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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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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8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선종의 대찰로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道義)가 중국의 당으로 유학갔다가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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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8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선종|선종(禪宗)]]의 대찰로 신라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도의(道義)]]가 중국의 당으로 유학갔다가 821년([[신라 헌덕왕|헌덕왕]] 13)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이다.
 
또한 이 사찰에서 염거화상(廉居和尙), 지눌 등이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으며 일연(一然)도 이곳에서 체발득도(剃髮得道)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세조 때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폐사 시기가 《범우고(梵宇攷)》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16세기경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사찰에서 염거화상(廉居和尙), 지눌 등이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으며 일연(一然)도 이곳에서 체발득도(剃髮得道)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세조 때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폐사 시기가 《범우고(梵宇攷)》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16세기경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사회 혼란기에 도적떼가 설악산 권금성(權金城)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흥사와 진전사를 노략질하여 결국 폐사되었다고 한다. 진전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전에 도적굴이었다는 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사회 혼란기에 도적떼가 설악산 권금성(權金城)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흥사와 진전사를 노략질하여 결국 폐사되었다고 한다. 진전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전에 도적굴이었다는 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1974∼1979년 6차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했는데, 절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연화무늬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석조 부도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때 훼손·방치되었다가 1962년 2월 28일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후 1968년 4월 복원되었다. 같은 연대의 부도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8073 양양 진전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1974∼1979년 6차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했는데, 절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연화무늬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석조 부도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때 훼손·방치되었다가 1962년 2월 28일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후 1968년 4월 복원되었다. 같은 연대의 부도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8073 양양 진전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강원도 기념물 제52호.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첫 조사(祖師) 도의(道義)가 창건한 절이다. 원적선사(元寂禪師)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맥을 이어 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였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선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이곳 설악산으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도의선사의 사상은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로 이어진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선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이곳 설악산으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도의선사의 사상은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로 이어진다.
그 뒤 일연(一然)이 1219년(고종 6)에 이 절에 들어와서 장로(長老)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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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일연(一然)이 1219년(고종 6)에 이 절에 들어와서 장로(長老)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ref>신종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659 양양 진전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현재 절터에는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제439호)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서 도괴되고 사리장치가 약탈된 것을 1968년에 복원한 것이다.<ref>신종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659 양양 진전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초조(初祖)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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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진전사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는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ref>이지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62 진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지장(地藏)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사람들이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진전사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1기와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 있으며, 절터는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ref>이지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62 진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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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520000,32 양양 진전사지]",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520000,32 양양 진전사지]",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사지의 복원===
 
===사지의 복원===
2005년 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ref>이지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62 진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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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절터로 남아있는 이 절은 1982년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졌다. 2005년 [[양양 진전사지|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ref>이지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62 진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7월 14일 (금) 14:27 판

양양 진전사
(襄陽 陳田寺)
대표명칭 양양 진전사
한자 襄陽 陳田寺
주소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1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기념물 제52호
문화재 지정일 1982년 11월 3일
소유자 양양 진전사
관리자 양양군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통일신라
창건자 도의(道義)
경내문화재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襄陽 陳田寺址 三層石塔)



정의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위치한 사찰이다.

내용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8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선종(禪宗)의 대찰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道義)가 중국의 당으로 유학갔다가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이다. 또한 이 사찰에서 염거화상(廉居和尙), 지눌 등이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으며 일연(一然)도 이곳에서 체발득도(剃髮得道)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세조 때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폐사 시기가 《범우고(梵宇攷)》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16세기경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사회 혼란기에 도적떼가 설악산 권금성(權金城)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흥사와 진전사를 노략질하여 결국 폐사되었다고 한다. 진전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전에 도적굴이었다는 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1974∼1979년 6차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했는데, 절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연화무늬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석조 부도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때 훼손·방치되었다가 1962년 2월 28일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후 1968년 4월 복원되었다. 같은 연대의 부도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1]

당시 신라 사회에서 선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이곳 설악산으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도의선사의 사상은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로 이어진다. 그 뒤 일연(一然)이 1219년(고종 6)에 이 절에 들어와서 장로(長老)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2]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진전사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는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3]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4]

사지의 복원

현재 절터로 남아있는 이 절은 1982년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졌다. 2005년 진전사지에 진전사가 복원되었고, 2009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양양 진전사지 A는 B에 있다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양양 진전사지 A는 B에 있다
도의 양양 진전사 A는 B를 창건하였다
도의 양양 진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도의 A는 B를 위한 비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2005년 양양 진전사지진전사가 복원되었다
2009년 양양 진전사가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답사 후 추가예정

영상

주석

  1. "양양 진전사지", 『두산백과』online.
  2. 신종원, "양양 진전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지수, "진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양양 진전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5. 이지수, "진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