저술한 [[백운세수첩|『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있고, 그의 문집 [[자이집|『자이집(自怡集)』]]에는 백운동의 14경을 노래한 시를 비롯해 [[백운동 별서정원]]에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백운동 별서정원]]의 중흥조라 할 만한 인물로, 선대의 문집과 행록을 펴내고, 집안에 전해오던 필묵들을 묶어 책자로 만듦으로써 [[백운동 별서정원]]의 역사를 오늘날 전하게 해주었다. 특히, 이시헌이 저술한 [[백운세수첩|『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있고, 그의 문집 [[자이집|『자이집(自怡集)』]]에는 백운동의 14경을 노래한 시를 비롯해 [[백운동 별서정원]]에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스승 정약용과의 인연===
 
===스승 정약용과의 인연===
이시헌은 [[정약용]][[백운동 별서정원]] 방문을 계기로 다산 문하 막내 제자로 합류하여 [[정약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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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제자 [[의순]], [[윤동]]과 함께 1806년에 이어 1812년 [[월출산]] 등정을 시도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백운동 별서정원]]을 찾게 되었는데, 그 인연으로 이시헌은  다산 문하 막내 제자로 합류하여 [[정약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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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시헌은 [[정약용|다산]] 해배 후 [[정약용|다산]]의 부탁으로 백운동 운당원 대숲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채취해 삼증삼쇄 떡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현재 [[백운동 별서정원]] 인근에 형성된 [[설록다원강진]]으로까지 이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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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30년 스승 [[정약용|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차를 만들어 스승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차를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학연의 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830년 스승 [[정약용|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차를 만들어 스승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차를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학연의 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Blockquote| ...보내온 글에 서폭 가득 넘치는 것은 온통 지난날을 말하고 우의를 얘기하는 말뿐이어서 편쳐 읽는 동안 마음이 뭉클하여 맑은 눈물이 눈에 어리기까지 하였소. 다만 안타깝기는 그대가 이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나는 여유가 없어 이생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아보기는 마치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하겠소. 그러니 이를 어찌하오...
 
{{Blockquote| ...보내온 글에 서폭 가득 넘치는 것은 온통 지난날을 말하고 우의를 얘기하는 말뿐이어서 편쳐 읽는 동안 마음이 뭉클하여 맑은 눈물이 눈에 어리기까지 하였소. 다만 안타깝기는 그대가 이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나는 여유가 없어 이생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아보기는 마치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하겠소. 그러니 이를 어찌하오...

2017년 10월 19일 (목) 04:06 판

@ 일러 삽입 예정


이시헌(李時憲)
대표명칭 이시헌
한자표기 李時憲
생몰년 1803년-1860년
자이당(自怡堂), 매원(梅園)
숙도(叔度)
시대 조선
이덕휘


정의

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주인으로,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양아들이자, 정약용의 제자.

내용

백운동 별서정원 5대 동주

이시헌은 백운동 별서정원의 4대 주인인 이덕휘의 아우 이석휘의 아들로, 딸만 넷을 두어 아들이 없었던 이덕휘의 양아들이 되어 대를 이었다.
그는 백운동 별서정원의 중흥조라 할 만한 인물로, 선대의 문집과 행록을 펴내고, 집안에 전해오던 필묵들을 묶어 책자로 만듦으로써 백운동 별서정원의 역사를 오늘날 전하게 해주었다. 특히, 이시헌이 저술한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류들이 백운동 8영을 읊은 연작시가 다수 실려있고, 그의 문집 『자이집(自怡集)』에는 백운동의 14경을 노래한 시를 비롯해 백운동 별서정원에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스승 정약용과의 인연

정약용은 제자 의순, 윤동과 함께 1806년에 이어 1812년 월출산 등정을 시도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백운동 별서정원을 찾게 되었는데, 그 인연으로 이시헌은 다산 문하 막내 제자로 합류하여 정약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또한, 이시헌은 다산 해배 후 다산의 부탁으로 백운동 운당원 대숲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채취해 삼증삼쇄 떡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현재 백운동 별서정원 인근에 형성된 설록다원강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1830년 스승 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차를 만들어 스승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차를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857년 11월 22일 정학연이 쓴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학연의 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Quote-left.png ...보내온 글에 서폭 가득 넘치는 것은 온통 지난날을 말하고 우의를 얘기하는 말뿐이어서 편쳐 읽는 동안 마음이 뭉클하여 맑은 눈물이 눈에 어리기까지 하였소. 다만 안타깝기는 그대가 이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나는 여유가 없어 이생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아보기는 마치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하겠소. 그러니 이를 어찌하오... Quote-right.png
출처: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148-149쪽.


이후 근재 성근묵의 문인이 되어 중앙 학계와도 소통하였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약용 이시헌 A는 B의 스승이다
성근묵 이시헌 A는 B의 스승이다
이시헌 이덕휘 A는 B의 아들이다
이시헌 정학연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시헌 백운동 별서정원 A는 B에서 거주하였다
이시헌 설록다원강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시헌 백운세수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시헌 자이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7419353 126.6975985 백운동 별서정원은 이시헌의 소유지였다
34.7406953 126.7047464 설록다원강진은 이시헌과 관련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1. 김태식, "다산이 차를 요청한 편지", 『연합뉴스』, 작성일: 2007년 3월 4일.
  2. 기사에는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라고 잘못 나와있다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