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40번째 줄: 40번째 줄:
  
 
===업적===
 
===업적===
 +
====별무반을 설치하다====90
 +
윤관은 1104년([[고려 숙종|숙종]] 9)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있으면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다. 그러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일단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였다.<ref>이희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215 윤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윤관의 건의에 따라 [[고려 숙종|숙종]]은 1104년([[고려 숙종|숙종]] 9) 12월 [[별무반|별무반(別武班)]]을 설치했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특수병인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과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된 별무반은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이 입대해야 하는 의무군이었다. 귀족의 자제는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 승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국민총동원부대였다.<ref>정성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176&cid=59015&categoryId=59015 윤관]",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1년 7월 1일</ref>
 +
 +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그 동안 충실히 군사훈련을 받은 [[별무반]]은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드디어 1107년([[고려 예종|예종]] 2) 10월, [[고려 예종|예종]]은 윤관을 원수로 삼아 여진 정벌에 나서게 했으니, 이 때 총동원된 고려군이 무려 20만에 이르렀다. 전쟁 결과, 사로잡은 포로 수가 무려 5천을 넘었고 목이 잘린 자도 5천이 넘었을 정도로 전투는 대승이었다.<ref>정성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176&cid=59015&categoryId=59015 윤관]",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발행일: 2011년 7월 1일</ref>
  
  

2017년 8월 12일 (토) 22:41 판

윤관(尹瓘)
대표명칭 윤관
한자표기 尹瓘
영문명칭 Yoon Gwan
생몰년 미상-1111년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시호 문숙(文肅)
동현(同玄)
시대 고려시대
국적 고려
윤집형(尹執衡)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개요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1]

고려 태조(太祖)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윤집형(尹執衡)이다.[2]

업적

====별무반을 설치하다====90 윤관은 1104년(숙종 9)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있으면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다. 그러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일단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였다.[3]

윤관의 건의에 따라 숙종은 1104년(숙종 9) 12월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했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특수병인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과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된 별무반은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이 입대해야 하는 의무군이었다. 귀족의 자제는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 승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국민총동원부대였다.[4]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그 동안 충실히 군사훈련을 받은 별무반은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드디어 1107년(예종 2) 10월, 예종은 윤관을 원수로 삼아 여진 정벌에 나서게 했으니, 이 때 총동원된 고려군이 무려 20만에 이르렀다. 전쟁 결과, 사로잡은 포로 수가 무려 5천을 넘었고 목이 잘린 자도 5천이 넘었을 정도로 전투는 대승이었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집형 윤관 A의 아들은 B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윤관이 태어났다
1111년 윤관이 생을 마감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이희덕, "윤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희덕, "윤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희덕, "윤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정성희, "윤관",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1년 7월 1일
  5. 정성희, "윤관",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1년 7월 1일

참고문헌

  • 이희덕, "윤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