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국의 편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부연설명)
30번째 줄: 30번째 줄:
 
편지의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청상과부 중에 실로 살아서 부질없는 이도 있지만' 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면 김광찬이 죽은 후 아내인 진성 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편지에는 '자녀, 특히 아들인 귀룡(김종수의 아명)을 잘 길러 가문의 재부흥을 도모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의성김씨의 가세가 기울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편지의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청상과부 중에 실로 살아서 부질없는 이도 있지만' 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면 김광찬이 죽은 후 아내인 진성 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편지에는 '자녀, 특히 아들인 귀룡(김종수의 아명)을 잘 길러 가문의 재부흥을 도모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의성김씨의 가세가 기울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br/>
 
<br/>
진성이씨의 이러한 행동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까지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ref>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ref>
+
진성이씨의 이러한 행동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ref>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ref>
 
퇴계의 후손으로서 평소 모범적인 여성의 몸가짐을 배우며 자란 진성이씨의 자진 행위에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열녀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의 후손으로서 평소 모범적인 여성의 몸가짐을 배우며 자란 진성이씨의 자진 행위에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열녀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4월 22일 (토) 22:42 판

김주국의 편지
한글팀 김주국의 편지 01 김주국의 편지 메인.png
영문명칭 A letter of Kim Juguk to his daughter-in-law, Yi of Jinseong
작자 김주국
작성시기 1765년
소장처 의성김씨 학봉종택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5.0×53.0㎝
판본 필사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정의

1765년 6월 14일에 시아버지 김주국(金柱國)이 며느리 진성이씨(眞城李氏)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내용

1765년에 김광찬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김주국진성이씨를 위로하고 손자를 당부하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김주국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과도하게 슬퍼하여 건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와, 남편의 유언을 받들고 어린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가문의 존망이 진성이씨에게 달려 있으니 집안을 잘 보전하고 건강을 잘 돌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하였다. [1]

부연설명

편지의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청상과부 중에 실로 살아서 부질없는 이도 있지만' 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면 김광찬이 죽은 후 아내인 진성 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편지에는 '자녀, 특히 아들인 귀룡(김종수의 아명)을 잘 길러 가문의 재부흥을 도모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의성김씨의 가세가 기울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진성이씨의 이러한 행동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2] 퇴계의 후손으로서 평소 모범적인 여성의 몸가짐을 배우며 자란 진성이씨의 자진 행위에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열녀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주국 김주국의 편지 A는 B를 저술했다 1765년
김광찬 김주국의 편지 A는 B와에 언급된다
김광찬 진성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김주국 김광찬 A는 B의 어버이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65년 김주국이 며느리에게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편지를 부쳤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09771 128.669643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김주국의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72쪽.
  2. 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