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

Encyves Wiki
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6일 (수) 22:26 판 (내용)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삼(李森)
대표명칭 이삼
한자표기 李森
생몰년 1677년(숙종 3)-1735년(영조 11)
본관 함평(咸平)
원백(遠伯)
시대 조선
대표저서 관서절요(關西節要)
이사길(李師吉)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내용

이삼(李森)은 함평군 이사길(李師吉)과 남양전씨 사이에서 1677년(숙종 30)에 태어났다. 이삼의 가계는 상계로 올라가면 무반 가문의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고조 이후는 문반으로서의 성향이 더해져, 이삼이 '문무겸전'의 인물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1]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조판서 김구(金傋)가 이삼의 힘과 담략이 뛰어남을 보고 무과 응시를 권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713년 정주목사로 임명된 뒤 171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사 등을 역임하였다. 군제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경종의 신임을 받아 수원부사·우포도대장·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21년 총융사·한성부우윤, 1724년 어영대장을 지냈다.[2] 1725년(영조 1) 어영(御營)대장으로 경종 때의 죄인을 신문한 사건과 관련하여 이정신(李正臣)과 함께 파직되어 경상도 곤양(昆陽:사천)에 유배되었다. 1727년 왕의 특지(特旨)로 훈련대장에 복관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고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3] 1729년 병조판서에 올랐다. 지리의 이용과 기계의 제조, 여러 무술에 두루 능통하였다.[4] 1735년(영조 11) 정월 10일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삼의 부음을 들은 영조는 애도의 뜻으로 철조(輟朝)[5]와 철시(撤市)[6]를 명하고 신하들이 진달한 바에 따라 우찬성 함은부원군(右贊成咸恩府院君)으로 추증하였으며, 예관을 보내어 제를 올렸다.

이삼의 묘소와 영당은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가재울마을에 있다. 묘소는 부인 진주유씨와 합장하여 유택을 마련하였는데, 백일헌 영당의 뒤편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논산시 상월면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이바지함에 따라 영조가 내린 하사금으로 1700년대 초에 지은 고택인 백일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73호)이 원형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7] 고택에는 영정첩(影幀帖), 검철퇴(劍鐵槌), 언월도(偃月刀) 등 이삼의 유물이 남아 있다.[8]

저서

이삼의 저서로는 『관서절요(關西節要)』가 있다.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삼 공신도상 이삼 A는 B의 초상화이다
이삼 초상(전신상) 이삼 A는 B의 초상화이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고순영, "이삼",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이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재룡, "이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철조(輟朝):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혹은 재앙이 있을 때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던 일. 출처: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온라인 참조: "철조",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철시(撤市): 국상이 났거나 대신이 죽었을 때 저자의 문을 닫고 쉬던 일. 출처: "철시", 『표준국어대사전』online, 국립국어원.
  7. "논산 백일헌 종택",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8. "이삼장군유물<영정첩.검철퇴.언월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