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영암 도갑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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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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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갑사 자리에는 먼저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고 어린 시절을 문수사에서 보낸 도선국사가 나중에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은 후 도갑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고려 때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를 누렸다고 하며, 조선 세조 3년(1457)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중건했다. 성종 4년(1473)에 중수한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영조 52년(1776)에 다시 중수했다. 근래에도 한국전쟁과 실화 등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해남 대둔사의 말사이며 경내에 해탈문을 비롯하여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과 요사채 등 건물이 있고 수미왕사비와 도선수미비, 석조여래좌상, 오층석탑과 석조 등이 있다. -답사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전기 1456년(세조 2) 수미(守眉)가 중건하였다. 조선 세조 3년(1473년) 신미, 수미 두 왕사가 중창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총 규모가 966칸에 소속된 암자가 12개나 되었으며, 상주한 승려 수가 730명에 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도 대웅전 뒤 천여 평의 빈터에는 주춧돌이 선명하게 군데군데 박혀 있고, 앞뜰에는 5m에 달하는 스님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크기가 도갑사의 옛 사세와 승려수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구석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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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에 [[도선|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갑사 자리에는 먼저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고 어린 시절을 문수사에서 보낸 [[도선]]이 나중에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은 후 도갑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고려 때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를 누렸다고 하며, 조선 [[세조]] 3년(1457) [[수미|수미(守眉)]]대사와 [[신미|신미(信眉)]]대사가 중건했다. [[성종]] 4년(1473)에 중수한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영조]] 52년(1776)에 다시 중수했다. 근래에도 한국전쟁과 실화 등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해남 대흥사|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며 경내에 해탈문을 비롯하여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과 요사채 등 건물이 있고 [[영암 도갑사 수미왕사비|수미왕사비]]와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도선수미비]],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 [[영암 도갑사 오층석탑|오층석탑]]과 [[영암 도갑사 석조|석조]] 등이 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49&cid=42840&categoryId=42849 도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3일.</ref> 도갑사는 966칸의 드넓은 사찰로 1,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생활을 하고 부속 암자의 숫자만도 열두 곳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승려 없는 빈 터만을 남기고 있었던 조선 초기의 상황이니 당시 이곳의 규모와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만드는 이야기다.<ref>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339&cid=42865&categoryId=42865 도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3일.</ref>
그 뒤 1456년(세조 2) 신미(信眉)수미(守眉)가 중건하여 전부 966칸에 달하는 당우가 들어섰으며, 부속암자로 상동암(上東庵)·하동암·남암(南庵)·서부도암(西浮屠庵)·동부도암·미륵암(彌勒庵)·비전암(碑殿庵)·봉선암(鳳仙庵)·대적암(大寂癌)·상견암(上見庵)·중견암·하견암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점차 옛 전각에 대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명부전(冥府殿)·미륵전(彌勒殿)·국사전(國師殿)·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민백
 
  
 
===='''전해지는 이야기'''====
 
===='''전해지는 이야기'''====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79 도갑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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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 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479 도갑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ref>
  
 
=='''동영상'''==
 
=='''동영상'''==

2017년 4월 13일 (목) 17:43 판


영암 도갑사
(靈巖 道岬寺)
대표명칭 영암 도갑사
한자 靈巖 道岬寺
주소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문화재 지정일 1984년 02월 29일
소유자 도갑사
관리자 도갑사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신라시대
창건자 도선
경내문화재 영암 도갑사 해탈문,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영암 도갑사 목조문수·보현동자상,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 영암 도갑사 석조, 영암 도갑사 오층석탑, 영암 도갑사 수미왕사비, 영암 도갑사 석장승, 도갑사 수미왕사진영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의 말사이다.[1]

개요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갑사 자리에는 먼저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고 어린 시절을 문수사에서 보낸 도선이 나중에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은 후 도갑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고려 때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를 누렸다고 하며, 조선 세조 3년(1457)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중건했다. 성종 4년(1473)에 중수한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영조 52년(1776)에 다시 중수했다. 근래에도 한국전쟁과 실화 등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며 경내에 해탈문을 비롯하여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과 요사채 등 건물이 있고 수미왕사비도선수미비, 석조여래좌상, 오층석탑석조 등이 있다.[2] 도갑사는 966칸의 드넓은 사찰로 1,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생활을 하고 부속 암자의 숫자만도 열두 곳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승려 없는 빈 터만을 남기고 있었던 조선 초기의 상황이니 당시 이곳의 규모와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만드는 이야기다.[3]

전해지는 이야기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 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4]

동영상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99년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845년 낭혜가 오합사의 주지가 되어 크게 중창하였다.
신라 문성왕 때 오합사에서 성주사로 개명되었다.
888년 낭혜가 성주사에서 입적하였다.
임진왜란기 보령 성주사 건물이 크게 소실되었다.
1984년 사적 제 307호로 지정되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암 도갑사 해탈문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목조문수·보현동자상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수미왕사비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오층석탑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석조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석장승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수미왕사진영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수미왕사비 수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 도선, 수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 이경석, 이수인, 정두경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 오준 A는 B가 비문을 썼다
도선 영암 도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주석

  1. "도갑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2010. 온라인 참조: "도갑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3일.
  3.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도갑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3일.
  4. "도갑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