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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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새벽 전동 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순절 후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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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먼저 수일 동안 소두로 활약하느라 약해진 몸을 추스르게 위해 전동에 있는 회화 나뭇골, 지금의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았다. 이때 민영환은 정부 사정과 국내 정세를 생각하며 새로운 구국의 길을 구상하였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고 해서 성과를 거두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그들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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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민영환 자결터|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으로 돌아와서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에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 11월 30일 아침 6시경에 아무도 모르게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여 순절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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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 후 [[민영환|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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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먼저 수일 동안 소두로 활약하느라 약해진 몸을 추스르게 위해 전동에 있는 회화 나뭇골, 지금의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았다. 이때 민영환은 정부 사정과 국내 정세를 생각하며 새로운 구국의 길을 구상하였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고 해서 성과를 거두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그들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1월 29일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이완식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에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 11월 30일 아침 6시경에 아무도 모르게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여 순절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2017년 2월 28일 (화) 10:40 판

고증잘못되었음-> 네이버 라이브러리에서 찾을 수 있음.
경술국치라는 사건, 민영환이라는 인물, 민비와 어떤 인척이고, 어떤 관직을 역임했고...
우리가 이건 재밌는 관계다 라는걸 찾아내는데 의미있는거고, 우리가 재미있으면 다른 이에게도 재미있어.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
작가 손수광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설명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민영환을사조약에 따른 일제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항거하여 자결하는 모습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또한 그는 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으며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고 한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과 1897년 영국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파견되어 서구 여러 나라들을 시찰한 뒤, 개화·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립협회 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1898년 이후 의정부 참정대신·원수부 회계국총장·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을 받아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조병세를 소두로 백관들과 연명으로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조병세가 구금된 뒤 자신이 소두가 되어 재차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민영환은 먼저 수일 동안 소두로 활약하느라 약해진 몸을 추스르게 위해 전동에 있는 회화 나뭇골, 지금의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았다. 이때 민영환은 정부 사정과 국내 정세를 생각하며 새로운 구국의 길을 구상하였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고 해서 성과를 거두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그들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1월 29일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으로 돌아와서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에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튿날 11월 30일 아침 6시경에 아무도 모르게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여 순절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순절 후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4583&cid=49352&categoryId=49352


그림에서는 자결한 민영환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나 창백한 얼굴 빛으로 보아 절명한 후로도 몇 시간이 흐른 뒤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민영환의 왼손 밑부분이 그가 이용한 작은 칼이 그려져 있다.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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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록화 작품 시각화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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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노드 관계 노드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에 의해 그려지다 손수광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소재로 삼다 민영환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소재로 삼다 민영환 유서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을 배경으로 한다 이완식 집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제작연도 1976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