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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활동===
 
===정치활동===
[[청요직]]인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대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이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선조 초 구신(舊臣)과 사림 세력이 [[을사사화]]의 후처리 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혼란한 시기에는 사론을 완만하게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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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요직]]인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대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이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조는 이를 저지하고 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산해]](북인),  [[정철]](서인), 류성룡(남인)을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삼는 三相체제를 전개한다. 그러나 [[기축옥사]](정여립 옥사)의 불공정한 처리 문제로 정철이 쫓겨나 서인 세력이 크게 축출되고 북인은 역모로 인해 기세가 크게 꺾인 상황에서 남인을 중심으로 정국이 개편된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4-7쪽. </ref>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조는 이를 저지하고 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산해]](북인),  [[정철]](서인), 류성룡(남인)을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삼는 三相체제를 전개한다. 그러나 [[기축옥사]](정여림 옥사)의 불공정한 처리 문제로 정철이 쫓겨나 서인 세력이 크게 축출되고 북인은 역모로 인해 기세가 크게 꺾인 상황에서 남인을 중심으로 정국이 개편된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4-7쪽. </ref>
 
 
*전쟁의 대비를 하다
 
*전쟁의 대비를 하다
 
정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과 군대훈련과 같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류성룡은 통신사의 파견을 적극 잔동했다. 그리고 군비의 정비를 주장한 [[김성일]]과 더불어 산성의 축조와 함께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했으며 [[이순신]], [[권율]] 등 장재의 발탁을 통해 요해처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비 태세의 점검을 위해 [[신립]], [[이익]] 등 이름난 장수들이 지방을 순시하도록 추진하였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7-9쪽. </ref>
 
정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과 군대훈련과 같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류성룡은 통신사의 파견을 적극 잔동했다. 그리고 군비의 정비를 주장한 [[김성일]]과 더불어 산성의 축조와 함께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했으며 [[이순신]], [[권율]] 등 장재의 발탁을 통해 요해처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비 태세의 점검을 위해 [[신립]], [[이익]] 등 이름난 장수들이 지방을 순시하도록 추진하였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7-9쪽. </ref>
*임진왜란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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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기 류성룡의 구국활동
 
임란기에는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군량미의 확보나 조선군의 정비에 힘쓰고 뒤이어 올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선조의 의지를 돌리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전투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호남의 곡식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목장을 개설하여 소금을 굽게 하는 등 민생대첵을 건의하였다. 또한 [[이시발]]과 더불어 기교신서를 연구하여 [[훈련도감]]을 창설, 전투력의 강화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일본간의 강화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잃기도 하였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81-2쪽. </ref>
 
임란기에는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군량미의 확보나 조선군의 정비에 힘쓰고 뒤이어 올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선조의 의지를 돌리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전투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호남의 곡식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목장을 개설하여 소금을 굽게 하는 등 민생대첵을 건의하였다. 또한 [[이시발]]과 더불어 기교신서를 연구하여 [[훈련도감]]을 창설, 전투력의 강화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일본간의 강화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잃기도 하였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81-2쪽. </ref>
*정유재란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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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정국 수습
정유년에 전쟁이 재발하여 한산도에서 조선군이 패한 이후 류성룡은 대비를 잘못 했다고 하여 선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도산성 전투]]가 실패로 끝나고 [[이산해]]를 필두로 한 북인 세력으로부터 류성룡을 목표로 한 남인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는 등 정치정세마저 불리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응태 사건]]이 발생하였고 오랜 전란참여로 심신이 함께 약화된 류성룡은 결국 정응태 사건 변무를 위한 사신파견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으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4-6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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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 전쟁이 재발하여 한산도에서 조선군이 패한 이후 류성룡은 대비를 잘못 했다고 하여 선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도산성 전투]]가 실패로 끝나고 [[이산해]]를 필두로 한 북인 세력으로부터 류성룡을 목표로 한 남인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는 등 정치정세마저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정응태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랜 전란참여로 심신이 함께 약화된 류성룡은 결국 정응태 사건 변무를 위한 사신파견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으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ref>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4-6쪽. </ref>
  
 
===저술활동===
 
===저술활동===

2017년 10월 4일 (수) 15:38 판

류성룡(柳成龍)
대표명칭 류성룡
한자표기 柳成龍
생몰년 1542-1607
본관 풍산(豊山)
서애(西厓)
이현(而見)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서애집, 징비록
유중영(柳仲郢)
김광수(金光粹)의 딸


정의

서애 류셩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서애 류셩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황해도 관찰사인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둘쨰아들로 중종 37년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의 소리촌에서 채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0대에는 주로 서울에서 지냈으며 이 때 이순신과 교분을 맺었다. 21세에는 예안의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뵙고 근사록을 수강하여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조목, 김성일 등과도 교유함으로서 후일 퇴계를 종주로 하는 영남학파의 정통에 서게 되었다.[1]

정치활동

청요직인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대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이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조는 이를 저지하고 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산해(북인), 정철(서인), 류성룡(남인)을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삼는 三相체제를 전개한다. 그러나 기축옥사(정여립 옥사)의 불공정한 처리 문제로 정철이 쫓겨나 서인 세력이 크게 축출되고 북인은 역모로 인해 기세가 크게 꺾인 상황에서 남인을 중심으로 정국이 개편된다. [2]

  • 전쟁의 대비를 하다

정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과 군대훈련과 같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류성룡은 통신사의 파견을 적극 잔동했다. 그리고 군비의 정비를 주장한 김성일과 더불어 산성의 축조와 함께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했으며 이순신, 권율 등 장재의 발탁을 통해 요해처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비 태세의 점검을 위해 신립, 이익 등 이름난 장수들이 지방을 순시하도록 추진하였다. [3]

  • 임란기 류성룡의 구국활동

임란기에는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군량미의 확보나 조선군의 정비에 힘쓰고 뒤이어 올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선조의 의지를 돌리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전투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호남의 곡식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목장을 개설하여 소금을 굽게 하는 등 민생대첵을 건의하였다. 또한 이시발과 더불어 기교신서를 연구하여 훈련도감을 창설, 전투력의 강화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일본간의 강화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잃기도 하였다. [4]

  • 임진왜란 후 정국 수습

정유년에 전쟁이 재발하여 한산도에서 조선군이 패한 이후 류성룡은 대비를 잘못 했다고 하여 선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도산성 전투가 실패로 끝나고 이산해를 필두로 한 북인 세력으로부터 류성룡을 목표로 한 남인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는 등 정치정세마저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정응태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랜 전란참여로 심신이 함께 약화된 류성룡은 결국 정응태 사건 변무를 위한 사신파견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으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5]

저술활동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무오당보(戊午黨譜)』, 『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 『황화집(皇華集)』, 『구경연의(九經衍義)』, 『문산집(文山集)』, 『정충록』,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孝經大義)』,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황 류성룡 A는 B의 스승이다
이황 김성일 A는 B의 스승이다
류성룡 김성일 A는 B와 교유하였다
류성룡 이순신 A는 B와 교유하였다
윤임 을사사화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임 기대승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임 심의경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임 이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임 정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준경의 상소 이준경 A는 B에 의해 지어졌다
이준경의 상소 기대승 A는 B를 언급하였다
이준경의 상소 심의경 A는 B를 언급하였다
이준경의 상소 이이 A는 B를 언급하였다
이준경의 상소 정철 A는 B와를 언급하였다
류성룡 이준경의 상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기축옥사 류성룡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기축옥사 정철 A는 B와 관련잉 있다
류성룡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이순신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권율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신립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이익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류성룡 훈련도감 A는 B를 건립하였다
이시발 훈련도감 A는 B를 건립하였다
류성룡 정응태 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류성룡 서애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류성룡 징비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류성룡 퇴계집 A는 B를 편찬하였다

주석

  1.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3쪽.
  2.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4-7쪽.
  3.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7-9쪽.
  4.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81-2쪽.
  5.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4-6쪽.
  6. "유성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도현철,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학문(學問)과 계승(繼承)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 대한 一 시선(視線) - 17세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경우」, 『퇴계학과 유교문화』Vol.55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 김학수,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학문(學問)과 계승(繼承) ; 17세기 서애(西厓) 柳成龍의 학풍(學風)과 그 계승 양상」, 『퇴계학과 유교문화』Vol.55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 우인수,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학문(學問)과 계승(繼承) ; 남북 분당과 서애 류성룡」, 『퇴계학과 유교문화』Vol.55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 장승구, 「류성룡의 철학과 경세론 연구」, 『退溪學報』Vol.134, 퇴계학연구원, 2013.
    • 김호종, 「西厓 柳成龍의 學問과 學統」, 『역사교육논집』Vol.31, 역사교육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