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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수환, 「조선전기의 司饔院」, 『韓國史學報』 3ㆍ4호, 고려사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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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7일 (월) 23:07 판

틀:관서정보

정의

조선시대 대궐의 식사 공급을 관장하고, 의례에 식기 등의 물품을 진설하고 보관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이다.[1]

내용

업무

이조에 속한 아문으로 조선 초기에는 사옹방(司饔房)으로 대전, 왕비전, 세자전에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사옹방은 계절에 따라 과일이나 농산물을 사당이나 제단에 올려 차례를 지내거나 지방 특산물을 에게 진상하는 것을 관장하였고, 녹관은 없었다.[2] 식사와 관련된 그릇 및 도구의 관리도 사옹원에서 담당하였다.[3] 1467년(세조 13) 사옹원으로 개편되어 녹관을 두었다.[4] 사옹원문소전(文昭殿)[5]천신(薦新)[6]도 관장하였다.[7] 1882년(고종 19) 내자시(內資寺)[8]가 폐지된 뒤에는 내자시의 업무도 담당했다.[9]

구성

실직으로 1인, 첨정 1인, 판관 1인, 주부 1인, 직장 2인, 봉사 3인, 참봉 3인 등이 있었다. 자문직으로 도제조 1인, 제조 4인, 부제조 5인이고, 1인은 승지가 겸임하였으며 제거(提擧)·제검(提檢)을 합쳐 4인을 두었다. 잡직으로는 재부 1인, 선부 1인, 조부 2인, 임부 2인, 팽부 7인을 두었다.[10] 영조 때에 판관 1인을 줄이고 주부 1인을 늘렸으며 참봉을 없앴다. 가례(嘉禮)때 차출되었고 제거제검객사에 잔치를 베풀 때 차출되었다. 정조주부 2인이 늘고, 더 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11] 1882년(고종 19) 직장봉사를 모두 없애고 주부별제를 두었다.[1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 내용
1392년 사옹방이 설치되었다
1467년 사옹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經國大典』 卷1,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司饔院’
  2. 송수환, 「조선전기의 司饔院」, 『韓國史學報』 3ㆍ4호, 고려사학회, 1998, 124~134쪽
  3.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4월 2일 갑오 2번째 기사, '상왕이 행차에 필요한 그릇에 대하여 명하다.'
  4.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4월 4일 기해 4번째 기사, '사옹방을 고쳐 사옹원이라 하고 녹관을 두다.'
  5. 문소전(文昭殿): 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신 사당. 1433년(세종 15)에 태조태종의 위패를 모셨다. 명종때 폐지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소전
  6. 천신(薦新): 사직(社稷)이나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햇과일이나 햇곡식으로 제사지내는 의식이다.한국 민족문화대백과 천신
  7. 『예종실록』 4권, 예종 1년 3월 29일 계축 2번째 기사, '사옹원에서 관장하는 문소전의 천신을 검찰하는 조건을 예조에서 아뢰다.'
  8. 내자시(內資寺): 조선시대 왕실에서 쓰이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자시
  9.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12월 29일 신사 4번째 기사, ‘감생청에서 감생 별단을 올리다.’
  10. 『經國大典』 卷1,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司饔院’
  11. 『大典會通』 卷1,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司饔院’
  12. 『增補文獻備考』 卷222, 「職官考」 9, <諸司>, “司饔院”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세조실록』
  • 『예종실록』
  • 『고종실록』
  • 『경국대전』
  • 『증보문헌비고』
  • 『대전회통』
  • 송수환, 「조선전기의 司饔院」, 『韓國史學報』 3ㆍ4호, 고려사학회, 1998.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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