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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송논쟁]]일어나다===
 
===[[에송논쟁]]일어나다===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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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조선 효종|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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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조선 효종|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조선 효종|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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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조선 효종|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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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 현종|현종]]은 [[예송논쟁|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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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 현종|현종]]은 [[예송논쟁|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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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의 성격===
 
===[[예송논쟁]]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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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이런 와중에서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이런 와중에서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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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예송논쟁|기해예송]]===
 
====[[조선 효종|효종]]이 승하하다.====
 
====[[조선 효종|효종]]이 승하하다.====
 
즉위후 10여년간 일로 매진 북벌정책에 매달리던 [[조선 효종|효종]]은 1659년(효종 10)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이때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비|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인조비 [[인열왕후|인열왕후(仁烈王后)]]가 사망한 후 1638년(인조 16) 인조 계비에 책봉된 조창원(趙昌遠)의 딸 [[자의대비|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로 자손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붓아들 [[조선 효종|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즉위후 10여년간 일로 매진 북벌정책에 매달리던 [[조선 효종|효종]]은 1659년(효종 10)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이때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비|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인조비 [[인열왕후|인열왕후(仁烈王后)]]가 사망한 후 1638년(인조 16) 인조 계비에 책봉된 조창원(趙昌遠)의 딸 [[자의대비|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로 자손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붓아들 [[조선 효종|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게 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자의대비]] 상복 3년복이냐 1년복이냐 논쟁이 일어나다.====
 
====[[자의대비]] 상복 3년복이냐 1년복이냐 논쟁이 일어나다.====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조선 효종|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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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주소|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조선 효종|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년복으로 상례가 정해지자 [[남인]]들이 들고 일어나다.====
 
====1년복으로 상례가 정해지자 [[남인]]들이 들고 일어나다.====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조선 효종|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윤휴]]는 [[허목]]에게 『[[의례주소]]』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조선 효종|효종]]이 ‘정(正)’이 아니라는 설은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사례(士禮)는 천자제후례(王禮)에 적용할 수는 없다.…이미 왕이 된 자에게 강복(降服)하는 것은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둘로 나누어 왕을 낮춤)’의 잘못에 다름아니다. ([[송시열]] 등이) 둘째아들을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어 호응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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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조선 효종|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윤휴]]는 [[허목]]에게 ' 『[[의례주소]]』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조선 효종|효종]]이 '정(正)'이 아니라는 설은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사례(士禮)는 천자제후례(王禮)에 적용할 수는 없다.…이미 왕이 된 자에게 강복(降服)하는 것은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둘로 나누어 왕을 낮춤)'의 잘못에 다름아니다. ([[송시열]] 등이) 둘째아들을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어 호응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송시열]]이 주장한 1년 상복의 의미와 위험성====
 
====[[송시열]]이 주장한 1년 상복의 의미와 위험성====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윤휴]]·[[허목]]·[[윤선도]]·[[원두표]] 등의 [[남인]]세력은 『[[의례주소]]』참최장을 근거로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장자로 보아야 하며 이에 3년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윤휴]]는 3년복은 말할 것도 없이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가 된다는 입장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삼년복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의례주소』중 장자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사종지설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이 둘째아들로 통을 이은 경우, 곧 ‘체이부정’에 해당하며 서자(庶子)일 뿐이니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정태화]]가 [[서인]]의 예설을 위험시하였던 것은 [[조선 인조|인조]]의 적자인 [[소현세자]]는 죽고 없지만 [[경안군|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소현세자]]의 [[경안군|막내아들]]은 1656년(효종 7)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에 경안군 [[경안군|이회(慶安君 李檜)]]에 책봉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송시열]]의 예설에 따르면 [[조선 효종|효종]]이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원칙대로라면 [[경안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현종초 [[예송논쟁|기해예송]]으로 인해 왕실의 위험인물로 떠올랐던 [[경안군]]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1665년(현종 6)에 사망하게 된다. 이처럼 [[서인]]의 예설은 현종대 왕실에게 매우 위험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었고 이에 [[정태화]]를 위시한 여러 대신들은 무난하게 국제인 『[[경국대전]]』중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기년복으로 서둘러 복제를 결정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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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윤휴]]·[[허목]]·[[윤선도]]·[[원두표]] 등의 [[남인]]세력은 『[[의례주소]]』참최장을 근거로 [[조선 효종|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장자로 보아야 하며 이에 3년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윤휴]]는 3년복은 말할 것도 없이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가 된다는 입장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삼년복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의례주소』중 장자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사종지설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이 둘째아들로 통을 이은 경우, 곧 '체이부정'에 해당하며 서자(庶子)일 뿐이니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정태화]]가 [[서인]]의 예설을 위험시하였던 것은 [[조선 인조|인조]]의 적자인 [[소현세자]]는 죽고 없지만 [[경안군|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소현세자]]의 [[경안군|막내아들]]은 1656년(효종 7)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에 경안군 [[경안군|이회(慶安君 李檜)]]에 책봉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송시열]]의 예설에 따르면 [[조선 효종|효종]]이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원칙대로라면 [[경안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현종초 [[예송논쟁|기해예송]]으로 인해 왕실의 위험인물로 떠올랐던 [[경안군]]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1665년(현종 6)에 사망하게 된다. 이처럼 [[서인]]의 예설은 현종대 왕실에게 매우 위험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었고 이에 [[정태화]]를 위시한 여러 대신들은 무난하게 국제인 『[[경국대전]]』중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기년복으로 서둘러 복제를 결정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끝난 [[예송논쟁|기해예송]] 하지만 잠재되어있는 논쟁의 불씨====
 
====끝난 [[예송논쟁|기해예송]] 하지만 잠재되어있는 논쟁의 불씨====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대신들은 국제를 내세워 기년복을 결정하였지만 사람들은 [[송시열]]의 예설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 곧 [[서인]]측의 예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장자에게 3년복, 중자에게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고례]](古禮 : 『[[의례주소]]』)이고 장자·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시왕례( 『[[경국대전]]』)인데, 애당초 정한 것은 비록 국가 제도( 『[[경국대전]]』)을 사용하였으나 그 후에 여러 신하들이 쟁론한 것은 [[고례]]를 가지고 논변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년복제에 대하여 ‘3년복을 행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한 것은 중자에게 입던 고례를 따른 것이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실은 국제에 따른 기년복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사림들은 고례에 따른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국제를 내세워 왕실의 혐의를 피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학 원칙을 관철시켜 나갔던 [[서인]] 산림세력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알게 된다. 이처럼 [[예송논쟁|기해예송]]의 결과 복제는 애매한 기년복으로 미봉되었지만 [[조선 현종]]으로 대변되는 조선왕실은 기년복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송논쟁|기해예송]]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으며 1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예송논쟁|갑인예송]]에서 다시 불붙게 된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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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대신들은 국제를 내세워 기년복을 결정하였지만 사람들은 [[송시열]]의 예설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 곧 [[서인]]측의 예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장자에게 3년복, 중자에게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고례]](古禮 : 『[[의례주소]]』)이고 장자·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시왕례( 『[[경국대전]]』)인데, 애당초 정한 것은 비록 국가 제도( 『[[경국대전]]』)을 사용하였으나 그 후에 여러 신하들이 쟁론한 것은 [[고례]]를 가지고 논변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년복제에 대하여 '3년복을 행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한 것은 중자에게 입던 고례를 따른 것이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실은 국제에 따른 기년복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사림들은 고례에 따른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국제를 내세워 왕실의 혐의를 피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학 원칙을 관철시켜 나갔던 [[서인]] 산림세력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알게 된다. 이처럼 [[예송논쟁|기해예송]]의 결과 복제는 애매한 기년복으로 미봉되었지만 [[조선 현종]]으로 대변되는 조선왕실은 기년복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송논쟁|기해예송]]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으며 1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예송논쟁|갑인예송]]에서 다시 불붙게 된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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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갑인예송]]'===
 
====[[인선왕후]]의 죽음과 [[자의대비]] 상복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다.====
 
====[[인선왕후]]의 죽음과 [[자의대비]] 상복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다.====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 이에 대해 [[남인]]이 찬한 『[[현종실록]]』에서는 ‘기해년에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대었는데, 그 뜻은 실상 『[[의례주소]]』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을 서자로 바라본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기년복을 정해 올리자 당시 [[송시열]]의 무리들이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이조판서 [[조형]] 등이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고 하였다. 곧 기해년 효종상시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비록 국제로 표방되었으나 [[서인]]들은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여겼고 같은 선상에서 갑인년 효종비상에서도 예관들이 정한 장자부 기년복을 중자부(서자부) 대공복으로 변개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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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 이에 대해 [[남인]]이 찬한 『[[현종실록]]』에서는 '기해년에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대었는데, 그 뜻은 실상 『[[의례주소]]』에 따라 [[조선 효종|효종]]을 서자로 바라본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기년복을 정해 올리자 당시 [[송시열]]의 무리들이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이조판서 [[조형]] 등이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고 하였다. 곧 기해년 효종상시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비록 국제로 표방되었으나 [[서인]]들은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여겼고 같은 선상에서 갑인년 효종비상에서도 예관들이 정한 장자부 기년복을 중자부(서자부) 대공복으로 변개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남인]] 왜 기년복에서 대공복으로 바뀌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다.====
 
====[[남인]] 왜 기년복에서 대공복으로 바뀌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 [[남인]]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곧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조선 현종|현종]]은 ‘중자가 적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예설을 상고해 올리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기해년 [[윤휴]]·[[허목]]·[[윤선도]]의 예설, 또 이 예설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서인]]들의 예설을 꺾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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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 [[남인]]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곧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조선 현종|현종]]은 '중자가 적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예설을 상고해 올리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기해년 [[윤휴]]·[[허목]]·[[윤선도]]의 예설, 또 이 예설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서인]]들의 예설을 꺾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현종|현종]]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도하다.====
 
====[[조선 현종|현종]]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도하다.====
예관들이 [[예송논쟁|기해예송]]시 [[허목]]의 상소, 또 1666년(현종 7) 같은 맥락에서 [[유세철|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 또 『[[의례주소]]』참최장의 구문을 올리자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조선 현종|현종]]은 『[[의례주소]]』참최 조항중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부른다’는 구문에 근거하여 장자부에 대한 복으로서 대공복이 아니라 기년복으로 고쳐 올릴 것을 명하였다. [[조선 현종|국왕]]이 나서서 [[남인]]측의 예설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조선 현종|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 현종|현종]]은 [[예송논쟁|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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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들이 [[예송논쟁|기해예송]]시 [[허목]]의 상소, 또 1666년(현종 7) 같은 맥락에서 [[유세철|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 또 『[[의례주소]]』참최장의 구문을 올리자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조선 현종|현종]]은 『[[의례주소]]』참최 조항중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부른다'는 구문에 근거하여 장자부에 대한 복으로서 대공복이 아니라 기년복으로 고쳐 올릴 것을 명하였다. [[조선 현종|국왕]]이 나서서 [[남인]]측의 예설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조선 현종|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 현종|현종]]은 [[예송논쟁|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예송논쟁]]직후 [[조선 숙종|숙종]]시기의 상황===
 
===[[예송논쟁]]직후 [[조선 숙종|숙종]]시기의 상황===
이러한 정국의 변화 기류 속에서 갑자기 [[조선 현종|현종]]이 사망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조선 현종|현종]]을 이어 즉위한 14세의 유주(幼主) [[조선 숙종|숙종]]은 [[예송논쟁|갑인예송]]에 대한 부왕의 유지를 이어 [[서인]]의 예론이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유학(幼學) 곽세건(郭世楗) 등의 상소를 통해 정치적인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곽세건은 기해년의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 주장은 [[송시열]]에 의해 창도되었다’며 [[송시열]]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측의 주장에 공감, [[송시열]]의 잘못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곧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이단하(李端夏)]]가 [[조선 현종|현종]]의 행장을 지으면서 복제 개정에 대해 모호하고 소략하게 서술하자 [[조선 숙종|숙종]]은 엄명을 내려 예를 그르친 예관과 대신들을 분명하게 지목해 고쳐 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단하는 이러한 [[서인]] 예설의 주창자인 [[송시열]]에 대해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다(誤引禮經)’고 쓰게 되었다. 이로써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예설의 '잘못(誤)'이 공식화되었고 [[송시열]]은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 유배 직후부터 [[남인]]들 내에서는 고묘(告廟), 즉 예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이 나와 [[송시열]]은 사사될 수도 있는 극히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의 처지에서 상징되듯이 [[서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는 [[남인]]정국이 전격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정권 교체는 숙종대를 점철한 ‘환국(換局) 정치’의 서막으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남인예설이 승리하고 남인정국이 구성되자 [[윤휴]]는 다시 [[조선 현종|현종]]에 대한 [[자의대비|조대비]]의 참최3년복설을 주장하게 된다. 곧 [[자의대비|조대비]]에게는 [[조선 현종|현종]]은 비록 손자이지만 [[조선 현종|현종]]이 왕위에 있었으니 어머니나 할머니라 할지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참최3년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왕에 자신이 주장한 예설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윤휴]]는 왕례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남인예설의 입지점을 다시 한번 [[조선 숙종|숙종]]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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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국의 변화 기류 속에서 갑자기 [[조선 현종|현종]]이 사망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조선 현종|현종]]을 이어 즉위한 14세의 유주(幼主) [[조선 숙종|숙종]]은 [[예송논쟁|갑인예송]]에 대한 부왕의 유지를 이어 [[서인]]의 예론이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유학(幼學) 곽세건(郭世楗) 등의 상소를 통해 정치적인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곽세건은 기해년의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 주장은 [[송시열]]에 의해 창도되었다'며 [[송시열]]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측의 주장에 공감, [[송시열]]의 잘못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곧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이단하(李端夏)]]가 [[조선 현종|현종]]의 행장을 지으면서 복제 개정에 대해 모호하고 소략하게 서술하자 [[조선 숙종|숙종]]은 엄명을 내려 예를 그르친 예관과 대신들을 분명하게 지목해 고쳐 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단하는 이러한 [[서인]] 예설의 주창자인 [[송시열]]에 대해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다(誤引禮經)'고 쓰게 되었다. 이로써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예설의 '잘못(誤)'이 공식화되었고 [[송시열]]은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 유배 직후부터 [[남인]]들 내에서는 고묘(告廟), 즉 예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이 나와 [[송시열]]은 사사될 수도 있는 극히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의 처지에서 상징되듯이 [[서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는 [[남인]]정국이 전격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정권 교체는 숙종대를 점철한 '환국(換局) 정치'의 서막으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남인예설이 승리하고 남인정국이 구성되자 [[윤휴]]는 다시 [[조선 현종|현종]]에 대한 [[자의대비|조대비]]의 참최3년복설을 주장하게 된다. 곧 [[자의대비|조대비]]에게는 [[조선 현종|현종]]은 비록 손자이지만 [[조선 현종|현종]]이 왕위에 있었으니 어머니나 할머니라 할지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참최3년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왕에 자신이 주장한 예설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윤휴]]는 왕례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남인예설의 입지점을 다시 한번 [[조선 숙종|숙종]]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서인]]·[[남인]]의 학풍 차이로 바라본 예송논쟁===
 
===[[서인]]·[[남인]]의 학풍 차이로 바라본 예송논쟁===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세기 조선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학파의 차이는 정파의 차이로 이어졌기에 정파간의 대립에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성향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서인]]이 성리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순정성리학풍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남인]]의 경우는 성리학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교의 원류인 [[육경고학|육경고학(六經古學)]]을 추구하는 탈성리학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예학의 차이, 또 양차 예송시 예설의 차이로 드러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차 예송에서 [[서인]]이나 [[남인]]들은 모두 고례인 『[[의례주소]]』에 입론하였지만 그 중에서 양측이 착목한 구문이 달랐다. 양측의 예학적 입지점이 달랐기 때문에 꼭같이 고례를 참고하면서도 착목한 예설이 달랐던 것인데, 가장 주요한 입지점으로서 사례(士禮) 및 왕례(王禮)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곧 [[서인]]측은 사례와 왕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천하동례론|천하동례론(天下同禮論)]]’의 입장이었고 [[남인]]측은 왕례는 사례와 다른 특수한 예로 사례 너머에 존재한다는 [[왕자례부동사서론|왕자례부동사서론(王子禮士庶不同論)]]’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하동례론]]’이 송대 사대부층의 계층적 입장을 반영한 성리예학의 주된 경향중 하나였다면, [[왕자례부동사서론]]’는 고대 막강했던 왕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육경고학적 예학의 주된 경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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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세기 조선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학파의 차이는 정파의 차이로 이어졌기에 정파간의 대립에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성향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서인]]이 성리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순정성리학풍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남인]]의 경우는 성리학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교의 원류인 [[육경고학|육경고학(六經古學)]]을 추구하는 탈성리학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예학의 차이, 또 양차 예송시 예설의 차이로 드러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차 예송에서 [[서인]]이나 [[남인]]들은 모두 고례인 『[[의례주소]]』에 입론하였지만 그 중에서 양측이 착목한 구문이 달랐다. 양측의 예학적 입지점이 달랐기 때문에 꼭같이 고례를 참고하면서도 착목한 예설이 달랐던 것인데, 가장 주요한 입지점으로서 사례(士禮) 및 왕례(王禮)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곧 [[서인]]측은 사례와 왕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천하동례론|천하동례론(天下同禮論)]]'의 입장이었고 [[남인]]측은 왕례는 사례와 다른 특수한 예로 사례 너머에 존재한다는 '[[왕자례부동사서론|왕자례부동사서론(王子禮士庶不同論)]]'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하동례론]]'이 송대 사대부층의 계층적 입장을 반영한 성리예학의 주된 경향중 하나였다면, '[[왕자례부동사서론]]'는 고대 막강했던 왕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육경고학적 예학의 주된 경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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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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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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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 Vol 26, 2012, 57-79쪽.  
 
**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 Vol 26, 2012, 57-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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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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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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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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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7일 (화) 23:00 판

예송논쟁(禮訟論爭)
대표명칭 예송논쟁
한자표기 禮訟論爭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659년(기해예송), 1674년(갑인예송)
관련인물 효종 현종 숙종 송시열 허목
관련단체 남인 서인



정의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내용

예송논쟁이 일어난 원인

  •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1]

에송논쟁일어나다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기해예송'

  •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尹鑴)는 『의례주소(儀禮註疏)』「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體)이나 長子(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3]
  •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재최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 본인은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4]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

  • 1674년(현종 15) 2월 현종의 어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5]
  • 유학(幼學) 도신징(都愼徵)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남인의 예설중 귀왕적(歸王的) 성향의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현종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 가게 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기해예송 예송논쟁 A는 B에 포함된다 1659년
갑인예송 예송논쟁 A는 B에 포함된다 1674년
예송논쟁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서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현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소현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경안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인선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김수흥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정태화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천하동례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왕자례부동사서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고산유고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인 허목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윤휴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윤선도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송시열 A는 B를 포함한다
서인 김수흥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왕자례부동사서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인 천하동례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자의대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인조 자의대비 A는 B의 남편이다
효종 인선왕후 A는 B의 남편이다
효종 현종 A는 B의 아버지다
인선왕후 현종 A는 B의 어머니다
인조 소현세자 A는 B의 아버지다
소현세자 경안군 A는 B의 아버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59년 기해예송이 일어났다
1674년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주석

  1. 지두환, "예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 Vol 26, 2012, 57-79쪽.
    • 장세호,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韓國思想과 文化』, Vol 76, 2015, 205-228쪽.

유용한 정보

  • 지두환, "예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