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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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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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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예송논쟁
 
|한자표기=禮訟論爭
 
|영문명칭=
 
|이칭=
 
|유형=사건
 
|시대=조선시대
 
|날짜=1659년([[예송논쟁|기해예송]]), 1674년([[예송논쟁|갑인예송]])
 
|관련인물=[[조선 효종|효종]] [[조선 현종|현종]] [[조선 숙종|숙종]] [[송시열]] [[허목]]
 
|관련단체=[[남인]] [[서인]]
 
|관련장소=
 
|관련물품=
 
|관련유물유적=
 
}}
 
 
 
=='''정의'''==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내용'''==
 
===[[예송논쟁]]이 일어난 원인===
 
*[[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때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비|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인조비 [[인열왕후|인열왕후(仁烈王后)]]가 사망한 후 1638년(인조 16) 인조 계비에 책봉된 조창원(趙昌遠)의 딸 [[자의대비|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로 자손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붓아들 [[조선 효종|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에송논쟁]]일어나다===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조선 효종|효종]]은 [[자의대비|조대비]]에게는 둘째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종지설(四種之說: 왕위를 계승했어도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嫡子이면서 長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조정 대신들의 논의를 거처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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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의 성격===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면서 왕위계승원칙(지금의 憲法과 같음)인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栗谷學派)인 서인과 퇴계학파(退溪學派)인 남인간의 정권주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예송논쟁]]이 일어나기전 상황===
 
[[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이런 와중에서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조선 효종|효종]]이 승하하다.====
 
즉위후 10여년간 일로 매진 북벌정책에 매달리던 [[조선 효종|효종]]은 1659년(효종 10)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이때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비|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인조비 [[인열왕후|인열왕후(仁烈王后)]]가 사망한 후 1638년(인조 16) 인조 계비에 책봉된 조창원(趙昌遠)의 딸 [[자의대비|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로 자손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붓아들 [[조선 효종|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자의대비]] 상복 3년복이냐 1년복이냐 논쟁이 일어나다.====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조선 효종|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년복으로 상례가 정해지자 [[남인]]들이 들고 일어나다.====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조선 효종|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윤휴]]는 [[허목]]에게 ' 『[[의례주소]]』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조선 효종|효종]]이 '정(正)'이 아니라는 설은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사례(士禮)는 천자제후례(王禮)에 적용할 수는 없다.…이미 왕이 된 자에게 강복(降服)하는 것은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둘로 나누어 왕을 낮춤)'의 잘못에 다름아니다. ([[송시열]] 등이) 둘째아들을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어 호응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송시열]]이 주장한 1년 상복의 의미와 위험성====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윤휴]]·[[허목]]·[[윤선도]]·[[원두표]] 등의 [[남인]]세력은 『[[의례주소]]』참최장을 근거로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장자로 보아야 하며 이에 3년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윤휴]]는 3년복은 말할 것도 없이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가 된다는 입장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삼년복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의례주소』중 장자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사종지설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이 둘째아들로 통을 이은 경우, 곧 '체이부정'에 해당하며 서자(庶子)일 뿐이니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정태화]]가 [[서인]]의 예설을 위험시하였던 것은 [[조선 인조|인조]]의 적자인 [[소현세자]]는 죽고 없지만 [[경안군|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소현세자]]의 [[경안군|막내아들]]은 1656년(효종 7)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에 경안군 [[경안군|이회(慶安君 李檜)]]에 책봉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송시열]]의 예설에 따르면 [[조선 효종|효종]]이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원칙대로라면 [[경안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현종초 [[예송논쟁|기해예송]]으로 인해 왕실의 위험인물로 떠올랐던 [[경안군]]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1665년(현종 6)에 사망하게 된다. 이처럼 [[서인]]의 예설은 현종대 왕실에게 매우 위험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었고 이에 [[정태화]]를 위시한 여러 대신들은 무난하게 국제인 『[[경국대전]]』중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기년복으로 서둘러 복제를 결정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끝난 [[예송논쟁|기해예송]] 하지만 잠재되어있는 논쟁의 불씨====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대신들은 국제를 내세워 기년복을 결정하였지만 사람들은 [[송시열]]의 예설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 곧 [[서인]]측의 예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장자에게 3년복, 중자에게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고례]](古禮 : 『[[의례주소]]』)이고 장자·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시왕례( 『[[경국대전]]』)인데, 애당초 정한 것은 비록 국가 제도( 『[[경국대전]]』)을 사용하였으나 그 후에 여러 신하들이 쟁론한 것은 [[고례]]를 가지고 논변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년복제에 대하여 '3년복을 행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한 것은 중자에게 입던 고례를 따른 것이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실은 국제에 따른 기년복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사림들은 고례에 따른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국제를 내세워 왕실의 혐의를 피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학 원칙을 관철시켜 나갔던 [[서인]] 산림세력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알게 된다. 이처럼 [[예송논쟁|기해예송]]의 결과 복제는 애매한 기년복으로 미봉되었지만 [[조선 현종]]으로 대변되는 조선왕실은 기년복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송논쟁|기해예송]]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으며 1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예송논쟁|갑인예송]]에서 다시 불붙게 된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인선왕후]]의 죽음과 [[자의대비]] 상복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다.====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 이에 대해 [[남인]]이 찬한 『[[현종실록]]』에서는 '기해년에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대었는데, 그 뜻은 실상 『[[의례주소]]』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을 서자로 바라본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기년복을 정해 올리자 당시 [[송시열]]의 무리들이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이조판서 [[조형]] 등이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고 하였다. 곧 기해년 효종상시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비록 국제로 표방되었으나 [[서인]]들은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여겼고 같은 선상에서 갑인년 효종비상에서도 예관들이 정한 장자부 기년복을 중자부(서자부) 대공복으로 변개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남인]] 왜 기년복에서 대공복으로 바뀌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 [[남인]]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곧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조선 현종|현종]]은 '중자가 적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예설을 상고해 올리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기해년 [[윤휴]]·[[허목]]·[[윤선도]]의 예설, 또 이 예설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서인]]들의 예설을 꺾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현종|현종]]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도하다.====
 
예관들이 [[예송논쟁|기해예송]]시 [[허목]]의 상소, 또 1666년(현종 7) 같은 맥락에서 [[유세철|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 또 『[[의례주소]]』참최장의 구문을 올리자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조선 현종|현종]]은 『[[의례주소]]』참최 조항중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부른다'는 구문에 근거하여 장자부에 대한 복으로서 대공복이 아니라 기년복으로 고쳐 올릴 것을 명하였다. [[조선 현종|국왕]]이 나서서 [[남인]]측의 예설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조선 현종|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 현종|현종]]은 [[예송논쟁|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예송논쟁]]직후 [[조선 숙종|숙종]]시기의 상황===
 
이러한 정국의 변화 기류 속에서 갑자기 [[조선 현종|현종]]이 사망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조선 현종|현종]]을 이어 즉위한 14세의 유주(幼主) [[조선 숙종|숙종]]은 [[예송논쟁|갑인예송]]에 대한 부왕의 유지를 이어 [[서인]]의 예론이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유학(幼學) 곽세건(郭世楗) 등의 상소를 통해 정치적인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곽세건은 기해년의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 주장은 [[송시열]]에 의해 창도되었다'며 [[송시열]]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측의 주장에 공감, [[송시열]]의 잘못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곧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이단하(李端夏)]]가 [[조선 현종|현종]]의 행장을 지으면서 복제 개정에 대해 모호하고 소략하게 서술하자 [[조선 숙종|숙종]]은 엄명을 내려 예를 그르친 예관과 대신들을 분명하게 지목해 고쳐 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단하는 이러한 [[서인]] 예설의 주창자인 [[송시열]]에 대해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다(誤引禮經)'고 쓰게 되었다. 이로써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예설의 '잘못(誤)'이 공식화되었고 [[송시열]]은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 유배 직후부터 [[남인]]들 내에서는 고묘(告廟), 즉 예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이 나와 [[송시열]]은 사사될 수도 있는 극히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의 처지에서 상징되듯이 [[서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는 [[남인]]정국이 전격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정권 교체는 숙종대를 점철한 '환국(換局) 정치'의 서막으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남인예설이 승리하고 남인정국이 구성되자 [[윤휴]]는 다시 [[조선 현종|현종]]에 대한 [[자의대비|조대비]]의 참최3년복설을 주장하게 된다. 곧 [[자의대비|조대비]]에게는 [[조선 현종|현종]]은 비록 손자이지만 [[조선 현종|현종]]이 왕위에 있었으니 어머니나 할머니라 할지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참최3년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왕에 자신이 주장한 예설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윤휴]]는 왕례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남인예설의 입지점을 다시 한번 [[조선 숙종|숙종]]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서인]]·[[남인]]의 학풍 차이로 바라본 예송논쟁===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세기 조선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학파의 차이는 정파의 차이로 이어졌기에 정파간의 대립에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성향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서인]]이 성리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순정성리학풍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남인]]의 경우는 성리학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교의 원류인 [[육경고학|육경고학(六經古學)]]을 추구하는 탈성리학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예학의 차이, 또 양차 예송시 예설의 차이로 드러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차 예송에서 [[서인]]이나 [[남인]]들은 모두 고례인 『[[의례주소]]』에 입론하였지만 그 중에서 양측이 착목한 구문이 달랐다. 양측의 예학적 입지점이 달랐기 때문에 꼭같이 고례를 참고하면서도 착목한 예설이 달랐던 것인데, 가장 주요한 입지점으로서 사례(士禮) 및 왕례(王禮)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곧 [[서인]]측은 사례와 왕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천하동례론|천하동례론(天下同禮論)]]'의 입장이었고 [[남인]]측은 왕례는 사례와 다른 특수한 예로 사례 너머에 존재한다는 '[[왕자례부동사서론|왕자례부동사서론(王子禮士庶不同論)]]'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하동례론]]'이 송대 사대부층의 계층적 입장을 반영한 성리예학의 주된 경향중 하나였다면, '[[왕자례부동사서론]]'는 고대 막강했던 왕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육경고학적 예학의 주된 경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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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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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기해예송]]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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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erences/>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논문
 
**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 Vol 26, 2012, 57-79쪽.
 
**장세호,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韓國思想과 文化』, Vol 76, 2015, 205-228쪽.
 
 
 
===유용한 정보===
 
*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사건]]
 
[[분류:이창섭]]
 

2017년 11월 4일 (토) 14:55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