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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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2일 (목) 17:01 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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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
작가 손수광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설명

해당 작품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민영환은 조선왕조 고종때의 문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의정 대신 조병세(趙秉世)와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하였다.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두 통이 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로,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다른 한 통의 유서는 고종 황제에게 올린 글이다.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실제 그가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김우현 목사의 증언과 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민영환은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실제로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은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민영환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시종무관 어담(魚潭)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고,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 의해 당시 조계사 뒤편에 있었던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에 묘사된 승려와 마당의 석등[1] 등을 고려하였을 때 그림 속 장소는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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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
민족기록화 작품 시각화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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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소재 작품

관련항목

노드 관계 노드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에 의해 그려지다 손수광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에 소장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소재로 삼다 민영환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배경으로 하다 민영환 자결터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제작연도 1976년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국립현대미술관 대여기간 1979.01.08 ~ 1992.01.07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독립기념관 이전 연도 1998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前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37.4312234 127.0182276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現 소장처 독립기념관 36.7835383 127.2210151

그래프

참고문헌

  • 민영환 고증 오류 관련 문헌

1.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 :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오전 5시경에 급사로부터 작야(昨夜) 민씨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 민씨저(閔氏邸)로 뛰어갔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 곧 교자에서 이불에 쌓인 유해를 모셔내어 침실로 옮겼다. 언뜻 얼굴을 보니 옆으로 두 치 정도의 구멍이 난 목줄기로부터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딱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다음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작은 칼을 풀어내고 의복을 벗기니 일(一)자로 할복하고 있었다. 칼을 만져보니 손톱 깎기에 쓰는 퍽 작은 칼로서 깊이 찌를 수 없었기에 다시 상처 위로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칼질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의복의 양 무릎에 좌우 손을 닦은 듯한 핏자욱이 묻어 있는데, 생피가 찐덕찐덕하여 작은 칼을 쓰기 어렵게 되자 좌우 손으로 칼을 바꿔 쥐어가며 한 손의 피를 무릎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같이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목구멍을 옆으로 끊어 젖힌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

2.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2017년 3월 2일 확인)

...그러나 당시 자결장소인 이완식의 집에 글공부하러드나들던 김우현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 또 유서를 남길 마땅한 지필묵이 없어 손바닥크기의 종이에 유서를 남겼고 자결에 사용한 칼도 粧刀(장도)여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는 것. 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3.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의 회고 : 김태완,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2015.10.06(2017년 3월 2일 확인)

"1905년 11월 4일 새벽 할아버지는 자택(서울 종로구 계동 133번지)으로 가시지 않고 청지기 집엘 갔었어요. 집에 어머니(증조모)와 가족이 있으니까 자결 장소를 청지기 집으로 택한 겁니다. 그곳에서 각국 공사에게 (을사늑약 파기를)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주석

  1.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