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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東夷族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渤海灣 일대에서 長春·農安지방으로 이동해서 부여를 건국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371) 그러나 건국전설을 보면 오히려 북방계통의 그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북쪽에서부터 송화강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에 의해서 부여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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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서씨]](徐氏)
  
 기원전 1세기 중엽 후한 때의 학자 王充이 지은≪論衡≫吉驗篇이나≪魏略≫逸文에 의하면 이른바 동명신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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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이족]]東夷族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渤海灣 일대에서 長春·農安지방으로 이동해서 부여를 건국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건국전설을 보면 오히려 북방계통의 그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북쪽에서부터 송화강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에 의해서 부여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 북방에 橐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掩淲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고로 北夷에 夫餘國이 있게 되었다(≪論衡≫吉驗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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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중엽 후한 때의 학자 王充이 지은≪論衡≫吉驗篇이나≪魏略≫逸文에 의하면 이른바 동명신화는 다음과 같다.
  
 이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는 東明으로 그는 본래 北夷 橐離372)국왕의 시녀가 日光에 감응하여 출생한 자로서, 성장하면서 神異한 바가 많았으므로 왕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掩淲水373)를 건너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건국자가 일광에 의해 感情出生했다고 하는 몽고·만주에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感精型’ 신화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또한 물고기와 자라떼가 다리를 이루어 大河를 건너게 했다는 설화상의 모티브는 북방의 풍토374)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상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의 등을 다리로 해서 바다나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특히 북아시아의 어렵·수렵 제민족 사이에 많이 있었던 것으로, 북아시아지역에서는 얼음이 어는 겨울이 가장 교통이 편리한 때인데, 봄이 되면 얼음이 녹아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풍토 속에서 생겨났음직한 설화로 생각된다.375) 결국 동명신화는 부여와 고구려인이 북아시아의 풍토적 현상을 배경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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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북방에 橐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掩淲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고로 北夷에 夫餘國이 있게 되었다(≪論衡≫吉驗篇).
  
 이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고리국(탁리국)에서 엄표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하여 도읍을 정하였다는 이른바 부족의 이주전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시조를 정복족장으로서 天帝의 아들이나 日月의 아들로 여기고, 자기들을 天神族 또는 신성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 이래 신라의 석탈해·박혁거세설화나 가야의 김수로왕설화에도 보인다. 이들 설화의 기본 내용은 유이민 출신이 왕이 되고 왕비는 대개 토착족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인데, 시기상 대개 고대국가 초기 단계의 국가건설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376) 부여의 동명설화도 동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고리국에서의 세력갈등을 피하여 남하·망명함에 따라 송요평원의 先住 濊族들이 이들 동명집단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부여의 건국자들은 ‘고리’라고 이름하는 송화강 북쪽 어느 곳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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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는 동명東明으로 그는 본래 北夷 橐離)국왕의 시녀가 日光에 감응하여 출생한 자로서, 성장하면서 神異한 바가 많았으므로 왕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掩淲水)를 건너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건국자가 일광에 의해 感情出生했다고 하는 몽고·만주에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感精型’ 신화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또한 물고기와 자라떼가 다리를 이루어 大河를 건너게 했다는 설화상의 모티브는 북방의 풍토)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상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의 등을 다리로 해서 바다나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특히 북아시아의 어렵·수렵 제민족 사이에 많이 있었던 것으로, 북아시아지역에서는 얼음이 어는 겨울이 가장 교통이 편리한 때인데, 봄이 되면 얼음이 녹아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풍토 속에서 생겨났음직한 설화로 생각된다.) 결국 동명신화는 부여와 고구려인이 북아시아의 풍토적 현상을 배경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제1송화강과 제2송화강이 만나 이루는 嫩江지역이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했음이 주목된다. 松嫩平原, 즉 黑龍江省의 三肇지구(肇源·肇州·肇東)와 눈강 이서지방인 길림성의 扶餘·前郭·大安·鎭賚와 乾安 등은 西周시대 이래 白金寶377)·漢書378)·望海屯379) 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 문화유형은 시기상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로 구분이 되지만 동일한 문화계열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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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고리국(탁리국)에서 엄표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하여 도읍을 정하였다는 이른바 부족의 이주전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시조를 정복족장으로서 天帝의 아들이나 日月의 아들로 여기고, 자기들을 天神族 또는 신성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 이래 신라의 석탈해·박혁거세설화나 가야의 김수로왕설화에도 보인다. 이들 설화의 기본 내용은 유이민 출신이 왕이 되고 왕비는 대개 토착족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인데, 시기상 대개 고대국가 초기 단계의 국가건설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여의 동명설화도 동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고리국에서의 세력갈등을 피하여 남하·망명함에 따라 송요평원의 先住 濊族들이 이들 동명집단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부여의 건국자들은 ‘고리’라고 이름하는 송화강 북쪽 어느 곳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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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제1송화강과 제2송화강이 만나 이루는 嫩江지역이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했음이 주목된다. 松嫩平原, 즉 黑龍江省의 三肇지구(肇源·肇州·肇東)와 눈강 이서지방인 길림성의 扶餘·前郭·大安·鎭賚와 乾安 등은 西周시대 이래 白金寶)·漢書)·望海屯) 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 문화유형은 시기상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로 구분이 되지만 동일한 문화계열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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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중국 동북지방 고대문화 분포도
 
<그림 1>중국 동북지방 고대문화 분포도
 춘추시대 이전으로 비정되는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의 경우 반지하식 주거지와 土壙竪穴式 매장을 특징으로 하며 三足器(鼎·鬲)·항아리(壺)·물동이(盆·罐)·잔(杯) 등의 단단한 토기와, 돌도끼·돌칼 등 많은 마제석기와 일정 수의 골기도 사용하였다. 이는 경제생활에서 농업과 목축을 병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연대가 이미 戰國에서 西漢시대에 이르며, 분포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다.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해주며, 한서 上層遺址에서는 비록 청동단검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이 지역에서도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380) 製陶業도 상당히 발전하여 생활용구와 생산공구가 모두 반출되고 있으며, 그 중에 彩繪와 紅陶가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철기도 나오는데 주로 구멍이 있는 斧와 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甲片 등의 존재는 군사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 비늘과 토제 그물추의 대량 존재는 어렵이 발달하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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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 이전으로 비정되는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의 경우 반지하식 주거지와 土壙竪穴式 매장을 특징으로 하며 三足器(鼎·鬲)·항아리(壺)·물동이(盆·罐)·잔(杯) 등의 단단한 토기와, 돌도끼·돌칼 등 많은 마제석기와 일정 수의 골기도 사용하였다. 이는 경제생활에서 농업과 목축을 병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연대가 이미 戰國에서 西漢시대에 이르며, 분포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다.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해주며, 한서 上層遺址에서는 비록 청동단검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이 지역에서도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380) 製陶業도 상당히 발전하여 생활용구와 생산공구가 모두 반출되고 있으며, 그 중에 彩繪와 紅陶가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철기도 나오는데 주로 구멍이 있는 斧와 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甲片 등의 존재는 군사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 비늘과 토제 그물추의 대량 존재는 어렵이 발달하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중국 한족의 선진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고 그 연대가 서한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문화를 담당한 족속은 당시 송눈평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여족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382) 다만 그것을 부여 조기문화로 보느냐,383) 아니면 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고리국’의 문화로 보느냐의384)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헌에서 보면 예맥족이 하나의 단일한 종족명으로 등장한 것은 대개 춘추시대 이후의 일이다.385) 그런데 백금보-한서 하층문화는 춘추시기보다 빠르고, 비록 다같은 예맥족의 문화이기는 하지만 눈강 이남의 吉林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한 서단산문화386)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어, 백금보문화는 貊人의 문화이고 서단산문화는 濊人의 문화로 보기도 한다.387) 이 주장은 백금보-한서 하층문화가 하가점 상층문화와 유사함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대개 하가점 상층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東胡族 계통 외에 貊族 계통도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이 청동기시대에 북쪽 초원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설388)을 염두에 둘 때 이 주장은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하가점 상층문화와 백금보문화 및 遼寧 동북부의 문화들이 매우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을 동일유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동호·산융·예맥 등 諸族이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그 원류를 따진다면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해주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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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많은 유물이 중국 한족의 선진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고 그 연대가 서한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문화를 담당한 족속은 당시 송눈평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여족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다만 그것을 부여 조기문화로 보느냐,383) 아니면 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고리국’의 문화로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헌에서 보면 [[예맥족]]이 하나의 단일한 종족명으로 등장한 것은 대개 춘추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백금보-한서 하층문화는 춘추시기보다 빠르고, 비록 다같은 예맥족의 문화이기는 하지만 눈강 이남의 吉林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한 서단산문화)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어, 백금보문화는 貊人의 문화이고 서단산문화는 濊人의 문화로 보기도 한다) 이 주장은 백금보-한서 하층문화가 하가점 상층문화와 유사함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대개 하가점 상층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동호족東胡族 계통 외에 맥족貊族 계통도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이 청동기시대에 북쪽 초원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을 염두에 둘 때 이 주장은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하가점 상층문화와 백금보문화 및 遼寧 동북부의 문화들이 매우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을 동일유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동호·산융·예맥 등 諸族이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그 원류를 따진다면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해주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389)
  
 어쨌든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그 시기가 부여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는≪사기≫단계보다는 빠르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부여 이전의 부여와 관련된 종족이나 국가의 문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지역이 송화강 중하류와 눈강 하류 일대에 주로 분포하므로 이는 북부여의 先世인 濊貊族 중 한 支派의 문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백금보-망해둔문화 이남 지역에 분포하는 서단산문화가 문화특성상 그 위 지역의 문화와 차이점을 보이다가, 기원전 4∼3세기를 전후하여 토광목곽묘와 중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물이 나오는 등 두 문화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논형≫에 나오는 부여 건국설화와 부합하는 면이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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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그 시기가 [[부여]]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는≪사기≫단계보다는 빠르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부여 이전의 [[부여]]와 관련된 종족이나 국가의 문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지역이 송화강 중하류와 눈강 하류 일대에 주로 분포하므로 이는 북부여의 先世인 濊貊族 중 한 支派의 문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백금보-망해둔문화 이남 지역에 분포하는 서단산문화가 문화특성상 그 위 지역의 문화와 차이점을 보이다가, 기원전 4∼3세기를 전후하여 토광목곽묘와 중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물이 나오는 등 두 문화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논형≫에 나오는 부여 건국설화와 부합하는 면이 많다고 본다.

2023년 8월 26일 (토) 10:50 판

몽고서씨(徐氏)

부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이족東夷族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渤海灣 일대에서 長春·農安지방으로 이동해서 부여를 건국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건국전설을 보면 오히려 북방계통의 그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북쪽에서부터 송화강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에 의해서 부여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1세기 중엽 후한 때의 학자 王充이 지은≪論衡≫吉驗篇이나≪魏略≫逸文에 의하면 이른바 동명신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북방에 橐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掩淲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고로 北夷에 夫餘國이 있게 되었다(≪論衡≫吉驗篇).

이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는 동명東明으로 그는 본래 北夷 橐離)국왕의 시녀가 日光에 감응하여 출생한 자로서, 성장하면서 神異한 바가 많았으므로 왕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掩淲水)를 건너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건국자가 일광에 의해 感情出生했다고 하는 몽고·만주에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感精型’ 신화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또한 물고기와 자라떼가 다리를 이루어 大河를 건너게 했다는 설화상의 모티브는 북방의 풍토)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상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의 등을 다리로 해서 바다나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특히 북아시아의 어렵·수렵 제민족 사이에 많이 있었던 것으로, 북아시아지역에서는 얼음이 어는 겨울이 가장 교통이 편리한 때인데, 봄이 되면 얼음이 녹아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풍토 속에서 생겨났음직한 설화로 생각된다.) 결국 동명신화는 부여와 고구려인이 북아시아의 풍토적 현상을 배경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고리국(탁리국)에서 엄표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하여 도읍을 정하였다는 이른바 부족의 이주전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시조를 정복족장으로서 天帝의 아들이나 日月의 아들로 여기고, 자기들을 天神族 또는 신성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 이래 신라의 석탈해·박혁거세설화나 가야의 김수로왕설화에도 보인다. 이들 설화의 기본 내용은 유이민 출신이 왕이 되고 왕비는 대개 토착족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인데, 시기상 대개 고대국가 초기 단계의 국가건설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여의 동명설화도 동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고리국에서의 세력갈등을 피하여 남하·망명함에 따라 송요평원의 先住 濊族들이 이들 동명집단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부여의 건국자들은 ‘고리’라고 이름하는 송화강 북쪽 어느 곳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제1송화강과 제2송화강이 만나 이루는 嫩江지역이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했음이 주목된다. 松嫩平原, 즉 黑龍江省의 三肇지구(肇源·肇州·肇東)와 눈강 이서지방인 길림성의 扶餘·前郭·大安·鎭賚와 乾安 등은 西周시대 이래 白金寶)·漢書)·望海屯) 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 문화유형은 시기상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로 구분이 되지만 동일한 문화계열로 볼 수 있다.

확대보기 <그림 1>중국 동북지방 고대문화 분포도  춘추시대 이전으로 비정되는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의 경우 반지하식 주거지와 土壙竪穴式 매장을 특징으로 하며 三足器(鼎·鬲)·항아리(壺)·물동이(盆·罐)·잔(杯) 등의 단단한 토기와, 돌도끼·돌칼 등 많은 마제석기와 일정 수의 골기도 사용하였다. 이는 경제생활에서 농업과 목축을 병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연대가 이미 戰國에서 西漢시대에 이르며, 분포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다.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해주며, 한서 上層遺址에서는 비록 청동단검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이 지역에서도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380) 製陶業도 상당히 발전하여 생활용구와 생산공구가 모두 반출되고 있으며, 그 중에 彩繪와 紅陶가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철기도 나오는데 주로 구멍이 있는 斧와 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甲片 등의 존재는 군사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 비늘과 토제 그물추의 대량 존재는 어렵이 발달하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중국 한족의 선진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고 그 연대가 서한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문화를 담당한 족속은 당시 송눈평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여족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다만 그것을 부여 조기문화로 보느냐,383) 아니면 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고리국’의 문화로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헌에서 보면 예맥족이 하나의 단일한 종족명으로 등장한 것은 대개 춘추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백금보-한서 하층문화는 춘추시기보다 빠르고, 비록 다같은 예맥족의 문화이기는 하지만 눈강 이남의 吉林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한 서단산문화)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어, 백금보문화는 貊人의 문화이고 서단산문화는 濊人의 문화로 보기도 한다) 이 주장은 백금보-한서 하층문화가 하가점 상층문화와 유사함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대개 하가점 상층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동호족東胡族 계통 외에 맥족貊族 계통도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이 청동기시대에 북쪽 초원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설)을 염두에 둘 때 이 주장은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하가점 상층문화와 백금보문화 및 遼寧 동북부의 문화들이 매우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을 동일유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동호·산융·예맥 등 諸族이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그 원류를 따진다면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해주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389)

어쨌든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그 시기가 부여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는≪사기≫단계보다는 빠르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부여 이전의 부여와 관련된 종족이나 국가의 문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지역이 송화강 중하류와 눈강 하류 일대에 주로 분포하므로 이는 북부여의 先世인 濊貊族 중 한 支派의 문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백금보-망해둔문화 이남 지역에 분포하는 서단산문화가 문화특성상 그 위 지역의 문화와 차이점을 보이다가, 기원전 4∼3세기를 전후하여 토광목곽묘와 중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물이 나오는 등 두 문화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논형≫에 나오는 부여 건국설화와 부합하는 면이 많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