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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2017년 8월 4일 (금) 17:50 판

남구만(南九萬)
대표명칭 남구만
한자표기 南九萬
생몰년 1629-1711
약천(藥泉)
운로(雲路)
출생지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약천집
대표직함 영의정
남일성(南一星)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
상훈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
유형 문신



정의

내용

생애

  • 출생

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1]

  • 교유관계

남구만과 가장 교류가 많았던 유생으로는 서계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이사명(李師命), 최석항(崔錫恒), 정제두(鄭濟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인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하였다. [2]

  • 죽음

1711년(숙종 37) 약천이 83세의 나이로 졸하자 숙종은 애통의 교서를 내리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담군(擔軍)을 일체 관에서 지급하여 그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가 별세할 당시에는 그의 세력인 소론 세력이 약세를 보였던 시기였으며 이후 소론 정권이 득세한 1722년(경종 2)에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3]

정치활동

남구만이 비록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그 시기는 조선 시대 어느 때보다도 당쟁이 치열하고 논란이 많던 시기였던 만큼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벼슬길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4]

  • 입관

23세 7월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곧 이민서(李敏敍) 형제와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민서는 당시 영의정이던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김익희, 이민서 등과 교유하면서 이미 남구만의 학식과 명성이 유림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28세(1656년)에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이후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였다. 다음해 사서, 정언, 문학 등에 제수되어 경연에 참가하였다가 당시 유림의 종장(宗長)이었던 송준길(宋浚吉)의 인정을 받고 문인(門人)이 되어 서인들의 사이에서 명망이 높아졌다.[5]

  • 서인의 대표 논객이 되다

30세에 춘당대(春塘臺)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합격하여 효종(孝宗)에게 특별히 지필묵(紙筆墨)을 하사받고, 효종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친림(親臨)하는 것을 간언하여 막았다. 이 해에 윤선도(尹善道)의 국시소(國是疏)가 올라오자 정언으로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탄핵에 앞장서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의 역할을 하였다. 35세에 호남에 대한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대해 헌의하고, 36세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송시열과 대립하는 김좌명(金佐明)의 파직을 청하다가 체직되었다.[6]

  • 국방사상과 역사관의 확립

복직된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는 남구만의 국방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로 이 즈음의 저술을 주목해 볼 만하다. 여연(閭延),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등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설치하고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의 도로를 개통하여 서북 지방의 실질적인 방어책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주체적인 구토회복(舊土回復) 의식과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이 무관심 속에 방치해 오던 북변지역을 중시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頭滿江)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국경을 사수해야 한다는 의식하에 수만언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북변의 각 읍을 끊임없이 순행하여 민정(民情)을 살피고 군역(軍役)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7]

  • 3차 예송논쟁

1675년 3차 예송(禮訟)의 발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남인과 연계된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전횡을 경계하고 송준길을 두둔하다가 체직되고, 결성으로 돌아온 뒤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등 이후 몇 년간 침체되는 시련을 겪는다. 50세(1678) 10월 형조 판서, 한성 좌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다음해 2월 남인의 영수인 윤휴(尹鑴)와 허견(許堅)을 탄핵하다가 거제(巨濟)로 유배되고 만다.

  • 경신환국

52세(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5월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다.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8]

  • 임술옥사

그즈음 서인들 사이에서는 훈척(勳戚)의 부정과 비리를 두고 젊은 사류들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남구만은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金煥)의 처벌 건과 효종의 세실(世室), 태조(太祖)의 존호 추상 등 안건에서 박세채,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 하여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김익희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또한 윤증(尹拯)의 유현(儒賢) 대우 및 복상(卜相)과 관련하여 김수항(金壽恒)과 대립하면서 46차례나 정사(呈辭)하는 등 갈등을 빚었으나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59세 7월 영의정에 제수된다. [9]

  • 기사환국

1688년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조카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10]

  • 갑술환국 이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약천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는다. 그러나 남인의 실각과 인현왕후 복위의 과정에서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이 자금을 써서 궁금(宮禁)과 결탁하여 공작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약천은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시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정호(鄭澔)와 이현석(李賢錫)을 필두로 한 노론은 김춘택을 비호하면서 민암(閔黯)의 옥사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이 엄하지 않다는 이유로 약천을 탄핵하였는데, 특히 동궁의 보호를 명분으로 장희재(張希載)의 주벌을 반대한 것에 대해 호역(護逆)이라고 비난을 가하며 남인과 연결해 후일을 도모하는 짓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재상을 맡지 않았다. [11]

주석

  1.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2.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3.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4.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5.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6.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7.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8.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9.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10.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11.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