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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4657 북로군정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4657 북로군정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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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1일 (화) 22:17 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대표명칭 북로군정서
한자표기 北路軍政署
유형 독립운동단체
창립자 서일,현천묵,계화,이장녕
창립시대 현대
창립일 1919년 12월


정의

1919년 북간도에서 결성되었고, 청산리 대첩에서 크게 활동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내용

조직과 명칭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 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었다. 1919년 8월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독립 투쟁을 본격화하자 대한정의단은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박찬익(朴贊翊) 등이 활동하고 있는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결합하여 1919년 10월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그러나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위를 인정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서 공인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는 '군정부'라는 명칭을 '군정서'로 개칭하는 조건으로 이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군정부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서간도 지역에 서로군정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북로군정서로 불리게 되었다.[1]

훈련과 편성

북로군정서는 만주 왕청현(汪淸縣)의 숲속에 근거지를 두고 8동의 군 막사를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교관은 신흥무관학교에 요청하여 이범석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인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강화린(姜華麟) 등을 지원받고, 학생들은 주변의 주민 출신과 국내에서 들어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속성과를 주로 하여 정신교육, 군사학, 부대 지휘법 등을 가르쳤다. 군사훈련 외에 다른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계하여 만주나 노령(러시아 영토)에 산재한 독립운동가들이나 조직의 연락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1개 소대를 50명씩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대대로 편성하였다. 병력규모는 초기에는 500여 명이던 것이 1920년 8월에는 1,600명이 넘었다. 부대 운영이나 무기 구입에 사용되는 자금은 관내 주민들이나 국내로부터 조달되는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2]

청산리대첩

한국 독립군의 세력이 날로 확대되자 일본은 1920년 10월 러시아에 주둔하는 군대까지 동원해 독립군 진영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낌새를 눈치 챈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도독부 등은 산악 안전지대를 통해 백두산으로 이동하다 10월 16일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던 룽징(龍井)촌에서 서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청산리(靑山理) 어귀 허룽(和龍)현 삼도구(三道溝)에서 만나 합동 작전회의를 벌였다.
그 결과 연합군을 3개 연대로 편성하고 청산리 일대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기로 결정했다. 홍범도대한독립군 6개 중대(제1연대)와 김좌진북로군정서 2개 대대(제2연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도독부 6개 중대 병력(제3연대)은 산악지역에 매복해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명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10여 차례 전투에서 연합 독립군은 대승을 거뒀다. 바로 청산리대첩이다.[3]

자유시사변

그 뒤 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해 이동해 온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여 안전지대인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혁명을 치른 소련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자유시사변).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 등은 흩어진 부대들을 모아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재건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대규모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지는 못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북로군정서 서일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북로군정서 김좌진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북로군정서 청산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북로군정서를 승인하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북로군정서",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북로군정서", 『doopedia』online, 두산백과.
  3.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신재홍, "북로군정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북로군정서",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북로군정서",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신재홍, "북로군정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